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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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Illusionist
“이 녀석, 간만에 한 건 했구나.”
노구덕이 김진솔의 어깨를 두드리자, 베로니카의 수정구도 웅웅거리는 울림을 토해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호호. 이번에는 겁쟁이 꼬맹이가 이긴 것 같구나.
“쳇. 운이 좋았던 거야.”
“입 다물고 뛰기나 해. 본 월(Bone wall)!”
“헹, 알았다구요.”
아쉽게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던 신소율은 데모나의 뾰족한 핀잔에 흥흥거리는 콧바람을 불어대며 드러난 비밀통로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후 데모나가 견고한 뼈의 장벽을 세워 리빙아머들의 진입을 늦추는 사이, 일행은 전원 무사히 비밀통로 안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배후에서 시간을 끌던 데모나와 헨더슨을 마지막으로, 탐사대 전부가 통로 안쪽으로 들어오자 공동에 남아있던 리빙아머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우두커니 행동을 멈추었다. 베로니카의 예상대로, 분신들의 인지 범위는 소환진이 펼쳐진 공동 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반투명하게 덮여 있는 얇은 결계막 너머로, 움직임이 정지된 분신들을 놀라운 얼굴로 쳐다보던 네리아는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며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부족을 대표하는 강인한 전사들을 대동하고도 분루를 삼키며 패퇴해야했던 저 공동을 별다른 피해도 없이 손쉽게 돌파했단 사실이 쉬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단해! 이대로라면 정말로 할 수 있겠어! 노구덕 님, 굉장해요!”
“별말씀을. 이제 고작 제1구역을 돌파했을 뿐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으응…. 그렇긴 하지만.”
네리아의 근처에 서 있는 황기종 또한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아이리스의 전력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들과 드래프트 회장에서 헤어진 게 불과 4년 전.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토록 강해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와일드팽 일당을 손쉽게 가지고 놀 듯 처치해버린 것도 그렇고, 환영 분신들과의 싸움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이들은 빅리그 수준의 헌터들이 아니었다. 최소한 5대 리그, 어쩌면 프라임리그의 수준에 근접한 실력자들이었다.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조금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 이들은 누구보다 든든하게 의지되는 아군이었다.
‘부족의 재건까지 도와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들과 함께라면 뿔뿔이 흩어진 부족민들을 다시 규합하고, 늑대왕의 세력과 당당히 일전을 겨룰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득 이런 욕심이 고개를 들 때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었다. 최악의 경우, 십존인 늑대왕과의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탐사를 도와주고 있는 이들이다. 비록 그 목적이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라고는 하나,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슴뿔 부족으로선 그마저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였다.
황기종이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염두를 굴리고 있는 사이, 쭉쭉 뻗어있는 비밀통로의 안쪽을 향해 나아가던 일행은 제1구역과 비슷한 크기의 공동에 도달했다.
소환진이 발동하기 전까지 용도를 알 수 없었던 1구역과는 달리, 이곳은 척 보기에도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가는 곳이었다.
촉촉한 실내의 공기에 희미하게 뒤섞여 있는 것은 옅은 쇠 냄새. 공동의 중앙에는 불이 꺼져 차게 식어버린 커다란 가마가 있고, 주변에는 복수의 거푸집과 망치, 모루 등 제련에 사용되는 도구가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
우측에는 빛바랜 금속 주괴가 벌집처럼 차곡차곡 쌓아올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어둠 속에서도 누런빛을 발하는 황금 주괴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그 아래엔 미조립 상태의 갑옷 파편들이 부위 별로 모여 있어, 이곳이 리빙아머의 제조를 담당하는 공방(工房)임을 짐작케 했다.
공동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으로 마력을 발산해, 공동 전체를 빠르게 스캔한 임유진은 차분하게 그 결과를 알려주었다.
“…느껴지는 마력은 없어요. 평범한 공방인 것 같네요.”
“좋아. 그럼 2인 1조로 흩어져서 주변을 탐색하도록 하자. 위험하니 서로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말도록. 혹시 함정 같은 게 깔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네!”
노구덕은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헌터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마력적인 요소도 없고, 있어 봐야 고철 무더기가 전부인 이런 곳에 무슨 위협이 있으랴마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이 잔뼈가 굵은 헌터들인 일행이 방심할 리는 없다. 노구덕의 충고는 그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네리아와 황기종을 겨냥한 것이었다.
“공주님, 가시지요.”
“…응.”
자연스럽게 같은 조가 된 두 사람은 불완전한 리빙아머들의 파편이 쌓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차라리 따로 떨어져서 헌터들과 짝을 이루는 편이 좋았을 텐데….’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행동을 같이 하라는 배려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짐짝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조금 야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와 네리아의 실력은 리빙아머 한 기조차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만약 저기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는 리빙아머 한 기가 벌떡 일어나서 습격이라도 해 온다면…….
‘아니, 그럴 리는 없지. 붉은 봉황이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리빙아머의 존재가 두렵기는 했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마법사. 좀처럼 볼 수 없는 연금술의 공방을 두고 가만히 있기에는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일행이 모두 발품을 팔고 있는데 둘이서만 가만히 있는 것도 괜히 눈치가 보이는 것 같고. 여러모로 그냥 있기엔 불편한 처지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나란히 걷고 있는 네리아의 표정에 짙은 수심이 드리워진 것이 보였다. 탐사는 잘 진행되고 있는데 무슨 염려할 만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네리아 공주님?”
“으, 응?”
“왜 그러십니까? 무슨 걱정이라도…?”
“…아니…. 걱정하는 건 아냐…. 그냥…….”
말끝을 흐리던 네리아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던 애꿎은 금속 조각을 발끝으로 톡 건드렸다. 성질머리대로 힘껏 발길질을 하려다가 주변의 눈치를 봐서 꾹 눌러 참는 모양새였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하시지요.”
“그런 건 없어. 단지… 우리가, 내가 너무 약한 것 같아서… 조금 짜증이 났을 뿐이야. 외지인의 도움을 받고 희희낙락하는 꼴이라니… 너무 한심해.”
“…….”
무어라 위로를 해 주려던 황기종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던 제1구역을 쉽사리 돌파하면서 마냥 기쁨에 겨워보였던 네리아. 그러나 그녀도 나름대로 심중이 복잡했던 모양이었다.
“공주님….”
줄곧 네리아를 옆에서 봐 왔던 황기종은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거울의 숲은 대대로 타지의 간섭을 배제하는 부족 사회였다. 그런 폐쇄적인 사회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자라온 네리아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부족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이자, 스스로의 지위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방식인 셈. 그런데 생전 처음 접한 외지인인 늑대왕에 의해 그 세계가 철저히 부서져버렸다. 여태껏 그녀를 떠받치던 부족 사회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부족의 자랑이던 전사들은 늑대왕의 일수도 감당치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죽어나갔다.
그녀의 아버지인 사슴뿔 부족의 족장은 늑대왕에 의해 오체분시가 되어 장대에 목이 내걸리는 신세가 되었고, 어머니는 흉폭한 라이칸스로프들에 의해 돌아가며 윤간을 당하다, 성기가 찢어져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 짐승들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고 말았다.
그 모든 참상이 네리아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네리아가 그간 어린아이처럼 황기종을 의지하며, 일시적으로 유아퇴행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것도 당시의 충격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황기종으로선 그녀를 대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마다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숲을 탈출한 뒤에는 조금 괜찮아진 듯 했지만, 여전히 네리아의 심리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병이나 다름없었다.
“그 더러운 짐승… 십존이라고 했지? 바깥에는 그런 괴물들이 열 명이나 더 있다고?”
“…그렇습니다.”
“무녀님을 다시 부른다고 해도… 그런 괴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난… 모르겠어. 아니, 어쩌면 무녀님도 그놈들을 이기지 못할 지도 몰라.”
의심…. 거울의 숲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로서, 월광의 무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전의 네리아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았을 불경한 발언이었다.
“…….”
황기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면서도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심정 또한 네리아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십존이나 월광의 무녀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 또한 세상물정에는 거의 아는 게 없는 문외한이었다.
“…난 세상에서 아버지와 티토가 제일 강한 줄 알았어…. 그놈들이 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이게 뭐야? 아버진 그놈한테 온갖 치욕을 당하며 놀아나다 돌아가셨고, 티토도… 졸개들 몇 마리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잖아. 부족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람들이… 이게 뭐냐구? 정말 한심해….”
“공주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족장님과 티토님께서는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
“나도 알아! 그런데 그래서 뭐! 결국 나만 남기고 다 죽어버렸잖아! 늑대왕, 그놈이 물러가면, 그 다음은 있어? 그런 놈이 두 명, 세 명이 오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네리아의 높아진 언성을 들었음인지, 주위에서 탐색에 몰두하고 있던 헌터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안해진 황기종은 다급히 그녀의 소매를 붙잡아 공방의 구석으로 이끌었다.
“공주님의 심정은 제가 잘 압니다. 그러나 달리 수가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은 이곳을 탐사해 보고, 무녀님의 행방을 쫓는 것이 최선입니다.”
“힘이 필요해….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을 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조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황기종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네리아의 입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공주님?”
“이 리빙아머들… 얼마나 있을 것 같아?”
“그, 글쎄요… 이곳 공방만 해도 대충 백여 기 정도는 잠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유적 전체로 보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그것들을 전부 아군으로 만들면, 큰 힘이 되겠지?”
“…예?”
그렇잖아도 모기소리 같던 네리아의 음성이 더욱 낮아졌다. 소리를 죽인 네리아의 눈은 연신 주위 헌터들의 낌새를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황기종이 그녀를 끌고 헌터들에게서 동떨어진 곳으로 온 덕분에, 그들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스레 눈을 굴리던 네리아는 품속에서 반달 모양의 목걸이를 하나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이, 이건… 족장님의 목걸이 아닙니까?”
“쉿. 목소리 낮춰.”
네리아가 꺼내든 것은 그녀의 목걸이, ‘후계자의 증표’와 한 쌍을 이루는 ‘왕의 증표’였다. 두 목걸이는 같은 반월(半月)형을 띠면서, 하나는 상현달(上弦), 다른 하나는 하현달(下弦)의 모양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네리아는 두 개의 달을 하나로 결합했다. 그러자 어떤 접착기능도 없는 이음새가 절묘하게 맞물리며 두 개의 목걸이가 완연한 보름달의 형상이 되었다.
“봤지?”
그녀는 황기종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두 개의 목걸이를 금세 다시 분리했다.
“대, 대체 이건…?”
황기종은 깜짝 마술쇼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그럴 만했다. 두 목걸이에 결합 기능이 있다는 것은 몇 년을 네리아의 곁에서 생활한 그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으니까.
“…놀랐지? 이곳 유적에서만 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하나 더.”
“……?”
“이 목걸이로… 유적의 리빙아머들을 부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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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자서 아침화 연재가 조금 뒤로 밀렸네요.
저녁화는 제가 특별히 바쁘지 않는 한 이변 없이 올라갈 것 같습니다.
일주일 다시 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