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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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Illusionist
드디어, 베일이 걷히듯 환영으로 얼룩진 공간이 사라지고 현실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장의 상황은 처음 브리트라의 만화경에 말려들었을 때… 그러니까 뱀의 눈과 마주쳤을 당시에 비해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길어야 1초 정도? 제단 위로 달려가는 임유진, 신소율, 박지현의 위치가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 이건 확실했다.
‘환상 속에서만 시간이 흐른 건가….’
시간을 가늠하던 노구덕은 불현듯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방어 술식으로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만화경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강력한 마법. 아직까지 그 마력의 잔재가 남아 몸에 부하를 주는 듯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조금 어지러울 뿐이니까.”
“두식아! 지금 오너가 문제가 아니야! 저놈, 뭔진 몰라도 조금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 가자!”
“알겠습니다!”
나타샤와 이두식의 팔팔한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환상이라지만, 가족 같은 동료가 당하는 장면은 결코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반면, 브리트라는 걸어오던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멈추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목걸이를 매개로 한 데모나의 저주가 본체를 직격해, 미라지 나이트를 조종할 여력이 없는 듯했다. 그건, 지금 막 들려온 기계음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미라지 나이트, 자동 모드로 가동합니다.
데모나가 브리트라에게 건 것은 기운을 빼앗는 탈력(奪力)과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혼몽(昏懜)의 저주. 둘 모두 마녀회의 강력한 비전이긴 하나, 저주의 특성상 시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주문이 지속되는 동안 술자의 행동을 제약하여 실전에 쓰기에는 다소 문제가 많은 기술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단점들도 현재 상황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최적의 상황을 맞이한 데모나는 그간 꽁꽁 숨겨두었던 히든카드의 위력을 유감없이 내보이는 중이었다.
-이노옴…드으으을–!
다급해진 브리트라는 좀 전의 여유를 어디론가 내팽개치고, 최대한 아끼고 아껴두었던 본체의 힘을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파각! 파가각!
강철 왕좌를 둘러싼 수정에 거미줄 같은 실선이 아로새겨졌다. 본체를 보호하고 있었던 브리트라의 마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는 의미였다.
기실, 미라지 나이트에 비축된 힘이 아닌, 본체의 힘을 내보이는 것은 브리트라로서도 심대한 리스크를 떠안는 행위였다. 이는 가까스로 봉합한 상처를 무리한 움직임으로 다시 터뜨려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 하지만 ‘혼몽’의 저주 때문에 미라지 나이트와의 연결이 불안정해진 지금, 브리트라는 더 이상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브리트라의 진노한 외침이 들려온 직후, 왕좌로 통해 잇는 계단을 정신없이 내달리던 신소율의 눈동자가 크게 치떠졌다.
“히익! 배, 뱀?”
황소도 한 입에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황금빛의 뱀이 제단으로부터 스르르륵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놈의 꼬리와 몸통은 천장에 길게 걸쳐져 있었는데, 그 길이만도 수십 미터가 넘어 보이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지현아! 소율이를 봐 줘!”
“예!”
저런 괴물이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이상 멋들어지게 랜스 차지를 먹이는 건 무리. 박지현은 주저 없이 말머리를 돌려 신소율에게 접근하는 뱀의 옆구리에 창끝을 박아 넣었다.
카앙! 콰드드드득!
팬텀스티드와 한 몸이 된 박지현의 파괴력은 이 괴물 같은 덩치의 뱀마저 한곳으로 밀어낼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랜스차지를 성공시킨 박지현은 뱀 위를 훌쩍 뛰어넘으며, 날카롭게 벼리어진 창끝으로 갑주처럼 촘촘하게 박혀있는 금빛의 비늘을 요란스럽게 긁어댔다.
-간지럽도다!
“헷! 그럼 이건 어떨까! 유성탄(流星彈)!”
신소율은 박지현이 벌어다 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다. 계단을 힘껏 박차, 바람을 타고 십여 미터 가까이 날아오른 그녀는 팽그르르 공중제비를 돌더니 별똥별이 되어 급속도로 낙하했다.
머리 위에서 위협을 감지한 브리트라는 갑자기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그러자 두 갈래로 갈라진 혀끝이 날름거리며 징그럽게 꿈틀대는 목구멍에서 시뻘건 불줄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본 신소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음은 당연지사. 허나 어금니를 굳세게 깨문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맹랑하게도 브리트라의 파이어 브레스와 정면으로 맞설 결심인 듯했다.
“이야아아아압–!”
콰아아앙!
회오리치는 바람을 몸에 두른 신소율은 불줄기와 충돌하기 직전, 스크롤 하나를 급히 찢어발겼다. 레지스트 파이어(Resist fire), 화염 저항력을 순간적으로 높여 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브리트라의 브레스를 견뎌내기엔 많이 부족했다. 박지현은 바람의 장막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겹게 화염의 공세를 버텨내고 있는 신소율의 위태위태한 모습에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했다. 다른 일행들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임유진은 왕좌를 둘러싼 수정구를 깨는데 여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 외에는 달리 그녀를 구할 사람이 없어 보였다.
“젠장… 어떻게 해야… 에라, 모르겠다!”
후웁! 폐부로 힘껏 숨을 들이켠 박지현은 마상에서 투창 자세를 취한 뒤, 온 힘을 다해 창을 내던졌다. 목표는 벌린 아가리에서 불길을 쏘아대고 있는 왕뱀의 눈알이었다.
-가소롭구나!
뻥 뚫린 콧구멍에서 크게 콧김을 뿜어낸 브리트라는 육중한 꼬리를 휘둘러 쇄도하는 소울체이서를 멀리 날려버렸다. 하지만, 브리트라가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소울체이서가 사용자의 의지로 조종이 가능한 마창이라는 점이었다.
“큿! 기껏해야 지렁이 주제에 내 근성을 얕보지 마!”
멀리 날아가는 소울체이서를 간신히 멈춰 세운 박지현의 인중이 뜨뜻한 핏물로 적셔졌다. 무기와 영력으로 연결된 탓에, 소울체이서가 얻어맞은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박지현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기어코 소울체이서의 창끝을 왕뱀의 눈알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이제 재차 날려 보내기만 하면 끝. 그런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창이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왜 이래? 왜 말을 듣지 않는… 우아아앗!”
쾅!
소울체이서에 정신을 집중하던 박지현이 있던 자리를 거대한 뱀 꼬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때를 맞춰 팬텀스티드가 영리하게 뛰어오르지 않았다면 말과 사람이 한 데 엉켜 나뒹굴었을 터.
-귀찮은 것 같으니.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브리트라는 염력(念力)으로 소울체이서를 조종해 박지현에게 날려 보냈다. 제 주인을 해치지 않으려는 것인지 제법 반항하는 기미가 보였지만, 고작 창 한 자루가 신격을 지닌 그녀의 의지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날파리를 내쫓듯 박지현을 물리친 브리트라는 다시 신경을 신소율에게 돌렸다. 일단 적의 수가 많으니 눈앞의 이 발칙한 계집애부터 잿더미로 만드는 걸 시작으로, 숫자를 차근차근 줄여나갈 속셈이었다.
여전히 신소율은 맹렬한 불꽃 속에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도 레지스트 파이어의 효과가 거의 다 되어,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 보글보글 흉한 기포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독하게 치뜬 그 눈에는 여전히 전의가 살아있어, 브리트라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의지는 가상하나, 그것도 여기까지니라. 너희는 감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 권능이 온전했다면 지금쯤…. 헙!
뱀의 형상으로 의지를 전하던 브리트라의 눈알이 휘둥그레졌다. 쉼 없이 브레스를 내쏘던 입 안으로 무언가 티끌만한 이물질이 들어간 것이 느껴진 것이다. 더불어, 벌겋게 익어버려 수포가 덕지덕지 피어오른 얼굴로 씨익 웃고 있는 신소율의 얼굴이 보였다.
“…돼, 됐어……. 터져라!”
콰아아앙!
-카아아아아아—!
느닷없이 입 안에서 일어난 강렬한 폭발. 입천장이 죄다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한 브리트라는 왕뱀의 대가리를 이곳저곳 사정없이 들이박으며 난폭하게 날뛰었다. 폭발도 폭발이었지만, 그 압력에 기도가 틀어 막히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진 브레스가 몸속에서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켜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것이다.
“히히, 히히힛… 성공… 윽!”
“야! 신소율! 너 괜찮아?”
만신창이가 된 것은 신소율도 마찬가지. 그녀는 온몸에서 허연 연기를 피어 올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를 씰룩씰룩 움직이고 있었다. 급박하게 달려온 박지현은 막 쓰러지려는 신소율의 작은 몸을 낚아채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숨소리가 고른 걸 보니,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신소율이 브리트라의 이목을 속이고 은밀히 그 아가리 안으로 날려 보낸 것은 어둠의 마력으로 모습을 숨긴 두 자루의 단검이었다. ‘쇼크웨이브’ 주문이 걸려 있는 두 개의 단검을 왕뱀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교묘한 각도로 던져 넣음과 동시에 주문을 발동시킨 것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수법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특성, ‘단검 곡예사’ 덕분이었다.
한편, 최후방에서 타격대의 활약을 지켜보던 데모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위험해.”
“응? 뭔 소리야. 의외로 잘 싸우고 있잖아? 저 꼬맹이도 할 때는 꽤 하는군 그래.”
“멍청한 소리. 저 왕뱀은 아직 여력이 많이 남아 있어. 뒷일을 생각하느라 힘을 아끼고 있을 뿐이지. 많이 약해졌다곤 해도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 신격까지 획득한 괴물이야. 겨우 이 정도로 잡을 수 있을 리 없잖아?”
헨더슨에게 핀잔을 준 데모나는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를 뒤적여 기다란 두루마리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 두루마리에는 복잡한 도식이 그려져 있었는데, 잉크가 아니라 사람의 핏물로 그려낸 듯 검붉은 색이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이걸 써야겠어. 안세희, 이리로 와.”
“네, 넷! 아앗!”
데모나는 엉겁결에 불려 나온 안세희의 팔뚝을 강하게 잡아 당겼다. 그러자 통이 큰 사제복의 소매가 말려 올라가며 희고 가느다란 소녀의 팔뚝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너, 분명 처녀였지?”
“……예.”
어차피 의례적인 질문이었던 듯, 데모나는 얼굴을 홍시처럼 붉힌 안세희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바쁘게 손을 놀렸다. 저주의 매개로 삼고 있던 목걸이를 도식의 중앙에 올려놓고, 안세희와 자신의 손을 포개어 목걸이 위에 얹은 다음, 늘 가지고 다니던 손칼로 두 개의 팔뚝에 기다란 자상을 냈다.
이윽고 벌어진 상처에서 스며 나온 신선한 핏물이 두 여인의 팔뚝을 타고 도식의 중앙으로 주르륵 흘러내리자, 두루마리의 배경이 살아서 넘실거리는 것 같은 어둠으로 뒤바뀌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네리아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촉수다발이 목걸이를 둘둘 마는 게 영 꺼림칙하게만 보였다.
“뭣 하는 짓이야! 내 목걸이에 무슨 짓을!”
“공주님. 이, 일단은 지켜보시는 것이….”
허나 발끈하여 나선 그녀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황기종 뿐, 헨더슨이나 김진솔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명백한 찬밥 취급이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네리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갈수록 대우가 열악해지더니, 이제는 숫제 꿔다 놓은 보릿자루를 대하는 듯하다. 빌린다는 명목이긴 했으나 거의 반 강압적으로 목걸이를 빼앗아간 것도 그렇고, 갈수록 탐사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고 보자.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거야….’
네리아의 복중에 숨은 칼날이 차후 누구에게 향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펼쳐진 두루마리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 촉수 다발이 목걸이를 완전히 뒤덮고, 데모나의 곧은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지금 그녀가 시전하려는 주문은 그만큼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는 고위 주문이었다.
피시술자의 정신을 지저의 심연 속으로 던져 넣어 그 정기가 고갈될 때까지 무한한 고통을 안겨주는 최악의 마법. 그리고 마녀회의 오대 줄기인 황천일맥의 최고비전이자, 정신계 주문 중 최강으로 꼽히는 주문.
“…소울 트랩(Soul trap)!”
마침내, 검은 마녀에게서 저주받은 금술이 도래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신소율 : 기폭찰 수리검!
뱀술을 담글 준비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아마 다음화면 결착이 날 것 같네요.
그런데 여러분,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당연히 즐겁게들 보내실 거라 믿습니다… 제 크리스마스 선물은 독자님들의 추코면 족합니다. 크리스마스 연재는 아직 확실히 잘 모르겠네요. 될 수 있으면 휴재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일정이 어찌 될지 모르니..
후… 크리스마스에 글을 쓰는 것도 어쩐지 굉장히..
ㅠㅠ
호야[虎夜] / 1등 축하드립니다.. 해드릴 것은 없지만요 ㅠㅠ
elas / 부제부터가 일루셔니스트이니..
서울우유 / 흥미롭다니 다행입니다!
가식적썩소 / 음? 그럼 어느 분이 1등이신..?
cxz778 / 반강제적으로 뺏엇다고 합니다.
북치네 / 넵 감사합니다!
asd메이지 / 저주가 대 보스전에서는 참 좋은 기술이지요
월병인 / 알고 보면 만능 주술사
Writer루미니 / 녹용즙도 거의 준비가 다 되가네요..
카론느 / 저 왕뱀을 어떻게 조교시키죠?
니오그타 / 크흠.. 데모나에게는 걸맞는 포상이..
벌레 / 저번화 코멘도 다 봤습니다! 그런데 네리아가 처녀라고는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토므스크 / 설마 목걸이로 ㄸㄸ.. 큼.. 아닙니다
은신설야 / 항상 감사합니다~!
노여연 / 악평이 많나요? ㅠㅠ 그건 몰랐네요.. 조금 우울해집니다..
†아마테라스† / 어느새 멤버를 기정사실화시키시는군요.. 괜히 통수를 치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