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54)
0354 / 0777 ———————————————-
88# 마녀의 순정
“청승맞게 여기서 뭐하고 있어? 돌아가자.”
데모나는 맥 빠진 눈으로 노구덕을 올려다봤다. 아마 총단을 나선 이후 줄곧 뒤를 몰래 밟아 쫓아온 모양이었다.
“…그것뿐이야?”
“음?”
“왜 화를 내지 않지?”
노구덕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혼나고 싶다는 거냐? 그게 소원이라면 못해줄 것도 없는데.”
“너는……!”
입술을 달싹이던 데모나는 끝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도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노구덕은 언제나 그녀를 특별하게 대우했다. 말인즉슨,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자기비하가 심했던 임유진이나, 늘 덜렁대고 미숙한 신소율, 그리고 크게 사고를 쳤던 소피아 등. 그 주변에 있는 여인들은 최소한 한두 번은 노구덕에게 혼이 나거나 훈계를 들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빌미로 막무가내로 행동하거나, 다른 멤버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막말을 하며 체면을 깎아내려도, 노구덕은 별달리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이후 의심 가는 행동을 했을 때에도 소피아를 감시역으로 붙여두기만 했을 뿐 그녀의 의중을 캐묻는 일도 없었다. 그뿐인가? 얼마 전, 임의로 아이리스를 빠져나가 바이론에게 협력을 하는 사고를 쳤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쯤 노발대발하며 화를 낼 법 한데도, 노구덕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었다. 그건 이번에도 똑같았다. 그저 분풀이로, 재미로 사람을 죽이려 했음에도 아무런 책망을 하지 않았다.
왜일까? 청개구리 같은 심보일지도 모르지만, 데모나는 못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걸 두고 서운하다고 하는 것일까. 꼭 관심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 자신은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됐어. 흥도 깨졌고… 이만 돌아가겠어.”
“데모나.”
“잠은 따로 잘 거야….”
늘 날이 서 있던 얼굴은 드물게도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었다. 방을 뛰쳐나갔을 때의 괄괄한 독기는 이제 쏙 빠진 듯 맥이 풀린 얼굴. 다만, 기분은 더 우울해진 듯, 동그란 어깨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데모나.”
노구덕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앞서 가는 작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몸이 참새처럼 작게 떨리는 것이 전해졌지만, 데모나는 퀸젤과 면담을 했던 그때처럼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확실히, 오늘의 그녀는 뭔가 좀 이상했다.
“…구더기, 뭐야?”
“잠깐 얘기 좀 하자.”
“뭐? 싫…….”
여느 때처럼 단칼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데모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노구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강하게 잡아 이끌었다.
노구덕이 주저하는 데모나를 데리고 향한 곳은 연맹총단 근방에 있는 어느 고급 술집이었다. 지리적 특성상 연맹의 관계자들을 주로 상대하는 그 술집은 살롱처럼 객실이 따로 준비되어 있어,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연맹위원’이라는 직함으로 특실을 안내받은 노구덕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구비되어 있는 와인 중 하나의 마개를 따, 데모나의 잔에 적당히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따라주었다..
“마셔라. 와인 맛은 잘 모르지만, 비싼 술이니 돈값은 하겠지.”
“…….”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던 데모나는 말없이 와인글라스에 입을 가져다 댔다. 노구덕은 그녀의 자줏빛과 입술과, 유리잔 속에서 찰랑이는 와인의 포도빛깔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너와는 줄곧 이런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미안하기도 했고.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다가, 겨우 억지로 자리를 만들었구나.”
“아무래도 상관없어. 할 얘기가 있으면 빨리 끝내.”
“…하여튼 변함없이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구나.”
“…할 말은 그게 끝?”
데모나의 톡톡 쏘는 말버릇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는 면역이 다 된 터라, 노구덕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아까 왜 화를 내지 않느냐고 물었지. 혹시 서운했던 거냐?”
그 장난스런 어조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데모나는 심히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하! 웃기지 마! 누가 너 따위……!”
“그래, 네가 그럴 리 없겠지.”
“…읏!”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별 거 아니다. 큰 이유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만큼 널 대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웠던 거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했던 데모나는, 금세 진지하게 변한 노구덕의 말투에 엉거주춤 떼어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고 앉았다.
“유진이나 소율이, 소피아… 모두 과분할 정도로 날 좋아해주는 여자들이다. 물론, 나도 그 녀석들을 좋아한다.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을 여자들이야. 그녀들과 내 감정은 서로 양방향이야. 일방적이지 않지. 하지만, 너는 달랐어.”
“…….”
“저번 바이론과의 일이 터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때에는 클럽에 녹아드는 것 같기도 했고, 달리 보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너는 우리와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건 다른 헌터들과도 마찬가지였지.”
데모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애꿎은 와인잔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쥐고 있는 와인잔에 담긴 술이, 간헐적으로 미세한 파문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속내가 적지 않게 동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네게 관여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다른 헌터들에 비하면 특별대우였지. 그리고 넌 특별대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야. 그날… 오두막에서도 말했지만, 난 네가 필요하다.”
“넌… 날 강간했어.”
“그랬지. 변명을 하자면 우선 널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어차피 억지로 살릴 거라면 강제로 몸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쁜 놈…….”
데모나가 무섭게 노려보며 이 가는 소리를 내자, 노구덕은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흠… 아까 뛰쳐나갈 때도 그랬지만, 나쁜 놈이라니…. 난 적어도 개새끼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데. 욕설 수위가 많이 낮아졌군. 축하할 만한 일이야.”
“닥쳐. 뻔뻔하기는….”
“네 말대로 난 뻔뻔하고, 나쁜 인간이다. 유진이 말고도 벌써 두 명이나 여자를 들인 것도 모자라, 이렇게 한 명에게 다시 작업을 걸고 있지.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야. 예전에는 유진이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했는데… 지위가 높아질수록, 권력을 가질수록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더군. 나도 참 속물이야.”
“흥. 너 같은 인간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 임유진이 불쌍하네.”
노구덕은 데모나의 신랄한 비난에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녀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유진이한테는. 그래서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말이다, 내게는 사람이 필요해. 강한 헌터, 뛰어난 책사… 발레기우스와 그 잔당을 없애려면 아직도 많이 부족해. 그놈들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결국 부딪치게 될 놈들이야.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얽혀버린 악연이지.”
노구덕은 벌레교단이 계획했던 오키도의 참사를 무위로 돌렸고, 데모나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무수한 벌레교단의 인물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벌레교단은 실렌을 살해한 근본적인 원흉. 틀어질대로 틀어진 두 세력 사이에 타협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클럽 오너와 헌터는 단순한 계약관계다. 사적인 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줄 의리는 없어. 하지만 가족이라면 다르다. 유진이나 소율이, 소피아는 날 위해 기꺼이 목숨도 걸어줄 테지. 반대의 경우라도 그건 마찬가지야.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나는 발레기우스와는 달리 세뇌를 할 수도 없으니까… 염치없지만 네게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다. 내 가족이 되어달라고.”
낯부끄러운 말을 엄숙한 얼굴로 잘도 지껄이는 노구덕을 빤히 바라보던 데모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구더기. 염치없는 걸 알긴 아나보네.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네 애완견처럼 꼬리라도 치면서 기뻐할 줄 알았어?”
숙소에서 두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소피아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긴 데모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네가 그간 날 어떻게 봤는지는 몰라도, 난 네 생각만큼 의리 없는 사람은 아냐. 그날 오두막에서 말했을 텐데? 난 동료로서 너희들이 좋아. 그런 내가, 큰 싸움을 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갈 거라 생각해?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너희와 함께하지도 않았어. 차라리 솔직히 말하지 그래? 그냥 욕정을 참지 못해서 날 덮쳤다고.”
“크으으음……. 그게….”
“뭐, 처음부터 처녀성 따위에 연연한 건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내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용서해줄 수도 있어.”
“…….”
노구덕의 불룩한 눈이 휘둥그레 변하자, 데모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농담이야.”
“허… 아주 날 가지고 노는구나.”
“예전이라면 억지로라도 시켰겠지만, 이제는 너도 사회적 지위가 있고, 나 정도는 보호해줄 수 있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정도니까. 그 같잖은 체면도 존중을 해줘야겠지.”
“이것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망연히 중얼거리던 노구덕은 갑자기 데모나가 불쑥 잔을 들이밀자, 엉겁결에 마주 든 잔을 부딪쳐 건배를 했다. 두 개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치며 쨍 하는 맑고 청량한 소리가 났다.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겠어. 네 말대로야. 난 아직 너희가 말하는 유대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그냥, 지금까지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 왔을 뿐이야.”
알을 깨고 나온 새끼새는 처음 본 존재를 어미처럼 따른다. 그건 임유진 모녀에게 이끌려 다시 세상으로 나온 데모나도 마찬가지였다. 본능대로, 그녀 자신은 모르는 마음속의 따스함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 왔을 뿐이다. 얼마 전, 노구덕과의 대화에서 본심을 토해내기 전까지는.
루비처럼 황홀하게 빛나는 포도주로 살며시 입술을 적신 데모나는 빨려 들어갈 듯 아름다운 눈동자로 노구덕의 얼굴을 응시했다. 현직 모델답게, 요사스러운 마력이 담긴 듯 치명적인 매력을 발하는 시선이었다. 데모나의 홀릴 것 같은 아찔한 자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구덕의 심장마저 주책없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너희들 곁에서 알아볼까해. 나를 이끄는 게 무엇인지, 너희를 묶어둔 게 뭔지 말이야. 이런 나라도 괜찮을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 노구덕은 타는 듯한 갈증에 그녀의 입술을 덮칠 뻔한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큼! 당연하지.”
“구더기, 나는 욕심이 많은 여자야. 그래도 괜찮아?”
“나도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놈이다. 끼리끼리 만났군.”
“후후후… 아하하하…!”
노구덕의 천연덕스런 대답에 데모나는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웃겨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녀가 그렇게 시원하게 웃는 모습은 몇 년간 함께한 노구덕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찔끔거린 눈물을 닦아낸 데모나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좋아. 재미는 있겠네. 그럼, 계약을 하자.”
“계약?”
“헌터와 오너는 계약을 하는 거잖아? 난 네게 매여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거였나. 노구덕은 살짝 치미는 아쉬움을 억누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계약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줘야지. 조건은?”
“지금과 같아. 따로 계약 기간은 정해두지 않겠어. 내가 원할 때까지 아이리스에 있겠다는 소리야.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원할 때 떠나겠어.”
묘하게 찝찝한 조건이었지만 노구덕은 별 수 없이 그녀의 말을 승낙했다.
“…그렇군. 다른 건?”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절대 내게 관심을 끄지 말 것.”
“뭐?”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데모나의 얼굴이 급속히 가까워지더니, 노구덕의 너른 이마에 보드라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쪽.
가까워진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떨어진 데모나의 얼굴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홍조가 돌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 인생에 있어 가장 과감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을까.
바람처럼 제자리로 돌아온 데모나는 얼른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내 마음을 잡고 있으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걸. 난 심보가 못됐으니까, 임유진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거야. 단단히 각오해 둬.”
“…….”
갑작스런 데모나의 행동에 돌이 되어버렸던 노구덕은 그녀의 수줍은 음성을 듣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이 마주친 순간, 노구덕이 벌떡 일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두 남녀의 몸은 교접하는 뱀처럼 뜨겁게 얽혀들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떡떡떡을 쓰려고 했지만, 도저히 쓸 수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연말에 일을 하는데, 구더기 주제에 무슨 떡이란 말입니까. 본 스토리도 진행해야하므로, 과감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스토리도 진행해야 하니까요!
연말을 혼자 보내는 건 소피아도 똑같군요.. 소피아.. 미안해…
*소제목 수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데모나의 출신성분이 밝혀지는 걸 중요하게 다루려고 해서 ‘뿌리’라 지었는데,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 바꿀 예정입니다.
*브리트라는 바로 다음화에 등장할 예정이며, 심장이식 과정도 간단히 서술될 예정입니다.
그럼 즐거운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2015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