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22)
0422 / 0777 ———————————————-
106# 대폭로
…이변. 있어서는 안 되는 이변이었다.
본디 위원회를 위해 마련된 지구총회란 무대. 원래대로라면, 새로운 십존의 발표와 함께 반군을 타도할 범대륙적 연합군이 결성되었어야 할 장소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영상이 재생되며, 말도 안 되는 반전이 일어났다.
주객전도(主客顚倒)랄까. 생생히 군중 앞에 서 있는 벤텀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조연이 되고, 오히려 스크린 너머에서 입을 놀리고 있는 발레기우스가 주연이 되었다.
이제 회장의 분위기는, 온전히 발레기우스의 세치 혓바닥에서 놀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의 입에서 폭로되는 사실들은 헌터들의 상식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더 들어보겠습니까? 인위적으로 반군을 조직한 위원회는 그들을 이용해서 온갖 끔찍한 실험을 자행해 왔습니다. 겉으로는 금기(禁忌)라 칭하며, 터부시되는 실험들 말입니다. 예컨대, 카르마 에너지와 카름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겠지요.
-심지어, 금기 연구로 온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오키도에서 대참사를 일으킨 흉악범 바이론은 본래 위원회 출신인 인물입니다. 그의 본명은 발터 군다르 악시밀리온. 위원회를 구성하는 아홉 왕가 중 군다르 왕국의 적통입니다.
점입가경이었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장내를 둘러싼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는 가운데, 스크린 앞에 서 있던 아이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으음…….”
발레기우스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난 정황이, 벤텀의 미심쩍은 태도가, 그리고 위원회가 지금껏 보여 온 행적이 그의 말에 차츰차츰 신빙성을 더하고 있었다.
위원회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 현재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팽배한 생각이었다.
회장 전체를 관통하는 불온한 기류.
대형 스크린 앞에 서서, 수심에 찬 얼굴로 단상을 굽어보고 있던 북왕은 누구보다 먼저 그 이질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좋지 않군.’
그의 눈에는 벤텀이 서 있는 단상과 그 아래에 모인 헌터들, 그 사이를 두고 갈라진 깊은 골짜기가 보였다. 지저 깊은 곳까지 갈라져 도저히 메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 깊은 틈이.
심지어, 위원회에 의해 임명된 새로운 십존들조차 단상을 향해 마뜩찮은 눈빛을 보내고 있다.
불신. 의혹. 경멸…….
평소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언제까지고 경외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위원회가, 이런 시선을 받게 될 줄이야.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위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군림만을 해왔다. 그들에게 타협이란 없었으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엄격하고, 통제되고, 경색된 사회. 이에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인 이상 필연적인 귀결일 터. 위원회의 편에 선 헌터라고 다를 건 없었다.
오랜 세월, 막강한 권위에 억눌려 그저 쌓이기만 했던 불만이, 서서히 뜨겁게 끓어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장내의 상황을 남 일처럼 손 놓고 구경하던 발레기우스는 마지막 직격탄을 날렸다.
-저와 다른 십존들이 위원회를 배신하고, 이 반란에 가담한 이유. 그게 궁금하십니까? 정말, 별 거 아닙니다. 우리는 저 위원회가 마음대로 쓰다 버리는 장난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우릴 실 끊어진 인형 신세로 만들 수 있는데, 누가 그런 삶을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말한, 지금까지 말해왔던 ‘자유’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헌터로서의 자유. 우릴 속박하는 위원회와 시스템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 여러분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전언입니다. 위원회가 최후의 보루로써 믿고 있던 카멜롯은 제 손에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은 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잃었으며, 헌터들은 사실상 자유를 얻었습니다. 반군 토벌? 후후후… 이미 의미 없는 짓에 불과합니다. 우린 벌써 뜻을 관철했으니까요.
-제 말이 정말인지 궁금하시겠죠. 물론, 당장 물질적으로 여러분을 믿게 만들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요.
-넉넉잡아 한 달… 아니, 보름 후면… 온 세계가 뒤집어질 테니까요. 후후, 후후후… 후하하하하하—!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잦아들고, 화면 가득히 떠 있던 발레기우스의 얼굴이 거뭇한 음영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화면 전체가 까맣게 물들며 픽 꺼져버렸다.
그리고 그의 웃음이 아련히 떠나간 자리엔, 짙은 불신이 어린 침묵만이 남아, 회장 전체를 소슬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
위원회가 소집한 지구총회는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원래 2일차, 3일차까지 예정되어 있었던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고, 소집된 헌터들과 오너들은 그대로 근거지에 복귀해버렸다. 나중에 벤텀을 비롯한 위원회, 연맹측 인사들이 발레기우스가 공표한 내용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미 공신력을 잃어버린 위원회의 발표를 귀담아 듣는 이들은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지구총회에 참여한 헌터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 대륙에 전파된 발레기우스의 폭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원회의 일인인 오베른 가주가 목숨을 잃기 전, 사실상 발레기우스의 말을 시인하는 듯한 언행을 했다. 사람들의 의혹을 부풀리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 하루. 오랜 기간 영속될 것만 같았던 위원회의 후광은 그날 하루 만에 완전히 빛이 바래버렸다.
사자가 상처를 입으면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강대한 위원회라고 다를 바 없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언론이었다. 본래 위원회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찍어내야 할 언론들이, 마치 고삐가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며 연일 위원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어차피 발레기우스의 방송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간 마당이다. 그럴 듯한 심증이 있고, 헌터들의 마음은 백팔십도 돌아섰다. 이런 먹음직스러운 기삿거리를 언론이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흡혈왕의 공표,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위원회의 반박 성명……. 진실은 어디에?
-음모론으로만 치부되던 시스템 통제, 그 실체를 밝힌다!
매일 같이 자극적인 기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연일 위원회의 허술한 대응을 질타하는 강경 발언들이 각 언론사의 첫 페이지를 빼곡하게 장식했다.
물론, 위원회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장 중부의 시온, 이레브에서는 위원회에 대해 부정적인 보도를 내보내던 언론사 관계자들의 목이 달아났다. 그들의 잘린 목은 드높은 성벽 위에 본보기로 효수되었으며, 그 아래 팻말에는 발레기우스의 선동에 동조할 시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나붙었다.
그러나 그런 강경책으로 진압하기엔 이미 대륙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상태였다. 오히려 위원회의 이 같은 대응은 한번 불이 붙어버린 반발심을 크게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명백한 실수. 돌이킬 수 없는 경솔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아직까지 무엇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수백 년 간 그렇게 대륙을 다스려왔으며,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왔다.
이번에도 강하게 나가면 해결되리라. 위원회의 권위를 그 누가 거스를 것인가? 안일하게도, 그들은 아직까지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실증으로 쌓아온 경험, 거기서 우러나온 믿음. 그 매너리즘의 순환 고리가 위원회 스스로의 목을 서서히 죄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뼈저린 실수의 대가는 곧바로 나타났다.
발레기우스의 공표가 있은 지 이틀 뒤. 그때까지 진행된 징집 상황을 집계해 본 위원회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에 편승해, 순순히 십인대를 차출한 클럽들이 예상치의 약 오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적다. 너무도 적다. 수만을 넘어서는 반군과 일전을 치르기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적은 병력이었다.
위원회는 그때가 되어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아직 숨겨진 카드들이 많이 있다. 가령 은퇴한 십존들이라든가, 백전대와 같은 직속 부대라든가. 그러나 그 전력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야 할, 위원회 본연의 힘. 카멜롯이 무력화된 이상 함부로 힘을 깎아먹을 수는 없었다.
열 개의 크리스탈 기둥이 장엄하게 늘어서 있는 백색의 공간. 위원회 멤버의 모임 때마다 사용되는 이 공간 내부엔,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고 참담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흐흐흐흐…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었군.
-…한 방? 이걸 겨우 한 방이라고 할 수 있나?
-발레기우스 놈이 설마 카멜롯의 위치를 알고 있었을 줄은….
-…어제, 카멜롯의 파괴를 확인했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더군.
중앙의 크리스탈로부터 전달된 사실에, 몇 개의 크리스탈에 깃든 음영이 깃발처럼 거세게 펄럭였다.
-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지금까지 아무런 보고가 없었지 않나! 대체 오라클은! 아가레스트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게야!
끝끝내 참지 못한 누군가가 거친 노성을 터뜨렸다.
카멜롯의 존재는 대외적은 물론, 대내적으로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최대의 극비다. 그것은 위원회의 눈과 귀를 담당하고 있는 오라클 백전대원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물론 카멜롯을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이상을 보고하는 대원들은 있었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그곳이 위원회에 속한 재산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카멜롯에 대한 보고를 총괄하고, 전담하는 것은 당대 오라클의 총수다. 즉, 위원회의 인물로서 십존의 일좌를 맡고 있는 아가레스트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반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태. 위원회조차도 그 정확한 행적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상하군. 아가레스트가 부재중이라면 그 측근이라도 보고를 올렸을 텐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다니……. 오라클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 제기. 안타깝게도, 현 시점에서 위원회는 아가레스트가 포로로 잡힌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측근이자 연락책인 이오 또한 그녀와 함께 생포된 처지. 오라클의 보고 체계가 한순가 마비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발레기우스는 위원회의 눈이 멀어버린 그 순간의 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어 카멜롯을 파괴했다. 어찌할 도리 없는 허점을 만들어, 위원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한 것이다.
-일단, 아가레스트를 소환해야겠군. 상황이 무척 어렵게 되었어.
-하지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잖나.
-제대로 시국을 판단하고 있다면 조만간 알아서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도 아니라면, 그 녀석을 해임할 수밖에. 기본적인 판단조차 되지 않는다면, 오라클의 총수에 앉아있을 자격은 없다.
짤막히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고, 다시금 숨 막히도록 무거운 기류가 장내를 내리눌렀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지금 그들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위원회로서도 카멜롯의 파괴는 무척이나 뼈아픈 타격이었던 것이다.
발레기우스의 말을 밀리자면,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전지전능의 힘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모두가 음울한 적막에 휩싸인 그때, 중앙의 크리스탈이 한 차례 크게 진동했다.
-이, 이런…!
-왜 그러지?
지금껏 회의를 주재하며,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크리스탈 속의 시선들이 모두 가운데로 향했다.
-허, 허허허…
넋을 잃어버린 듯 허탈한 웃음. 듣는 이마저 절로 불안하게 만드는 공허한 울림이었다.
-이봐,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나?
-연락이 들어왔네. 발레기우스, 그놈이 또다시 방송을 통해 공표를 했어.
-뭐라? 이 미친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주절주절……!
-…사흘 뒤, 동부의 에덴에서… 아가레스트를 공개처형한다는군.
폐부를 쥐어짜 목소리를 토해내는 듯한, 격한 분노에 휩싸인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열심히 달리는 중입니다. 코멘 모두 챙겨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UP UP UP UP UP UP UP UP UP UP UP UP UP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