Hunter Club RAW - chapter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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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거울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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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를 떠난 일행이 칸다무어에 도착한 것은 아직 차가운 밤공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칸다무어 시내는 야시장이 파하고 남은 물건들을 떨이로 팔고 있는 행상인들과, 각자 쇼핑한 물건을 한 보따리씩 들고 귀가하는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뀐 도시… 여느 때와 같은 칸다무어의 일상이었다.
“아저씨, 여긴 변한 게 없네요.”
“…그러게 말이다.”
칸다무어 시내를 돌아보는 신소율의 눈망울은 어렴풋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목에 감고 있는 밴드를 만지작거리는 신소율을 일별한 노구덕은 축축하게 젖어든 밤공기를 크게 폐부로 들이켰다.
‘실렌….’
그녀와 함께 보냈던 기억이 불과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칸다무어 야시장은 그가 실렌과 신소율에게 선물을 하나씩 사 주었던 곳이다. 실렌에게는 은빛의 서클렛을, 신소율에게는 지금 착용하고 있는 밴드형 목걸이를 선물해줬더랬다.
다시 찾은 도시의 정취는 그대로인데, 오직 사람만이 간데없다. 잠시 옛 사람을 추억하던 노구덕은 울적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약속된 장소로 일행을 인도했다.
북적거리는 칸다무어의 대로를 가로질러, 일행이 이른 곳은 도심 뒷골목의 어느 허름한 술집이었다. 이미 폐업을 했는지, 아니면 장사 시간이 아닌 건지, 낡아빠진 문에는 ‘CLOSED’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힌 명패가 달랑 걸려 있었다.
문 앞에 선 노구덕이 임유진을 쳐다보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느껴지는 이목이 없다는 뜻. 그러자 노구덕은 명패 따윈 안중에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윽… 냄새!”
술집 안은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은 듯 곳곳에서 퀴퀴한 곰팡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신소율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린 안세희가 정화 주문을 사용하려고 하자, 노구덕은 팔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지 말거라. 폐업한 술집에서 곰팡내가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말인즉슨, 괜히 정화 주문을 써서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말라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혹시 다시 꾸며놓아야 하나 걱정했거든요.”
삐거덕,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등불 하나를 들고 나타난 젊은 남자는 이곳 칸다무어 지역의 상회를 맡고 있는 패터슨이었다.
“백부님. 드디어 연맹 위원이 되셨다고요.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놈, 벌써부터 격식 차리기냐.”
간만에 만난 조카와 백부는 굳게 손을 맞잡았다.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남자 대 남자로서의 강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많이 야윈 것 같은데. 밥은 제대로 챙겨먹고 있는 거니?”
“하하! 물론이지요.”
신소율, 임유진 등 다른 일행들과도 친숙하게 인사를 나눈 패터슨은 좀 더 깊숙한 지하로 일행을 데려갔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와인 창고나 다를 바 없는 지하실의 뒷문을 열자, 비교적 깨끗한 가구들이 들어선 작은 밀실이 나타났다. 퀴퀴한 위층과는 달리 실내 공기가 산뜻하고 청량한 게, 어딘가에 정화 주문이 걸려 있는 정화석이라도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패터슨은 밀실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뒤쪽으로는 여러분께서 묵을 숙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방은 넉넉하니,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을 쓰시면 됩니다.”
“저… 공주님께서는 어디에…?”
있는 듯 없는 듯, 줄곧 미약한 존재감으로 일행을 뒤따르고 있던 황기종은 밀실에 도착하자마자 초조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사람을 찾았다. 만나기로 한 네리아가 보이지 않자 금세 또 불안해진 것 같았다.
“예. 그렇잖아도 지금 여기 모셔왔습니다.”
미소를 지은 패터슨이 철문에 걸린 빗장을 풀자, 기다렸다는 듯 철문이 벌컥 열리며 묘령의 엘프 여인이 고무공처럼 튀어나왔다.
“기종 씨!”
“네, 네리아 공주님!”
나비처럼 날아든 네리아는 인정사정없이 황기종의 빈약한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황기종의 장작대기 같은 몸이 금방이라도 꺾일 듯 크게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옆에 서 있던 이두식의 부축으로 그런 볼썽사나운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네리아는 마치 십년 만에 연인과 해후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러운 울음을 쏟아내며 황기종의 앞섶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그리던 연인을 만나게 되자 지금까지 고난을 겪어오며 쌓여있던 설움이 일시에 폭발해버린 것이다.
“…저 사람이 거울 숲의 공주님?”
“뭔가, 상상하던 것과는 좀 다른 이미진데요? 그래도, 기종 오빠 능력 있네. 공주님이랑도 사귀고.”
“응. 그나저나 사슴뿔 부족이라고 하더니… 정말 뿔이 있잖아? 신기하네.”
두 사람의 격한 포옹을 지켜보던 나타샤, 신소율, 박지현의 수군거림이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보든 간에, 한동안 엉엉 울며 묵은 속을 비워내던 네리아는 비로소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퉁퉁 부어버린 눈매를 훔치며 코를 훌쩍거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로…! 훌쩍….”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에…?”
“…흑.”
그녀에게 다른 일행의 행방을 묻던 황기종은 급히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울음을 그치나 했던 네리아의 눈에 다시 주렁주렁 눈물방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신중치 못한 자신을 탓하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네리아 공주님, 이분들이 유적 탐사에 도움을 주실 분들입니다.”
“미, 미안해. 바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사슴뿔 부족의 네리아야.”
겨우 정신을 수습한 네리아는 살며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멀거니 서 있는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반말일색인 말투 치고는 나름대로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려 노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 말투는 평생을 공주로서 살아오며 굳어진 습관 같은 것이리라. 아마 외부인을 만난 적이 없었을 테니, 따로 격식을 배울 필요도 없었을 터.
“반갑습니다, 공주. 여기 일행을 이끌고 있는 노구덕이라고 합니다.”
“응. 반가워요. 노구덕 님.”
그래도 일행의 리더이고, 척 보기에도 연배가 있어 보이는 노구덕에게는 어색한 요 자를 붙이며 대접해 주는 네리아였다. 본래 숲의 부족들이 타지인에게 심히 배타적이라는 걸 감안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호의적인 모습이라 할 만했다.
여기에는 패터슨의 호의가 크게 작용했다.
“패터슨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 패터슨이 아니었다면 도움을 구할 여지조차 사라졌을 테니까. 그는 노구덕 님의 부하지? 고마워요, 노구덕 님.”
뭔가 반말이라고 하기도, 존대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말투였지만,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노구덕은 무뚝뚝한 얼굴로 네리아의 내민 손을 맞잡았다.
“별말씀을.”
애초에 무일푼인 황기종이 값비싼 워프게이트의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서부 지구로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패터슨의 지원 덕분이었다.
2년 전, 그리드의 주도하에 진행된 사업체 습격과, 서부로의 대대적인 기반 이전은 노구덕이 소유한 동부 지구의 상권을 거의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패터슨이 책임자로 있는 칸다무어 상회도 마찬가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타개책을 물색하던 패터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칸다무어와 인접한 ‘거울의 숲’이었다. 노예상이 활로를 찾으려면 결국 매물을 만들어야 하고, 숲의 부족들은 매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전처럼 부족에서 죄를 지은 자들이나, 추방자들을 노예 매물로서 거래할 수 있다면 답답한 상회의 상황도 조금 숨통이 트일 수 있을 터다.
그렇게 생각한 패터슨은 곧바로 거울의 숲의 동향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다. 어째서 2년 전부터 매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는지, 숲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 과정에서 외부의 도움을 바라던 사슴뿔 부족과 접촉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같은 외지인 출신으로서, 사슴뿔 부족의 대표로 나선 황기종과 교섭을 하던 패터슨은 그가 옛 기억에 의지해 아이리스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더 나아가 황기종이 노구덕의 드래프트 동기라는 것까지 꼼꼼히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
이후, 패터슨은 비밀리에 황기종을 아이리스에 보냄으로써, 모든 판단을 노구덕에게 맡겼다. 자칫 잘못하면 늑대왕과 적대하게 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다만 그는 언제까지고 노구덕의 결정을 기다리며 멍하니 있지만은 않았다. 패터슨은 노구덕이 칸다무어로 넘어올 것에 대비해, 상회의 전력을 기울여 숲을 탈출하는 네리아 일행을 몰래 빼돌렸다. 아마 그가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네리아는 숲을 탈출하기도 전에 늑대왕의 수하들에게 붙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제게 감사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주님. 전 단지 ‘냄새’를 맡았을 뿐이니까요.”
“또 그놈의 냄새로군. 이 녀석, 소피아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소피아도 그렇고, 패터슨도 그렇고. 사업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자들은 범인에게 보이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보면 볼수록 천생 무인인 멜릭에게서 이런 녀석이 태어났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실망하여 돌아가려던 황기종을 추궁해 그의 진짜 목적을 밝혀낸 소피아, 행운이 따르긴 했지만 시기적절하게 숲의 부족과 접촉하여 네리아 일행을 구해낸 패터슨. 따지고 보면 이번 원행은 이 두 사람이 합작한 작품인 셈이었다.
“그런데 노구덕 님, 괜찮아? 늑대왕의 영지에 들어가도….”
“흠. 해당 유적은 늑대왕의 영토 밖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쪽이 탐사를 해도 문제될 건 없다는 말이지요.”
대삼림은 일개 개인이 영토로 소유하기엔 지나치게 큰 땅이다. 그 중에서 늑대왕이 영지선포를 한 곳은 거울의 숲 외곽지역으로서, 숲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약 삼 분의 일 정도에 해당하는 구역이었다.
“위원회는 아마 그놈을 첨병 삼아 거울의 숲을 정벌하려는 의도일 겁니다. 그렇다고 숲 전체를 주면 지나치게 영지가 커지니, 아마 그 정도로 영토의 크기를 한정한 것이겠죠.”
“맞아요! 우리가 위원회에 항의했을 때, 그자들은 십존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며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어!”
거울의 숲은 위원회에서 인정한 자치령이니, 위원회의 이름을 내세워 빼앗을 수는 없다. 그러나 표면적인 독립 세력인 십존을 움직이면 명분에도 어긋나지 않게 자치령을 굴복시킬 수 있다. 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거울의 숲과 늑대왕 사이의 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위원회는 나서지 않겠다는 뜻인데… 이 룰을 잘만 활용하면 어떤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돌파구? 정말이야? 어떻게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캐묻는 네리아의 얼굴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이마 위에 작게 돋아나 있는 사슴뿔도 독특한 매력 포인트. 황기종이 어떻게 이 아가씨를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아마 일생 일대의 행운을 잡은 것이 아닐까?
“그거야 나중에 가서 생각해 봐야지요.”
“우으읏… 지금은 방법이 없는 거야요?”
“일단은 탐사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거예요’가 맞습니다.”
“미안해요. 존댓말, 익숙하지가 않아서….”
“편하신 대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 공주님. 탐사 보수에 관해서 말인데….”
기가 죽은 듯, 토끼처럼 귀를 늘어뜨린 네리아가 노구덕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때, 빛을 발하는 통신용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패터슨의 얼굴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백부님. 네리아 공주님을 쫓던 추격자들이 숲을 나온 것 같습니다. 곧 칸다무어 시내로 진입할 것 같다는군요.”
“추격자? 늑대왕의 부하들이냐?”
“예. 라이칸스로프로 짐작되는 남자 여섯이라고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늑대왕의 친동생인 와일드팽이라고 합니다.”
“윽! 그 자식이…!”
한쪽에서 분에 겨운 듯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일드팽과 구원이 있는 신소율의 목소리였다.
와일드팽이라면 그와도 얽혀 있는 게 좀 있다. 이죽거리며 뻐기는 놈의 얼굴을 떠올린 노구덕은 담담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기에는 딱 좋은 놈이 굴러 들어왔군.”
“설마 싸울 생각? 노구덕 님! 와일드팽은 늑대왕의 동생이야! 강한 사람이라고!”
“놈이 강해봤자 제 형보다 강하진 않겠지요.”
“무모해요! 탐사 전에 다치기라도 하면……!”
노구덕을 뜯어말리던 네리아는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얹어지자, 멍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공주의 머리를 멋대로 쓰다듬다니. 크게 꾸짖을 만한 무례한 행위였으나, 왜인지 모르게 감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주님. 한번 맡겼으면 잠자코 끝까지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고용주의 바람직한 자세니까요.”
“…응.”
네리아는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본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 거구의 오크가 풍기는 위압감에 꼼짝없이 압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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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코 부탁드립니다.
간신히 세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