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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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연맹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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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지렁이가 기어가듯 조악하게 그려져 있는 약도를 본 노구덕은 이따위 그림으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약도를 가장한 낙서를 보고 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편지를 건넨 사용인이 그 자리에서 안내역을 자처하며 친절히 길을 안내해 준 것이다.
“위원님께서 승낙을 하시면 바로 길 안내를 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가?”
그러나 정중한 안내를 받는 노구덕은 벌써부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연맹총회의 전속 사용인을 사적인 용도로 마음껏 부리는 권력자가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는 도중에 여인의 정체에 대해 넌지시 물음을 던져보았지만, 중년의 사용인은 속 시원한 답을 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길 안내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곧 알게 된다는 진부한 답변이 전부였다.
상대의 정체는 오리무중. 반대로 그 상대는 자신의 정보를 낱낱이 알고 있다. 교섭이 목적이라면 꽤나 불합리한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일단은 부딪쳐 볼 수밖에.’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연맹총회의 회의장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의 거리. 그러나 그 구역은 연맹본부에서도 가장 은밀한 심처 중 하나로, 일반 위원들조차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
헌터로 보이는 두 명의 경비가 지키고 있는 구역 입구. 사용인과 노구덕을 검문하려는 듯, 위압적인 자세로 두 사람을 멈춰 세운 헌터들은 사용인이 제시한 ‘무언가’를 보더니 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통과!’를 외쳐댔다.
‘무슨 프리패스도 아니고… 대체 어느 정도의 인물이기에?’
브리트라의 심장을 복용하여 한층 더 강해진 노구덕은 두 헌터들의 수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겨우 경비 역할을 하기엔 굉장히 강한 자들…. 그들 개개인이 이두식과 맞붙어 싸워도 쉬이 승패를 점치기 어려운 강자들이었다. 어쩌면 그보다도 더 강할 수도 있었다. 물론, ‘슬로터’를 착용한 이두식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곳입니다.”
“으음.”
구역 입구를 통과하고 오 분 정도를 더 걸어 어느 고풍스러운 방문 앞에 선 노구덕은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는 용무를 마치실 때까지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알겠네.”
노구덕은 뭘 알아야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내지 않겠느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으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즉답이 튀어나왔다.
“응. 들어와.”
남몰래 한숨을 지은 노구덕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책자를 보고 있는 여인의 자태가 들어왔다. 총회에서 뜬금없이 그에게 말을 건넸던 바로 그 여인.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그 화려한 외모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뭐해? 왔으면 자리에 앉지 않고? 사양하지 말고 아무데나 앉아도 돼.”
초면부터 그러더니, 끝까지 반말일색이다. 하지만 노구덕은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다. 금지(禁地)에 거처가 있는 것도 그렇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태생적인 오만함이 그녀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일단은 같은 위원. 처음부터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반말? 뭐, 상관없지만.”
쥐고 있던 책자를 휙 내팽개쳐버린 여인은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그러면서 늘어지게 하품까지. 눈물을 찔끔거린 여인은 미안하다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하와아아아암… 미안. 어제 밤을 꼬박 새웠거든. 통 잠을 못자서.”
같은 말도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터질 듯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이 저런 말을 하니 어쩐지 굉장히 불순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 전에… 못 다한 소개를 해야겠지? 우음, 그냥 알려주면 별로 재미 없는데. 저기, 날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
“이 머리. 염색한 건데. 원래는 칙칙한 잿빛이야.”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를 살짝 흔든 노구덕은 한손을 들어 여인의 폭주를 제지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면 그냥 돌아가겠다.”
“나 참. 그런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 거 보니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나보네.”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비비 꼬던 여인은 입매를 픽 터뜨렸다. 마치 뭐 이런 겁 없는 하룻강아지가 다 있어? 라는 표정.
“내 이름은 퀸젤.”
“퀸젤…?”
“풀네임은 퀸젤 군다르 악시밀리온. 발터 군다르 악시밀리온의 여동생이야. 이제 알겠어?”
“…….”
간신히 부동심(不動心)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노구덕의 속내는 치미는 격동을 겨우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겨우 침착함을 유지한 그는 눈을 살짝 치떠 퀸젤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약간 닮은 점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와 닮았느냐고?
놀랍게도 데모나… 아니, 바이론과 닮았다. 그럴 수밖에. 퀸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바이론의 여동생이라는 소리였으니까. 한마디로, 데모나의 고모라는 뜻이다.
그녀가 언급한 이름, 발터 군다르 악시밀리온… 이 이름은, 딸인 데모나조차 모르고 있었던 바이론의 본명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노구덕은 일단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가 바이론의 본명을 알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하이 스카우터의 눈’으로 그의 저널을 보았기 때문이다. 괜히 사서 의심을 살 까닭은 없었다.
“모른다고? 에이, 알 텐데.”
“정말 모른다.”
“거짓말. 방금 전에 동공이 아주 살짝… 커지던데? 낯빛은 가장할 수 있어도 생체 반응까지 속일 수는 없지.”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에 잠깐 놀란 것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맹세라도 한번 해볼래? 내기를 하는 거야. 만약 내가 틀렸다면 이 몸이라도 주겠어. 어때?”
“…….”
집요하게 파고드는 퀸젤의 공세를 견디다 못한 노구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여자와 오래 앉아서 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거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퀸젤의 냉막한 음성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거기 서. 날 바람맞혔다간 후회할 거야. 이제는 알 텐데? 내가 가진 힘이라면, 네가 이뤄놓은 것 정도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어.”
“…대체 무슨 용무지?”
“안심해. 잠깐 대화를 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어찌됐든 오라버니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이니까. 그리고 조금… 제안할 것도 있고. 응? 그러니까 거기 앉아줘.”
좀 전에는 날카로운 고드름이 따로 없더니, 이제는 사내의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매혹적인 목소리다. 천변만화하는 그녀의 태도에 잠시 망설이던 노구덕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퀸젤을 거스르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 것이다.
“…바이론의 여동생이라고?”
어차피 들켜버린 이상, 숨길 것도 없다. 노구덕이 곧장 바이론의 이름을 거론하자, 퀸젤은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샐그러뜨렸다.
“맞아. 오라버니도 참, 바이론이라니… 네이밍 센스가 그게 뭐람? 딱 봐도 풀네임의 앞뒤를 따서 대충 지은 티가 나잖아.”
“…….”
“에이, 재미없어. 협박 좀 했기로서니 그새 삐친 거야? 장난이야, 장난.”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퀸젤이 진화에 나섰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노구덕은 여전히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자 퀸젤은 시무룩하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짐작했겠지만, 난 과거 구왕조의 직계야. 과거로 치면 서부 왕국 군다르, 그 왕가인 악시밀리온 왕조의 왕녀쯤 되려나? 뭐, 지금은 왕조고 뭐고 다 없어지고 위원회로 통일되었지만.”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연맹이지만, 실상 그 연맹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베일에 가려진 위원회이다. 그리고 위원회는 퀸젤이 말한 대로 과거 대륙을 통치했던 아홉 왕가의 혈통들이 모여 만들어진 최고 지배집단. 즉, 스퀘어를 지배하는 최고 통치자라 말할 수 있으리라.
퀸젤은 바로 그 위원회의 직계 혈통인 것이다. 수틀리면 아이리스고, 연맹위원이고 죄다 쓸어버릴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계도를 감안한다면, 이토록 젊은 나이에 금빛 배지를 달고 있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 노구덕은 천외천(天外天)이라 여겨졌던 위원회의 인물과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바이론… 그자의 이름에 ‘군다르’란 미들네임이 들어간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입맛이 썼다. 그는 바이론의 진명을 알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달리 취할 행동도 없었을 뿐더러, 위원회의 인간과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이쪽에서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그것도 이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그 대단하신 군다르의 왕녀께서 내겐 무슨 볼일이지?”
“정말 토라졌나보네? 이봐, 노구덕 위원. 나잇값 좀 해줄래? 그리고 비꼬지는 말아줘. 군다르는 이미 수백년 전에 사라진 왕국이고, 지금 난 일개 연맹위원이니까.”
일개 연맹위원이라면서 방금 전에 그런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단 말인가? 노구덕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내색을 하진 않았다.
“우선 감사하단 말을 해야겠네. 집 나간 망나니 오라버니의 유해를 무사히 찾아줬으니까. 더 늦었으면 친동생인 나도 못 알아봤을 거야.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거든. 그래서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하나 봐.”
“백전대장이 바이론의 시체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가 있었군.”
“응. 집안의 어르신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오라고 성화였거든. 죽이든, 살리든 그건 상관없었지만, 왕가의 직계 혈통이 바깥에서는 흉악한 범죄자라니… 너무 꼴불견이잖아?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도 유분수지. 차라리 곱게 죽은 채로 온 게 오라버니한테는 다행이었을 거야. 생포됐다면 그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테니까.”
“별로 오라버니를 생각하는 여동생의 말처럼 들리진 않는데.”
“뭘 바라는 거야? 말이 남매지,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산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구. 그나마 기억이 쪼금 남아 있을 때 돌아와서 다행이지. 참, 데모나라고 했나? 오라버니 딸 말이야. 내게는 조카가 되는 거겠지? 못난 오라버니라도 딸자식 하나는 잘 둔 것 같아. 어쩜 그리 예쁘게 자랐는지. 특히 그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아주…….”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자기 머리카락을 비비적 꼬는 퀸젤. 머리카락을 붉게 염색했다고 하더니, 군다르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잿빛 머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데모나 얘기라면 나보다는 본인을 부르는 게 어떨까.”
“응응. 안 그래도 조만간 그럴 생각이야. 웬만하면 노친네들 눈에는 띄지 않는 게 좋겠지? 집안에는 아직도 오라버니를 죽일 듯이 생각하는 어르신네들이 많이 있거든.”
“될 수 있으면 데모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그 아이에게 피해가 가는 건 바라지 않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문득 그의 뇌리에 데모나의 차가운 얼굴이 그려졌다. 자신에게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고모가 있다는 걸 알면,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게다가 퀸젤도 성격이 만만해 보이지는 않으니… 꽤 볼만한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잡설은 이만 하고, 내게 제의하고 싶다는 게 뭐지?”
“아, 맞아. 내 정신 좀 봐. 사실 이게 본론이란 말이지. 그게 뭐냐면…….”
노구덕의 얼굴에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킨 퀸젤은 새빨간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우리 가문의 충실한 개가 되어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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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풀어 뒀었던 바이론의 진명 떡밥과, 저번화에서 언급되었던 ‘풀네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등장 인물들 중에 지구인을 제외하면 제대로 성과 이름을 갖춘 인물들이 없었다는 걸 기억하실 겁니다. 스퀘어에서는 왕가의 인물들을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성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노구덕’처럼 지구들의 이름의 경우엔, 성을 성으로 치지 않고 통째로 이름으로 칩니다. 약간 예외적인 경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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