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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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Illusionist
모공을 찔러오는 위압감을 느껴, 무심결에 뒤로 물러났던 노구덕은 청기사의 투구 안쪽에 샛노란 눈이 뜨여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먹잇감을 노리듯 번들거리고, 황금색의 눈자위가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뱀의 눈. 강철 왕좌에 느긋이 앉아 있는 브리트라의 화신과 똑같이 생긴 눈이었다.
“오너!”
“형님!”
“뭐하는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여러 외침들이 일순 흐리멍덩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뭐였지?’
잠깐, 저 눈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노구덕은 감각이 이끄는 대로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간발의 차이로 날카로운 검광이 눈앞을 스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이두식의 거대한 동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워어어어어어!”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대기가 무참할 정도로 뭉그러졌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노구덕과는 달리, 이두식이 가진 무투의 재능을 한껏 살린 주먹질이었다. 신소율의 데스스토커와 나란히 할 만한 벌레교단의 비전, 붕권(崩拳)이었다.
만근 거력이 실린 그 힘은 절대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잠깐 뒷전으로 밀려났던 노구덕도, 옆에서 짓쳐들고 있던 나타샤도 모두 청기사가 뒤로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철저한 오산이었다.
청기사는 검을 쥐고 있지 않은 다른 팔로 이두식의 주먹을 받아냈다. 그것도 뒷걸음질을 치거나 비틀거리지 않고, 솜뭉치를 붙잡듯 아주 사뿐하고 경쾌한 동작이었다. 야수로 화한 이두식의 입이 크나큰 경악성을 발했을 때, 청기사의 반대쪽 팔은 무자비한 호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두식아! 안 돼!”
처절한 비명을 내지른 나타샤가 얼른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 했지만, 청기사의 검은 그녀의 발보다 빨랐다. 어찌할 새도 없이, 이두식의 거구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불꽃의 검기가 그의 온 몸을 불사르고 지나갔다.
“크아아아아!”
살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털과 살가죽이 온통 타들어간 이두식은 그야말로 숯덩이가 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화상보다 심각한 것은 가슴팍과 복부를 길게 가로지르는 검상이었다.
“두식 오빠!”
“이 미친년이! 죽여버리겠어!”
후방에 떨어져 있던 안세희의 신성력이 이두식을 감싸는 것을 확인한 나타샤는 빠드득거리는 잇소리를 내며 청기사에게 칼끝을 겨누었다.
-궁금하구나. 과연 날 죽일 수 있을지, 어떨지.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소원대로!”
나타샤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 무섭게, 데모나의 주문이 그 뒤를 잇따랐다.
“…섀도우 바인드(Shadow bind), 다크 스피어(Dark spear)!”
바닥에 스며든 그림자가 솟구쳐 오르며 청기사의 갑주를 빈틈없이 꽁꽁 옭아매고, 수십여 개에 달하는 어둠의 창이 옴짝달싹 못하는 갑주를 사정없이 두드려댔다. 필시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갑옷에 전해지는 충격만으로도 피곤죽이 되었을 터.
“죽어!”
순식간에 그 배후를 점한 나타샤는 고속으로 회전하는 칼날을 청기사의 목덜미에 깊숙이 쑤셔 박았다. 초진동의 칼날이 좁아터진 이음매와 이음매 사이를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훑고 지나가자, 여태껏 굳건히 갑주에 붙어있던 청기사의 머리통이 삐끗거리며 어긋나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투구가 그 어깨 위에서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통. 토로로로….
“끄, 끝인가?”
움직임을 정지한 청기사의 몸뚱이와 그 아래에서 구르고 있는 투구를 멍한 눈으로 번갈아 쳐다보던 나타샤가 더듬더듬 중얼거리는 찰나, 돌멩이처럼 구르던 투구 사이에서 사이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헉…! 아아아아아악!”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낀 순간, 나타샤의 몸은 이미 밑에서부터 치솟은 불기둥에 휩싸이고 말았다. 땅거죽을 뒤집으며 삽시간에 드높은 천장까지 솟아오른 화염의 기둥. 어찌할 도리 없이 그 안에 갇혀, 처절히 몸부림을 치던 나타샤의 움직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멎어버렸다.
“누님!”
괴롭게 숨을 몰아쉬다, 그 광경을 본 이두식은 비통한 외침을 토해내며 숯검댕이가 된 몸을 청기사에게 들이받았다.
-미련한 녀석이로고.
쿵!
청기사가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까딱이자, 두 눈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달려오던 이두식의 거구가 돌연히 멈춰서며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돌바닥이 움푹움푹 짓눌려 들어가는 게, 꼭 그의 주위에만 막대한 압력이 작용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네 주변의 중력을 조금 손 봤느니. 억지로 발버둥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크아아아아!”
이두식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으나 그럴수록 그의 몸은 땅 속으로 더욱 깊이 파묻힐 뿐이었다. 브리트라가 강화시킨 중력의 힘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온몸의 관절이 꾸드득거리는 기음을 내며 비틀리고, 전신 혈관이 펑펑 터져 그 주변으로 세찬 피보라가 흩뿌려졌다.
-다음은 너희들 차례로구나.
가볍게 손을 놀려 나타샤와 이두식을 처치한 브리트라는 예의 그 뱀 같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노구덕과 데모나를 쳐다보았다. 그 뒤에는 새파랗게 질린 헨더슨과 안세희, 김진솔의 얼굴도 있었으나, 그들은 애초부터 브리트라의 관심 밖이었다.
그 섬뜩한 시선을 마주한 데모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두 개의 수정구를 품에서 꺼냈다. 리치 베로니카와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봉인된 봉인석이었다.
“구더기…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 거야.”
“…….”
노구덕은 아까부터 백태가 끼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타샤가 불기둥에 휩싸일 때도, 이두식이 중력에 무릎을 꿇을 때도 그의 표정은 입을 헤 벌린 바보 같은 얼굴 그대로였다.
“정신 차려!”
참다못한 데모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매섭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뺨을 얻어맞은 넙대대한 상판이 살짝 돌아가자, 줄곧 썩은 생선 눈깔을 하고 있던 그의 동공에 비로소 희미한 초점이 잡혔다.
“데모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어눌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데모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뺨을 후려치며 모질게 쏘아붙였다.
“이 머저리! 기세 좋게 싸움을 걸 때는 언제고, 뭘 멍청히 서 있어! 아직도 사태 파악이…! 웃!”
욕지기를 퍼붓던 데모나는 크게 눈을 부릅떴다. 멍하게 서 있던 노구덕이 갑자기 그녀의 몸을 깊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더욱 기막힌 일은 그 다음이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노구덕의 손이 슬금슬금 앞섶을 풀어헤치더니, 밀떡처럼 뽀얀 젖무덤을 대놓고 주물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생사의 기로가 달려 있는 이 긴박한 와중에, 이따위 파렴치한 행위라니. 데모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화를 내지도 못하고 붕어처럼 입술을 뻐금거렸다. 어이가 없어 목구멍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태연스레 그녀의 젖가슴을 조물조물 어루만지던 노구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감도가 좋군.”
“이, 미…미친…!”
“가짜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
“뭐, 뭣?”
아연히 눈을 치뜬 데모나가 노구덕을 올려다봤을 때, 그의 시선은 이미 전면의 청기사… 아니, 브리트라를 향해 있었다.
“예전에 이 비슷한 주문을 겪은 적이 있었지. 내가 당한 건 아니고, 우연치 않게 휘말린 거지만……. 덕분에 이런 주문의 위험성을 깨달았지. 아무리 강해도 정신적인 약점을 파고 들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소리니까.”
-…….
“우리 쪽 전문가가 그러더군. 정신계 주문과 환상계 주문은 상대의 감각에 직간접적으로 간섭한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그럼 이 주문에 걸렸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글쎄,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
“함정형 주문에 걸린 경우는 꽤 까다롭지. 하지만 술자가 따로 있는 환상 주문이라면 얘기가 달라. 이런 종류의 환상 주문은 술자의 시나리오대로 얘기를 써 내려가는 거거든. 한마디로, 시나리오를 꼬이게 하면 주문을 깰 여지가 생긴다는 거다.
브리트라는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들 주위의 광경은 화면이 전환된 것처럼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노구덕이 안고 있던 데모나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두식과 나타샤도, 어두컴컴한 대공동도 사라져, 사방이 온통 칙칙한 검은색 일색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날 당황시켰다는 게냐?
“그것도 있고… 크흠! 허상으로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정 안되면 끝까지 가 보려고 했는데, 겨우 가슴 정도로 끝나서 조금 안타깝기는 하군. 그 여자가 좀 앙칼진 면이 있어서… 최근에 좀 소원하거든. 그건 그렇고, 천 년을 산 뱀치고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데.”
브리트라는 그 솔직한 대답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끄덕끄덕 머리를 움직였다.
-인정한다. 이런 식으로 환상을 깨는 녀석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이니. 허나 설명만으로는 많이 부족한 감이 있구나. 이 환상진은 겨우 날 당황시킨 정도로 깨지지 않는다. 네게 이 모든 것이 허구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지 않은 이상…….
“이래봬도 난 주술사니까.”
노구덕은 가슴팍을 열어 선홍색으로 물든 핏빛의 문신을 보여주었다. 눈, 코, 입이 조악하게 찍혀, 꼭 어린아이가 사람의 얼굴을 그려 놓은 것처럼 허술해 보이는 문신이었다.
그것은 정신 계열 주문에 취약한 노구덕을 위해 데모나가 그려 놓은 방어 술식으로, 마녀의 ‘주술가면’을 대체하는 대용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기능은 주술가면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단순히 환상 및 정신계 주문에 대한 저항력이라면 큰 효력을 발휘하는 술식이었다.
브리트라의 만화경은 허구 속에서의 죽음을 실재로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주문이다. 당연히, 데모나의 가슴을 한 번 주무른다고 해서 깨지고 마는 그런 허접한 주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주문도 애초에 걸리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노구덕은 처음부터 만화경에 말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하군.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내게, 이 정도까지 생생한 환상을 보여주다니… 거의 강제로 세뇌를 시키는 수준이야.”
시작부터 마술의 트릭을 알고 있었던 관객조차 자칫하면 깜빡 속아 넘어가고야 마는 마술. 그것이 브리트라의 만화경이었다.
-완벽한 내 실수로구나. 오크라 하여 정신 면역이 취약할 거라 판단했거늘… 겉보기엔 영락없는 무투파이면서, 주술사이기도 하다니….
“사연이 좀 있거든. 그런데… 이 깜깜한 공간은 왜 사라지지 않는 거지?”
-이제야 겨우 눈치 챈 모양이구나. 내 권능으로 네 정신을 이곳에 가두었다. 정 나가고 싶다면, 날 쓰러뜨려야 가능할 게다.
“그건 반가운 일이군.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오만한 인간… 으으으으음…?
노구덕을 비웃으며 칼을 겨누었던 브리트라의 몸이 갑자기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온통 칠흑빛으로 덧칠되어 있던 어둠의 공간에 실금 같은 균열이 생기더니, 그 틈새가 쩌적쩌적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던 브리트라는 칼자루를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곤, 돌연 크게 고개를 치켜들며 기함했다.
-으으… 괴롭다…. 이, 이 무슨…? 저주! 이건 저주로구나!
“저주…? 아, 바깥에서 우리 마녀가 힘을 내고 있는 모양이군.
-마녀라고? 대체 어떻게… 본체는 절대 건드릴 수 없을 터인데!
“본체는 건드릴 수 없지만, 네 몸의 일부는 가지고 있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 목걸이… 네 일부라고.”
-……!
투구 틈 사이로 보이는 뱀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진 순간, 두 사람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칠흑의 공간이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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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데모나의 저주가 빛을 발했군요. 예전에 마녀의 산에서 히드라를 상대할 때도 이 저주로 틈을 만든 적이 있었죠…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요. 하하..
오전에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많이 늦었습니다. 겨우 올리고 급히 출근합니다 ㅠㅠ 리리플 달아드리지 못해 죄송하네요.
궁금하신 점 있으면 이번화 리플로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