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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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Illusionist
“고, 공주님…!”
손을 허우적거리며 비틀거리던 황기종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네리아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으나, 그 눈에 비친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브리트라를 채근하고 있었다.
“어서 하라고!”
-마력이… 전이되지 않는다.
“뭐? 아……!”
독 오른 살모사처럼 핏발이 섰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어졌다. 동공이 인형처럼 풀려버린 네리아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며 브리트라의 위로 픽 엎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그 뒤로, 브리트라의 망연자실한 음성이 잇따랐다.
-이건… 내게 걸었던 저주와 비슷한…….
“정답. 짜증나는 주문이지. 나도 당했었으니까.”
브리트라의 옆에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박지현이 콧잔등을 긁적이고 있었다.
네리아의 정신을 앗아간 것은 혼몽(昏懜)의 저주. 이전에는 박지현을 장시간 혼수 상태로 빠트린 바로 그 주문이었다.
-술자는… 네 녀석이로구나.
“말하지 않았나. 이래봬도 주술사라고.”
-간교한 인간이로고.
“사람은 쉽게 믿는 게 아니지. 이미 몇 번이나 데여봤으니까.”
자조적으로 대꾸한 노구덕은 천천히 브리트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쓰러진 네리아의 얼굴을 얼핏 스치는 그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애초부터 네리아와 황기종을 믿지 않았다. 클럽의 주요 전력을 거의 전부 동원한데다, 자그마치 늑대왕의 영지에 침입하는 대사(大事)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 두 사람의 말만 믿고 일을 진행할 리가 없었다. 그가 이번 일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두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조사를 해 놓은 패터슨의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유적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 보수니, 거래이니 하는 얘기와는 별개로, 그는 처음부터 네리아나 황기종, 숲의 부족들과 원만히 교섭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이야 아쉬워서 아이리스에 손을 벌린다지만, 결국 노구덕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힘의 근간인 ‘달의 마력’이다. 당연히 이들이 순순히 그것을 내놓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네리아에게 정중히 공주 대접을 해주며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그녀를 염탐하여 속내에 꽁꽁 숨겨놓고 있는 것들을 캐내기 위함이었다. 예컨대, 목걸이에 깃든 또 다른 기능이라든가. 더불어, 노구덕은 자신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한 네리아가 스스로 아이리스를 배반하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져, 최후의 순간 네리아는 본색을 드러내며 화려하게 자폭을 해버렸다. 사전에 데모나가 장치해 둔 혼몽의 저주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벌써 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늑대왕과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 하마터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다.
…사실, 되짚어보면 네리아가 본색을 드러냈다기엔 무리가 있다. 정확히는, 노구덕이 그렇게 되도록 ‘유도’를 한 것이다.
“자네에게는 조금 미안하군.”
노구덕이 말을 건넨 것은 괴로운 얼굴로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황기종이었다. 그가 깔고 누운 바닥은 그 복부에서 흘러나온 핏물로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처,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날 탓할 셈인가? 기회는 줬다고 생각하는데.”
“기회…라고요?”
“저 목걸이가 리빙아머를 조종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 말일세. 뭐, 그런 기능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네와 네리아 공주는 나중에 리빙아머를 가로챌 속셈 아니었나?”
“…그, 그…!”
황기종은 크게 눈을 치뜨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 먼 거리에서, 모기보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그 말을 들었단 말인가? 아무리 청력이 좋은 엘프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감각은 공기의 진동을 감지하지.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작은 말소리라도 놓치지 않는단 말이야. 그 왜, 그런 말도 있잖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그러게 입을 조심했어야지.”
“…….”
“먼저 신의를 어긴 쪽에게 책망을 듣고 싶지는 않군.”
황기종은 이를 악물었다. 비록 자신들쪽에서 먼저 믿음을 저버렸다 할지라도, 노구덕의 말은 틀림없는 궤변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달의 마력을 차지할 속셈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월광의 무녀는 달의 마력 그 자체.
그런고로, ‘달의 무녀를 제외한 다른 성과를 가져가겠다.’라는 계약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아이리스가, 노구덕이 정말 원한 것은 그따위 자잘한 성과가 아니라 바로 저 손에 쥐어져 있는 심장이었을 테니.
그는 네리아와 끝내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사전에 그들 모르게 네리아에게 저주를 걸어 놓은 사실로 이미 증명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들 사이에 신뢰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누가 더 상대를 잘 이용하고, 잘 속여 넘기느냐의 관계였을 뿐.
“궤변입니다! 다, 당신도… 처음부터 이 힘을… 노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패배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지만, 황기종은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네리아는 몰라도, 그래도 그는 진정으로 노구덕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찾았던 것이었으니. 그런데 일이 꼬여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네리아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노구덕에 대한 원망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자네 말이 맞아. 자네들이 먼저 배신했기에 이쪽도 배신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은 허울 좋은 포장일 뿐이지. 하지만 그걸로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어. 그럼 된 것 아닌가?”
“끄으으으으…!”
“변명할 생각은 없어. 원망하려거든 마음대로 하게. 그럼… 이쪽은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해야겠군. 이 왕뱀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으니.”
-…약삭빠른 인간이로고.
씹어 뱉듯이 말하는 브리트라의 음성에는 숨기지 못할 분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맡으로, 임유진의 미끈한 몸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한순간 유적 전체가 진동할 정도의 파장이었으니까요. 눈치 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죠.”
-…….
애꿎은 입술을 짓씹던 브리트라는 끝내 두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말았다. 임유진의 말대로, 브리트라는 몸의 잔존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한순간이나마 유적의 결계를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네리아의 마력을 온전히 이어받았다면 해제까지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심장을 빼앗긴 그녀의 힘으로는 고작 그 정도가 한계였다.
해제와 약화. 이 두 단어가 지닌 뜻의 차이는 명백했다. 만약 이 주변에 늑대왕이 있다 하더라도, 어쨌건 결계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단숨에 이곳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터. 아이리스로서는 충분히 성과를 챙길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었다.
“데모나와 헨더슨, 세희, 그리고 유진이는 워프게이트의 설치를 서두르고, 나머지는 최대한 챙길 수 있는 만큼만 챙긴다.”
안세희에게 치료를 받은 뒤, 기력이 다한 황기종을 향해 동정어린 눈빛을 보내던 신소율은, 노구덕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며 질문을 했다.
“저기… 아저씨, 그건 좋은데요. 그…공방으로 통하는 길이 무너져버렸는데, 그건 어떡해요?”
“…….”
모처럼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노구덕의 민대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도망쳐 올 때, 하나밖에 없던 통로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단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으앙… 아다만티움이랑 미스릴… 그거 다 버리고 가야 돼? 두식아, 네가 통로를 다시 파서 길을 뚫으면 안 될까? 너, 힘세잖아.”
“…누님, 그건 무립니다.”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나타샤와, 그에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 이두식. 다른 일행들도 공방에 쌓인 보화들을 놓고 가려니 영 찝찝한 얼굴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브리트라의 심장’을 얻었다고는 하나, 견물생심이라고 했다. 이미 그만한 보물을 본 마당이니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억지로 길을 내기엔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자칫 공방의 보물에 눈이 멀어 시간을 지체했다간 지친 전력으로 십존과 맞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끄응… 어쩔 수 없나…. 응?”
노구덕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아쉬움을 접어두려는 그때, 다 죽어가는 줄로만 알았던 브리트라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인간…. 자비를 베풀어, 날 살려다오.
“뭐?”
-대가 없는 자비를 바라는 건 아니니라. 인간의 방식대로 교섭을 하고 싶다. 이곳의 재화를 가지고 싶다면, 모두 주겠다. 그 대신 날 연명할 수 있게 해다오.
창백한 얼굴은 일체의 감정 없이 무표정했으나, 그 목소리에 어린 간절함은 진짜였다.
신격을 지닌 존재가 하찮은 인간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노구덕은 그 진의를 파악하고자 브리트라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천 년이나 살았다면서, 아직도 삶에 미련이 있는 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냐? 죽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긴, 그건 그렇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브리트라는 발레기우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수백년 동안이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두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존재.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없었다면 이런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왕뱀을 살려준다라….’
노구덕은 고민했다. 브리트라를 살려주는 것이 장차 그와 아이리스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것인지.
솔직히,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이 귀중한 보물이긴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축적된 그 지식과 경험이라면… 교섭의 여지는 충분했다.
고민을 끝낸 노구덕은 한 가지 전제를 확실히 해두었다.
“…네게 마력을 줄 수는 없다.”
-그 정도 호의까지는 바라지 않느니라. 숨만 붙여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심장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건가?”
-이 화신체라면 대충 2, 3일은 생존이 가능하다.
“좋다. 일단 널 데려가도록 하지. 살고 싶다면 조건부터 이행해라. 공방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전에, 나도 확답을 받아야겠다. 넌 약속을 제대로 지킬 인간 같지 않으니까.
황기종과 노구덕의 대화를 엿들으며, 그녀도 나름대로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예리한 지적에 내심 찔끔하여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이것 참. 부정하지는 못하겠군. 알겠다. 따로 보증 같은 건 해주지 못하지만, 다시 약속하마. 널 살려주겠다.”
-…그 말, 믿겠노라.
약간 탐탁지 않은 듯 했지만, 달리 여지가 없었던 브리트라는 노구덕이 공언한 약속을 지키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브리트라가 일행에게 알려준 것은 공방으로 통하는 소형 워프게이트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두 번째 공방의 위치였다. 브리트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일행은 보물창고가 또 하나 있다는 사실에 서로 손뼉까지 마주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특히, 장비에 대한 갈망이 남다른 여성진들의 기대가 대단했다.
두 번째 공방은 리빙아머가 아니라, 공방에서 만들어낸 제대로 된 ‘장비’들을 모아둔 곳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이 착용할 수 있는 갑주와 무기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마법적 능력이 깃든 진귀한 장비나, 순수 아다만티움, 혹은 미스릴로 만들어진 무구들도 소수 섞여 있어, 늘 강력한 무구에 목말라하는 헌터들로 하여금 군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이곳저곳에서 장비들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일어나, 보다 못한 노구덕이 불호령을 내리며 중재에 나서야만 했다.
그 이후 이어진 대규모 운송 작업은 생각지도 못했던 워프게이트의 존재 덕분에, 소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곳곳으로 흩어졌던 일행은 대략 사십여 분 정도가 흐른 뒤에야 다시 제단 주위로 모여들었다. 유적에 있던 값어치 있는 보물이란 보물들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챙긴 덕인지, 모두의 얼굴에는 연신 방긋방긋한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탐사대 전원이 가설된 워프게이트 위로 올라서고, 정신을 잃은 황기종과 네리아, 겨우 상처를 봉합한 브리트라까지 빠짐없이 마법진 위에 있는 것을 확인한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헨더슨과 데모나를 쳐다보았다.
“…그만 가자.”
팟-!
거대한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며, 시끌벅적대는 무리의 모습이 일시에 종적을 감추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직 희미한 빛이 스며있는 마법진의 잔재와, 미처 챙기지 못한 강철 주괴 같은 부스러기들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코멘트로 남겨주신 쓴소리, 잘 새겨들었습니다.
어정쩡한 부근에서 끊어 놓은 게 뜻밖의 어그로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1부라면 몰라도 지금의 구더기, 그렇게 허술한 놈이 아닙니다. 네리아를 역으로 물먹일 작정을 하고 있었던 건 출발하기 전, 박지현과의 대화에서 나름 복선을 깔아두었고, 네리아가 황기종과 수군수군 모의를 할 때에도 노구덕이나 다른 일행들이 아마 알고 있지 않았을까 예상하시던 분들도 있으셨지요? 구더기 포함해서 감각이 칼보다 예리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어설픈 모의를 모른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죠.
1부에 적으로 등장했던 소피아 정도라면 모를까, 구덕이가 네리아처럼 어설픈 캐릭터에게 통수를 당할 정도로 만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네리아와 황기종..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가 시사하는 바는 2부에서 노구덕이 보일 본격적인 행보의 방향입니다. 즉, 비정과 냉혹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죠. 슬슬 부제에 충실한 주인공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 스타트는 이후 네리아와 황기종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크리스마스 이브 잘 보내시고,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