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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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마녀의 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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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젤이 만난 자가 누구라고?”
“예. 칼립스의 연맹위원 노구덕이라는 자입니다. 전임이었던 마티아스를 매장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로, 서부에서는 꽤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입니다.”
“노구덕… 칼립스의 연맹위원이라.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젊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닌 청년은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리석으로 빚은 듯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지만, 날카롭게 벼리어진 눈매 탓인지, 왠지 모를 한기가 감도는 인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연맹총회에서 노구덕에게 말을 걸던 퀸젤을 데려간 바로 그 젊은이였다.
그의 풀네임은 체스터 군다르 악시밀리온. 퀸젤과 같은 악시밀리온 왕가의 자손이자, 그녀와는 사촌지간인 인물이었다.
“여자도 한 명 있다고 들었다. 발터의 딸이라지?”
“그렇습니다. 이름은 데모나. 칼립스의 리그에서 활약할 정도로 뛰어난 헌터인 모양입니다. 현재 노구덕 위원이 소유한 클럽에 몸담고 있고, 차후에도 이적 의사는 없어 보입니다.”
“천한 반쪽짜리지만 그래도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았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겠지. 그런데, 퀸젤이 그자들과 만남을 가진 이유가 뭘까? 고고한 척 하더니, 새삼스럽게 발터의 연구 성과에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
체스터의 앞에 부복한 사내는 주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의미모를 한숨을 내쉰 체스터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퀸젤은 어렸을 때부터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지. 하지만, 녀석이 하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어. 여자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군다르의 정복자 갈드루헨의 환생이라는 평가까지 받은 녀석이니까….”
“주인님께서도 퀸젤 님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뭐래도 차기 악시밀리온을 이끌 분은 주인님이십니다.”
“하하하… 그래, 자주 듣는 말이다. 퀸젤과 체스터, 악시밀리온의 차기 쌍두마차라지? 나는 악시밀리온을 이끌 자. 그리고 퀸젤은 위원회를 이끌 자라고…. 결국, 난 언제나 그 녀석보다 한 수 뒤지고 있었던 거야.”
오래토록 쌓여온 자조가 밴 말에, 처음 말을 꺼냈던 사내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겨,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안다. 그냥 심술을 부려봤을 뿐이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송구합니다.”
“퀸젤이 나를 앞서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녀석은… 너무 허리가 뻣뻣해. 권좌를 위해서는 늙은이들의 비위도 적당히 맞춰줄 줄 알아야 하거늘….”
체스터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에 선연한 불꽃이 일었다. 악시밀리온의 권좌… 평생을 염원했던 그 자리까지, 불과 몇 걸음이 남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퀸젤이 거의 도태되었다고는 하나, 권좌를 손에 움켜쥐는 그 마지막까지 방심은 있을 수 없었다.
“그 두 연놈들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퀸젤이 왜, 무슨 까닭으로 그자들을 끌어들였는지 알아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악시밀리온의 왕좌는 내 것이 된다.”
죽음이 임박한 가주, 그에게 포섭된 원로들, 독불장군인 경쟁자…. 가문은 이미 절반쯤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방계로 태어나 결코 앉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왕좌가 코앞에까지 다가와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어서 오라고, 네가 다음 왕이라고.
벌써부터 그때가 기다려지는지, 체스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매를 히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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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방을 뛰쳐나온 데모나는 그대로 연맹총단을 빠져나가, 대도시 시온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초저녁, 대도시 시온의 거리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잠시 걸음을 멈춘 데모나는 그늘진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인간군상들을 지켜보았다.
서로의 어깨를 다정히 맞대고 걸어가는 연인, 부모의 손을 맞잡고 즐거워하는 아이, 호쾌하게 어깨동무를 한 채 걸걸한 웃음을 내고 있는 사내들….
‘짜증나….’
모두가 근심걱정 없이 행복한 얼굴이다. 가족, 친구, 연인과 부둥켜안고, 술을 마시고, 감정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줄곧 산 속에서 홀로 지내왔던 데모나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혼자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 키르케는 괴물이 되어 죽었고, 바이론은 그런 그녀를 되돌리기 위해 어린 데모나를 내버려두고 사라졌다. 오린은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본인의 일 때문에 그녀의 곁에 오래 있어주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데모나에게 있어, 가족 외의 다른 인간이란 낯설고 추악한 ‘적’이었다.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이따금 내려가던 아랫마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녀’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그녀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무리가 더 많았다.
첫 살인은 정당방위였다. 산을 오르는 그녀의 뒤를 쫓아, 겁탈을 하려고 했던 마을의 남자. 하지만 마을의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계집이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퍼졌다. 소문의 근원은 그녀가 죽인 남자의 가족들이었다.
결국, 마을사람들로 이루어진 자경단이 그녀를 잡기 위해 숲을 휘젓고 다니자, 데모나는 추악한 이웃들을 피해, 산의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흥.”
묻어두었던 어두운 과거가 떠오른 때문일까. 그들을 지켜보던 데모나는 고약하게 입아귀를 비틀며 뒷골목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번영의 상징과도 같은 시온. 그런 대도시일지라도 반드시 그림자는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이런 더럽고 축축한 뒷골목에는…….
“이봐, 아가씨. 길을 잃은 거야? 흐흐흐… 여긴 아리따운 여자가 함부로 돌아다녀도 괜찮은 곳이 아니라고. 자, 이리와. 내가 길안내라도 해줄 테니.”
…꼭 이런 기생충 같은 작자들이 서식하고 있다.
음욕으로 벌게진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꼴을 보아하니, 좋게 말로 타이른다고 해도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처음부터 조곤조곤 타이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건 그녀가 원한 상황이었으니.
“…길안내?”
데모나는 요요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뿐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살짝 트인 로브자락 사이로 백옥처럼 미끈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눈처럼 새하얀 그녀의 속 살결이 언뜻 내비치자, 능글맞게 말을 걸어 온 사내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오, 대단한 미인인데?”
“언니, 이런 놈 말고 나랑 놀아볼 생각은 없어?”
어느새 그녀의 주위에는 두세 명의 사내가 더 나타나,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맨 처음 말을 걸었던 사내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지긴 했어도,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같은 패거리인 듯했다. 번화한 거리에서 불과 십여 분을 걸었을 뿐인데도 이런 질 나쁜 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나마 치안이 좋다는 대도시, 그것도 연맹의 총단이 있는 주도에서조차 이런 꼴이다.
데모나의 미려한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자신이 어려서부터 경험했던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잘 됐어. 나도 마침 너희 같은 녀석들과 놀고 싶었으니까.”
“오, 그래? 이제 보니 이 언니, 완전 선수였잖아? 하긴, 제정신이 박힌 여자라면 이런 시간에 혼자서 여길 올 리 없지. 그런데, 창녀치고는 너무 반반한 거 아냐?”
“흐흐. 뭐야, 그렇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겠군.”
“킁. 미리 말해두지만, 우린 돈이 별로 없거든. 혹시 돈을 받을 생각이라면…….”
“돈은 필요 없어.”
고개를 젓는 데모나의 말에, 세 사내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깃든다. 평생 쳐다보지도 못할 미인이 공짜로 놀아(?)준다는데, 아마 횡재라도 한 기분일 터. 마음이 급했는지, 셋 중 한 놈은 벌써부터 벨트의 버클을 끄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고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그래… 잠깐 놀아주는 대가로 너희들의 피는 어떨까?”
“엉?”
“피는 항상 쓸모가 있거든. 벌레 같은 놈들의 피라도 촉매로서의 가치는 있지. …조금 그립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피를 조달하곤 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데모나의 가녀린 몸에서 선명한 색을 띤 어둠의 마력이 박쥐의 날개처럼 크게 펼쳐졌다.
“뭐, 뭐야?”
“흐… 흡혈귀? 흡혈귀다!”
한창 들떠 있던 사내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주변의 공간은 데모나가 떨친 마력에 의해 잠식되어 도망칠 데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발로 차기도 하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는 그들이었지만, 평범한 인간이 데모나의 마력장을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차피 살아봐야 남의 고혈이나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들…. 그 한심한 인생, 차라리 여기서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겸사겸사 내 기분도 풀어주고 말이야.”
“이, 이 미친년이…!”
“마녀다! 마녀… 허어억!”
두려움에 질려 마구 뒷걸음질을 치던 세 사내의 눈빛이 돌연 꿈이라도 꾸듯 몽롱해졌다. 순식간에 세 사내를 잠재운 데모나는 나긋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후우우….”
흐리멍덩하게 쓰러져 있는 사내들을 앞에 둔 데모나의 창백한 얼굴엔 옅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데모나는 그녀답지 않게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 가볍게 손가락 하나만 놀리면 이 억눌려 있는 기분을 단번에 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녀의 산에 있을 때에도 이런 식으로 촉매를 조달하곤 했다. 사람을 홀려서 정신을 잃게 만든 다음,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채혈을 하는 수법이었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을 죽이느냐, 죽이지 않느냐의 차이 뿐. 피를 다루는 주술사인 데모나에게 있어, 이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터다. 심지어 상대는 살아갈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 아닌가.
“…칫.”
한참이나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고민하던 데모나는 끝내 혀를 차며 마력을 거둬들였다. 이들을 죽이는 거야 간단한 일이지만, 지금 같아선 피를 본다고 해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죄악감(罪惡感). 일찍이 마모되어 없어져버린 줄 알았던 그 감정이 수면 위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녀석들 때문이야.’
데모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4년 전의 자신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언뜻 이 뒷골목에 들어오기 전, 거리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아스라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임유진, 임가희, 신소율의 친근한 웃음이 떠오르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피아와 노구덕의 짜증나는 낯짝도 생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기억난 건, ‘그날’ 노구덕과 나누었던 대화의 한 자락이었다.
‘…재밌었어. 왜냐면 너희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쩔쩔매는 걸 보는 게 즐거웠다고. 귀찮을 때가 더 많았지만.’
‘허, 참….’
‘그러니까… 너희가 싫지 않아. 그거면 됐잖아? 다른 이유가 필요해?’
“후….”
작게 한숨을 내쉰 데모나는 지그시 붉어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리 유언 비슷하게 남긴 말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말들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였다.
“잘했다. 여차하면 나서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군.”
“……!”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식히던 데모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와 있었던 걸까. 그녀의 앞에는 산만한 덩치를 지닌 거한이 철탑처럼 우뚝 선 채, 그녀에게 묘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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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걱정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공지대로 오늘은 이상없이 두 편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연말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