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21)
0421 / 0777 ———————————————-
106# 대폭로
106# 대폭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파랗게 질린 늙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이미 큰 고초를 겪었는지, 허연 수염이 진득한 핏물로 뻘겋게 물들어 있는 사내는 얼굴의 주름이란 주름은 모조리 일그러뜨리며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 발레기우스의 선전포고에서 한 번 얼굴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마리우스 오베른 칼데마이츠. 발레기우스에게 죽임을 당해, 그의 손에 수급이 쥐어졌던 바로 그 인물이었던 것이다.
-바, 발레기우스…!
-마리우스, 그러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계획에는 큰 허점이 있다고요.
-네놈이 배신을… 감히 날 배신해!
-아직도 기력이 팔팔한 모양이군요.
콰직!
살과 뼈가 통째로 짓이겨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어딜 어떻게 건드린 것인지, 영상에 얼굴을 드러낸 노인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마구 발버둥을 쳤다.
-크아아아악–! 이, 이놈! 이노오오옴—!
-벌레처럼 몸이 박살나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영원히 살 것처럼 떵떵거리던 당신도 결국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에 불과했군요.
고통으로 시커멓게 물든 늙은 사내의 얼굴이 점차 화면에서 멀어졌다. 발레기우스가 걸레짝처럼 늘어진 그의 몸을 한쪽으로 질질 끌고 간 것이다.
이윽고 피칠갑을 한 마리우스가 등을 벽에 기댄 채 앉아 있고, 그 앞에 발레기우스가 쪼그려 앉아 마리우스를 마주보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발레기우스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마디로 마리우스의 주름진 이마를 쿡쿡 장난이라도 치듯이 찔러댔다.
-마리우스. 정신을 차리세요. 겨우 이 정도 고통에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크으… 으으으으…….
-이런, 뭔가 말하고 싶은 겁니까? 좋아요. 들어드리죠.
울컥, 한 사발이나 되는 핏물을 토해낸 마리우스는 공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발레기우스의 허여멀건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황망히 눈을 부릅뜬 그의 얼굴은 ‘도대체 왜?’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듯했다.
-놈… 왜, 왜 날 배신한 거지? 난 네게 전권을 주었다… 그대로만 됐다면, 네놈은 더 큰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을 텐데…….
-아하. 그러니까, 그 ‘반란 프로젝트’ 말씀이시군요. 프로젝트 책임자인 제가 이제 와서 배신을 한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말씀입니까?
-그, 그렇다…. 게다가 네겐, 분명 통제가 걸려있었을 터…….
느릿느릿하게 대화가 진행될수록, 마리우스의 탈색된 얼굴에선 점점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미 반쯤 정신이 몽롱해진 그는 발레기우스가 교묘하게 대화를 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으음, 좋아요. 마리우스. 대답해 드리지요. 확실히 당신의 계획은 대담했어요. 위원회와 현 체제에 불만을 가진 자들을 선동하고, 자극해서 인위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조금만 여지를 준다면 놈들은 금방 세를 불릴 테고, 때가 되면 덩치를 키운 그 세력을 단번에 일소한다. 그렇게 청소를 깔끔하게 해 버리면 적어도 향후 백년 간, 위원회의 위엄은 절대 변할 일이 없겠죠. 음음, 아주 훌륭한 계획이에요.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네놈……!
-저는 당신 계획 속에서 반란군의 수괴 역할을 할 예정이었죠. 열심히 번드르르한 말을 늘어놓고, 떨거지들에게 위원회를 거꾸러뜨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 되는 거였어요.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놈들을 일소하는데 앞장서는 거죠. 그런데… 보다시피 이렇게 배신을 해 버렸습니다. 왜냐고요? 마리우스, 당신네들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질려버렸거든요.
-…….
노인, 마리우스의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영상 너머로 보이는 그의 복부에는 이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선홍색 창자 덩어리가 너절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대사제가 갑작스럽게 출현하지 않는 이상, 그의 목숨은 이미 끝났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게… 전부냐?
죽어가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물음이었다. 허탈함이 가득한 그 음성에, 발레기우스는 희멀건 낯짝을 씰룩이며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왜, 흡혈귀 변덕은 죽 끓듯 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당신들만 신 노릇하는 게 왠지 비위가 뒤집히기도 했고요. 이쯤 되면, 바톤을 넘겨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크허, 으허허허허… 쿨럭, 쿨럭!
마리우스는 부글부글 일어나는 피거품을 베어 문 채, 망연자실한 웃음을 터뜨렸다. 폐부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한바탕 크게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긴 웃음을 토해냈다.
그런 마리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발레기우스는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카멜롯 말입니다.
-……!
가래가 끓는 듯하던 마리우스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점차 꺼져가던 눈꺼풀이 번쩍 쳐들렸다. 수염이 뻣뻣하게 일어선 마리우스의 얼굴은 경악과 곤혹으로 뒤섞여, 크게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지난 세월 동안, 제가 당신네들 밑구멍을 괜히 닦아줬을 것 같습니까? 카멜롯… 헌터와 저널, 그리고 레귤러… 이 모든 시스템을 통제하고 있는 ‘근원’이 있는 장소지요.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너, 너…! 무슨 짓을……! 잘못하다간 이 세… 꺼어어어……!
별안간 마리우스의 두 눈이 크게 홉떠지며, 그의 목구멍에서 꺽꺽거리는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주 보고 있던 발레기우스의 오른손이 그의 심장어림을 짓쑤셔버린 것이다.
-유언은 거기까지. 다 늙어서 말이 많은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발레기우스는 펄떡펄떡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을 그의 몸뚱이에서 내뺀 뒤, 그의 면전에 대고 콰직 터뜨려 버렸다. 쩍 입을 벌린 마리우스의 주름진 얼굴은 산산이 으깨진 살점 조각과 함께 뿌려진 핏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앞에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발레기우스의 모습을 끝으로, 재생되던 영상은 끝이 났다.
“…….”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대형스크린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명멸하며 발레기우스의 미소 띤 얼굴이 재차 수면 위로 드러났다.
-어떻습니까? 충격적인 진실을 접한 소감은. 벤텀, 당장이라도 스크린을 꺼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이, 이놈…!”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 선 기세로 발레기우스를 질타하던 벤텀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발레기우스는 그런 벤텀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노골적인 비웃음을 날렸다.
-물론 그럴 순 없으시겠지. 그곳에 모인 자들이 모두 멍청이에 장님들도 아니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일 테니까.
“말 같지도 않은 선동이다! 네놈이 정신계 주문에 능통한 건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 감히 오베른을 고문하고, 그를 이용해서 연맹의 분열을 획책하다니! 이 비열한 놈!”
-호오, 그걸 또 선동으로 내모시겠다? 하긴, 궁지에 몰린 마당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이해는 하지만… 너무나 추잡하군. 위원회란 지고의 자리에 있으면서, 고작 그런 모습밖에는 보일 수 없는 건가?
“발레기우스……!”
-거기 모인 헌터 여러분, 저 벤텀이란 노인네는 당신네들을 모조리 저능아에 병신으로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눈이 있다면 보셨겠지요? 이번 일의 인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번 전쟁은 처음부터 위원회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짜고 치는 연극이었습니다. 후후후!
비릿함이 가득 배어 나오는 웃음을 터뜨린 발레기우스는 웅변가처럼 팔을 크게 내뻗으며 소리쳤다.
-똑똑히 알아두십시오! 저들 위원회란 자들이 어떤 작자들인지! 그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수만에 이르는 헌터들과 주민들의 목숨을 스스럼없이 격멸시킬 계획을 세웠던 자들이고, 실제로 실행까지 했던 자들입니다! 실로 인면수심, 짐승의 탈을 쓴 역겨운 종자들이란 말입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사력을 다해 발레기우스의 폭로를 무마하려던 벤텀이었지만, 이미 그를 바라보는 단상 아래의 시선들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를 내 드리죠. 위원회가 이처럼 위험한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 그게 무엇일까요? 반군에 가담한 수만의 헌터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 말입니다.
“그만, 그만! 여봐라! 스크린을 당장 꺼라!”
“아니, 그럴 순 없소.”
벤텀의 명에 따라 스크린의 앞에 다가서던 헌터들은 단 한 사람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벤텀은 수하들을 가로막은 반백의 중년인을 보며 무서운 호통을 내질렀다.
“북왕 아이벤! 감히 위원회에 대적하려 드는가!”
“대적? 난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은 거요. 이곳에 모인 헌터들은 모두 그럴 권리가 있소.”
“진실이라니! 저놈의 간교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단 말이냐! 허어, 북왕이란 칭호가 아깝구나!”
“저자가 간교한 자라는 건 동의하지만, 더러운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모두 거짓이란 법은 없지. 우린 어린아이가 아니오. 진위의 판단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소.”
북부 지구 헌터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아이벤이다. 또한, 그는 헌터로서도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이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위원회의 일인인 벤텀으로서도 앓는 신음만 흘릴 뿐, 대외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북왕이라 불리는 거인. 묵직하게 울리는 그의 음성이 일으킨 반향은 대단했다. 지금껏 불신의 눈초리로 단상 위를 응시하던 헌터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
“북왕의 말이 옳다!”
“거리낄 게 없다면, 스크린에서 물러나라! 스스로 떳떳하다면 막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위원회는 뭘 감추고 있는 거지! 우릴 장기말로 보는 거냐!”
“이, 이자들이…!”
불과 몇 십 분 전만 하더라도, 늙은 호랑이의 위상으로 단숨에 장내를 휘어잡던 벤텀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후광처럼 그를 떠받치던 위원회의 권위가 나락으로 추락한 이상, 지금의 그는 발톱이 살아 있는 호랑이가 아니라, 다 늙어빠진 너구리일 뿐이었다.
-당신이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만. 고맙다는 말씀이라도 드릴까요?
아이벤은 콧방귀를 뀌며 발레기우스의 천연덕스러운 낯짝을 노려보았다.
“네놈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하려던 얘기나 마저 해 보아라.”
-그러시다면야.
히죽. 거드럭거리듯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인 발레기우스는 아수라장이 된 이곳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양,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흠,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아아, 제가 문제 하나를 냈었지요. 위원회의 저 오만한 자신감. 그 근원… 조금 김이 빠지는 감이 있지만, 해답을 알려드리지요. 그건 바로 카멜롯입니다. ‘시스템’이라 불리는 전지전능의 힘.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위원회 최후의 보루가 잠들어 있는 곳이지요.
“카멜롯…….”
-헌터들의 힘은 저널에서 나오고, 저널에 힘을 부여한 것은 시스템입니다. 일명 ‘임파워링’이라고도 하지요. 그렇다면 말을 바꿔보지요. 힘을 부여할 수 있다면, 다시 회수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카멜롯에 잠든 힘은,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수만 명의 반군?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저널의 힘을 잃어버린 헌터들은 수만이 아니라 수십만이 모여도 먼지덩어리일 따름이죠.
“……”
-그 힘은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헌터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에 접속하여 세상 모든 지식을 손에 넣을 수 있고, 카르마 에너지를 통제하여 임의로 이레귤러를 일으킬 수도 있지요. 실제로 이 수백 년 간, 위원회는 그런 식으로 권력을 유지해왔습니다. 뭐, 믿을지 안 믿을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만.
어느새 드넓은 평야 한 가운데 울리는 것은 스크린을 통한 발레기우스의 음성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진실의 민낯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위원회의 깃발 아래 모여든 이천의 인원들은 하나 같이 시체처럼 푸르죽죽한 얼굴빛이 되어, 달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번쩍이는 스크린의 중앙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정보다 늦게 올라가서 죄송합니다.
이번 주말, 좀 루즈하게 진행되는 스토리를 빠르게 달려보고자 힘을 내서 연참을 해 보려고 합니다.
과오를 발판 삼아 좀 더 제 자신을 채찍질 하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연재 초기의 어중간한 마음가짐을 버리려면, 가장 좋은 건 아무 생각없이 계속 글만 쓰는 것이겠지요.
솔직히 저도 이만큼이나 오래 연재를 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댓글을 통해 걱정해주신 분들, 격려해 주신 분들, 코멘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보답의 의미로, 이번 주말은 쭉쭉 진도를 빼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리플은 하루 중 가장 마지막에 올라가는 편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몇 편을 올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어쨌든 힘이 닿는 데로 정신없이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코로 작은 힘이나마나 보태주시면 그저 감사하겠습니다.
비도 오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작가는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