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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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위원회
퀸젤과 함께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이동한 노구덕은 동공을 따갑게 내리쬐는 빛살에 이마에 세 겹 주름을 만들었다가, 드러난 밀실의 전경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들이 위원회인가…….’
두꺼운 크리스탈 너머로 몸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지 하나 같이 제대로 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그저 희미한 음영뿐. 그나마도 열 개의 기둥 중 하나는 공허하게 비어 있다. 아마도 발레기우스에게 죽은 오베른 왕가 가주의 자리일 터.
갑자기, 새삼 알 수 없는 감흥이 일었다.
위원회. 하늘 위의 하늘. 처음 그가 이 스퀘어란 세상에 떨어졌을 때, 지구에 돌아가기를 포기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위원회… 그 높으신 양반들은 널 돌려보내 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아마 평생 가도 만날 수 없겠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드리안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말에 납득한 노구덕은 그 자리에서 지구에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걸 순응해버렸다.
그런 까마득한 존재들을… 드디어 오늘, 마침내 만나게 된 것이다. 직접 대면이 아닌 크리스탈을 빌린 간접적인 만남이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딘가.
‘그러고 보면 나도 꽤 출세를 한 셈인가? 흐….’
노구덕이 복잡한 상념에 젖어있을 때, 장승처럼 늘어선 위원회의 이목은 초록색의 커다란 오크가 아닌 그 옆에 나란히 나타난 여인, 퀸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오, 퀸젤 아니냐? 오랜만이다.
-그간 어딜 쏘다닌 게냐? 왕녀로서의 채신머리가… 쯧쯧! 조금쯤은 자각을 가져야지!
-너무 그러지 마시오. 아가레스트보단 낫지 않소?
-뭣이! 그 녀석 얘기가 왜 또……!
퀸젤은 반갑게 일렁이는 기둥들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노구덕이나 다른 이를 대할 때의 안하무인격 태도와는 딴판인, 규중처녀처럼 조신한 몸가짐이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숙부님, 백부님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오냐.
-흠흠… 괘씸한 녀석. 뜸한 걸 알긴 아는 모양이군!
“호호호… 아이, 제가 요새 얼마나 바빴는지, 숙부님들도 아시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다만…….
-늘그막에 적적하니 그렇지.
퀸젤의 애교 넘치는 웃음에 금세 기세를 수그러뜨리는 빛무리들. 마치 시무룩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노구덕은 어이가 없었다. 드디어 위원회의 실체와 대면한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짓을 보니 귀여운 손녀에게 사족을 못 쓰는 노친네들이 따로 없지 않은가.
구왕조가 서로 연합한 지 수백 년, 항렬이 비슷하게 통일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군다르의 적통 왕녀인 퀸젤이 각 왕조의 가주들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라 부르는 건 어색할 게 없었지만… 이건 좀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이건 완전 아이돌이로군. 나머지 왕녀들도 다 이런가?’
아마 아닐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퀸젤이기에 가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저 높으신 양반들을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이토록 훈훈한 연출이 가능한 것일까?
-그래, 결혼은 언제 할 거냐? 혼기가 찬지 오래니 슬슬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결혼은 아직 일러요. 생각도 없고요.”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내 손주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뜻이 아닌 것 아시잖아요? 숙부님들, 그런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시고, 오늘은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어서 찾아뵈었어요.”
빙긋 웃는 얼굴로 말하지만, ‘쓸데없는 얘기’라는 말에 유독 가시가 돋친 것 같다. 역시 혼기를 훌쩍 넘긴 노처녀답게, 결혼이라는 주제가 어지간히 콤플렉스인 모양이었다.
퀸젤이 화제를 돌린 그제야 노구덕에게 향하는 관심. 노구덕은 퀸젤과 비교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광도(光度)를 실감하며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부 도시 칼립스의 연맹위원인 노구덕입니다.”
-으음… 들은 적 있는 이름이군. 그러니까 아마… 태양왕을 처치하고 남부 반군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인물이었지?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네. 제 밑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이에요. 붉은 봉황의 남편이기도 하고요.”
퀸젤이 은근슬쩍 몇 마디를 덧붙이며 지원 사격을 해 주자, 노구덕에게 향한 빛의 세기가 더욱 선명해졌다. 노구덕 본인의 소개보다는 임유진, 퀸젤과 관련이 있다는 부연 설명이 꽤 효과적으로 먹혀든 것 같았다.
-그래… 그 말대로라면 꽤 유능한 인물인 것 같군. 그런데, 여기엔 웬 일이지? 이곳은 위원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귀찮은 일로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게…….”
-퀸젤, 넌 가만히 있어라. 우리가 질문한 건 저자다. 노구덕 위원, 무슨 청탁을 하러 왔지?
앞뒤 다 자르고 단도진입적으로 던져진 질문. 방금 전까지 못 말릴 팔불출이었던 노친네들이 이제는 준엄한 대법관처럼 빳빳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퀸젤 또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듯 아쉬운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괴물들. 그렇다면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직설적으로 나가는 게 더 효과적일 터. 노구덕은 정면돌파를 마음먹었다.
“…말씀대로, 바라는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하라.
“먼저, 오늘 저는 개인적인 부탁뿐 아니라 붉은 봉황의 대리인을 겸해서 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때문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붉은 봉황의 십존위는… 확실히 결정된 사안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 군다르의 가주가 임유진을 추천한 게 바로 전 일이다. 당연히 아직 결정 난 사안이 아니었다.
-결정난 사안은 아니지만… 달리 마땅한 대체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 난 동의한다. 서리여왕과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접전을 벌인 그녀라면 그리 불만은 없을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판단을 유보한 자도 있었지만, 과반수의 가주들이 동의를 했다. 그게 끝이었다. 이 짧은 시간의 다수결로, 임유진의 십존 등극이 확정된 것이었다. 그간 들인 노력과 시간, 염려에 비하면 허망할 정도로 빠른 가결이었다.
-평시라면 있을 수 없는 졸속 행정이지만, 비상시국이니 어쩔 수 없지. 빨리 본론을 말하라.
“…그럼 먼저, 붉은 봉황의 영지로서 칼립스 일대를 인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칼립스 전부를?
“그렇습니다.
-욕심이 과하군. 역대 십존들 중, 대도시 전부를 영지로 하사받은 전례는 없었다. 그 서리여왕조차도 대도시 시온의 토지 일부에 만족해야만 했었지. 헌데, 졸속으로 십존위를 인정받은 그녀가 지금까지의 관례를 깰 위치에 있다고 보는 건가?
크리스탈이 위협적으로 빛을 발하며 준엄한 목소리가 노구덕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노구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낯짝이었다.
“대도시라고 다 같은 대도시는 아니지요. 토지의 가치로 비교하자면, 연맹의 주요기구가 모여 있는 시온과, 서부 변방의 대도시인 칼립스는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면적으로 따지자면 늑대왕에게 하사되었던 거울의 숲이 칼립스의 족히 두 배는 되는 면적 아닙니까?
-흠.
대표로 나섰던 중앙의 크리스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노구덕과의 협상은 그에게 위임된 듯, 그를 데려온 군다르 가주를 포함하여 다른 크리스탈의 주인들은 일절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좋다. 단, 붉은 봉황이 참전을 한다는 조건이다.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왕처럼 수수방관하겠다면 우리도 그런 부탁을 들어줄 의리는 없지.
“알겠습니다. 옥쇄(玉碎) 정도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우리가 십존 같은 귀중한 전력을 옥쇄시킬 바보처럼 보이나?
“그럴 리가요.”
넉살 좋게 대답하는 노구덕을 지그시 노려보듯, 빤한 빛을 발하던 크리스탈은 두어 차례 빛을 일렁이며 차분한 음성을 토해냈다.
-그럼 이 건은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 다음은?
“신궁 클라리스의 유해와… 그녀의 무기, 신기(神器) 샤프슈터(Sharp shooter)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이건 붉은 봉황이 아닌, 제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뭐라?
-프흐흐흐… 탐욕이 여간내기가 아니군!
잔잔하게 가라앉는 듯했던 빛무리가 다시 성난 파도처럼 치솟아 올랐다. 그만큼 노구덕의 요구가 가당찮게 다가왔다는 뜻이리라.
예전 퀸젤이 언급했듯, 위원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신기와 성물, 성수 등에 대해 방대한 양의 데이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말은 그 존재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통제’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데, 만약 십존급의 강자가 전장에서 전사한다면, 따로 유지를 이어받는 자가 없는 이상 주인을 잃은 그 병기와 유해는 위원회와 연맹이 회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례. 조항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경우는 상당히 애매했다. 클라리스가 전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카름에 의해서가 아닌, 반란으로 인한 것. 게다가 그 유해를 일차적으로 회수한 것은 다름 아닌 노구덕 일행이지 않은가.
-북왕을 구해낸 게 그대라는 말은 들었지. 그걸 빌미로 클라리스의 신기를 요구하겠다? 아이리스는 이전에도 태양왕이 지니고 있던 성물을 가져간 적이 있지. 붉은 봉황이 갑작스레 부상한 것도 그 성물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일 테고. 십존을 양산하기라도 할 셈이냐?
“태양신의 성물은 태양왕의 반란 획책을 분쇄한 데에 따른 정당한 대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신궁의 무기를 가진다고 해서 누구나 십존이 될 수 없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상당히 꺼림칙하군. 아이리스에 지나치게 많은 힘이 실리는 것 같다면, 우리의 착각인가?
“고작 이 정도로 많은 힘이 실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른 십존들의 사례를 봐도 그리 무리한 요구는 아닌데다… 제가 드릴 부탁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으니까요.
-칼립스까지 사유지로 인정받고, 신궁 클라리스의 유해와 신기까지 가져갔다. 여기서 부탁 하나가 더 남았다고?
이제는 화가 나지도 않는지, 그저 어이가 없다는 음성이다. 도대체 일개 위원이라는 남자가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오버 베팅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원회의 심기를 거스르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오죽했으면 옆의 퀸젤조차 슬슬 불안한 기색을 내비칠 정도였다.
크리스탈 너머의 그림자는 휘휘 고래를 내젓더니 말해보라는 듯 작게 턱짓을 했다.
-…재밌군, 재밌어. 위원회의 체면이 정말로 땅에 떨어지다 못해 지하에 파묻힌 모양이야. 이런 놈조차도 감히 배짱을 튕길 정도니… 어디, 끝까지 지껄여 봐라. 한번 듣기라도 해 보자.
“호의, 감사드립니다. 제 마지막 요구는… 상원의 입성입니다. 아내가 십존인데, 그 남편이 일개 연맹위원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무어라?
“절 상임위원회에 넣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구위원이 되고 싶습니다. 제 출신이 서부이니, 서부지구 위원이 좋겠군요.”
-…….
이것저것 다 뜯어가더니, 이제는 지구위원을 시켜달란다. 혹시 이 늙은 오크는 위원회를 어디 설화에나 나오는,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마술램프의 요정쯤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허나, 노구덕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물론, 공짜로 지구위원을 시켜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 감투를 쓰려면 저도, 성의를 보여야 하겠지요.”
-성의라…?
“예. 반 년…. 육 개월 이내에, 반란 수괴 중 한 명인 늑대왕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스산하게 이어진 노구덕의 폭탄선언은, 일순간 장내를 형언할 수 없는 적막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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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달아주신 코멘트 다 읽었습니다 ㅠㅠ 감동입니다. 독자님들.
코멘트가 너무 많아 일일이 리리플을 달아드리지 못하는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후기에 좀 더 길게 글을 적고 싶은데, 마침 오늘이 축구를 하는날이라 가게가 바쁘네요.. 이번화에 코멘 달아주시면 다음화에 꼭 리리플 달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보람차고 즐거운 하루 되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 우승하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