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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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생쥐의 이빨
108# 생쥐의 이빨
지면을 뚫고 나와, 얼핏 거대하게 뿌리를 내린 고목처럼 솟아 있는 얼음 기둥의 앞. 온 몸에서 살을 에는 냉기를 발하는 은발의 여인이 고고하게 턱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하유라의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검사가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행색과 무기는 꽤나 낯이 익었다.
…그는, 퀸젤의 호위 역처럼 붙어 다니던 광검 도정섭이었다.
그리고 도정섭의 옆에는, 머리를 비롯한 전신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퀸젤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하유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력화된 도정섭과 꽁꽁 얼어버린 퀸젤. 그리고 도도하게 서서 그들을 오시하고 있는 서리여왕 하유라. 상황은 너무나 일목요연했다.
하유라는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구덕과 도일을 보더니 은빛의 눈썹을 가볍게 샐그러뜨렸다.
“벌레들이 또 죽을 자리를 찾아왔군.”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말투를 보아하니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노구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여름인데도 허연 입김이 숨 가쁘게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휴우우우……. 이봐, 도일. 마음의 결정을 내렸나? 아니, 이제는 자네 마음가짐이야 별 상관없지만.”
하유라와 퀸젤 일행을 보고 멍하니 굳어 있던 도일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삼켰다.
“하, 하하… 설마 저보고 서리여왕을 상대하라는…….”
“대륙 유일의 룬메이커(Rune maker)에게 너무 과한 기대를 걸고 있는 건가?”
“…실례했습니다. 노구덕 위원님. 제가 오지랖이 넓었나 봅니다. 아무쪼록 용무 편히 보시고 돌아와 주시길…. 으헉!”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도일은 뒷공간의 대기가 쩌저적 얼어붙자 해쓱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쓰레기들. 한 놈도 도망칠 수 없다.”
순식간에 노구덕과 도일을 빙벽의 공간에 가둔 하유라가 으름장을 놓자, 파랗게 얼어붙어 있던 퀸젤은 그제야 다른 이의 존재를 느꼈는지 겨우 눈동자를 굴려 옆을 쳐다보았다.
“노, 노, 노구덕 위원…? 어, 어떻게…?”
발음이 다소 부정확하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서리여왕과 맞서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할 정도면, 역시 퀸젤도 한 수 재간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역부족으로 저 모양 저 꼴이 되긴 했지만.
“이 미련곰탱이 같으니라고. 목숨값은 나중에 톡톡히 받아낼 거다. 도일, 준비됐나?”
“준비고 자시고… 이젠 싸울 수밖에 없잖습니까.”
툴툴거리는 도일의 주위엔 어느새 기이하게 생긴 문자들이 밝은 빛을 발하며 그의 주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일명 룬워드(Rune word), 혹은 룬스펠(Rune spell)로 불리는 그만의 독특한 마법 형식이다.
‘룬’이라는 신비 문자의 힘을 빌려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고대의 힘. 직접 저널을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론 Unique 등급의 재능이라는 정보를 접한 적이 있었다. 어찌 보면 언령(S)의 상위계열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힘.
그런 힘을 가지고도 벅찬 상대가 저 서리여왕 하유라다. 그런데도 도망칠 궁리를 하지 않고 힘을 보태주다니…….
노구덕은 이 뺀질거리는 미남 청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자네, 보기와는 달리 꽤 의리가 있군. 바로 도망부터 칠 줄알았는데.”
“어휴, 도망칠 수 있다면 진즉에 달아났을 겁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떡합니까?”
“소속이 어디였지? 혹시 우리 둘 다 살아남게 되면 말인데… 내 클럽에 올 생각 없나? 이적료라면 두둑하게 얹어 주지.”
뜬금없는 헤드헌팅. 이건 꽤나 황당했는지, 한창 주문을 준비하던 도일의 스텝이 미묘하게 꼬이는 것이 보였다. 간신히 나자빠지는 것을 면한 도일은 노구덕을 향해 어이없는 눈길을 던졌다.
“미쳤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요?”
“하긴…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최근 인재난에 시달리다보니,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고 말았다. 노구덕은 뒤늦게 실수를 자각하고 진지한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서리여왕 하유라의 눈썹은 저 하늘을 뚫고 올라갈 정도로 높이 치솟은 뒤였다.
무섭게 눈을 치뜬 하유라는 순백으로 물든 동공을 섬뜩하게 빛내며 힘차게 손을 떨쳤다.
“…죽어라.”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노구덕은 주위를 아지랑이처럼 맴돌던 대기가 바짝 얼어붙는 그 순간, 앞뒤 재지 않고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전면으로 질주했다.
팔뚝에 찍힌 다섯 개의 붉은 반점이 핏물을 머금은 양 찰랑거리고, 활성화된 근육들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수인화한 라이칸스로프처럼 순식간에 거대화한 노구덕은 그르렁거리는 기합을 토해내며 하유라를 덮쳤다.
언뜻 보기엔 흉악한 야수가 연약한 미녀를 덮치는 듯한 장면이었지만, 실상 속사정은 그 반대. 그런 막무가내식 덮치기가 서리여왕에게 통할 리 없었다.
“흥! 건방진 것!”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하유라의 손에 길쭉하고 투명한 장창이 쥐어졌다. 손아귀에서 영롱한 빛을 뿜는 장창을 빙그르르 두어 바퀴 돌린 하유라는 무식하게 짓쳐드는 노구덕의 가슴팍을 향해 창두를 내질렀다.
푹!
철갑보다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그의 질긴 가죽도 하유라의 빙창 앞에선 무른 두부나 다름없었다. 손쉽게 노구덕의 가슴팍을 꿰뚫어버린 하유라는 그대로 그의 거구를 내팽개치려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가, 가슴에 꽂힌 창대가 땅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자 한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지?”
온갖 무기를 자유로이 다루는 그녀의 근력은 Lv5. 일개 오크가 버텨낼 수준이 아니다. 헌데 믿기지 않게도, 이 거구의 오크는 빙창을 가슴에 꽂은 채, 하유라와의 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빙창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기운은 단숨에 내부 장기를 얼리고, 심장을 정지시킬 정도의 위력이다. 말인즉슨, 빙창에 관통된 순간 이미 저 오크의 목숨은 다한 것일 터.
그런데… 저 오크는 비록 얼굴가죽이 하얗게 떴을지언정 빙창의 기운을 거뜬히 견뎌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절주절 말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쿠흐흣……. 이봐, 설녀. 설마 나 같은 하수랑 싸우는데, 무기를 손에서 놓지는 않겠지?”
“쓰레기가…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못 들었나? 무기를, 손에서, 놓지, 말란, 말이다!”
빙글!
악에 받친 고함이 고막을 격하게 울린 순간, 하늘과 땅이 뒤집어졌다. 정확히는 하유라의 시선을 통해 비쳐지는 풍경의 위아래가 뒤바뀌었다.
노구덕에 의해 창대째로 높이 던져진 하유라는 훨훨 창공을 날아가는 와중에도,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니, 이해는 했다. 지금 그녀는 본래 형편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어야 할 오크에게 역으로 던져졌다. 그것도 그냥 던져진 게 아니라, 어른과 아이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팽개쳐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서리여왕 하유라가 말이다. 재능의 극한까지 개발된 Lv5의 근력이, 별 시답잖은 오크에게 꼴사납게 꺾여버린 것이다.
…하유라가 이 비현실 같은 현실을 납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초.
그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끝없이 날아갈 것만 같던 하유라의 몸이 허공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우뚝 멈추었다.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 잡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수라(修羅)와도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고고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하유라가 바득 이를 갈고 있는 그 시각, 정작 그녀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낸 장본인은 하유라는 안중에도 없이 전투불능에 빠진 퀸젤과 도정섭을 구출하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제길, 이거 큰 돈 주고 구한 건데…….”
빙창에 관통당한 상처가 죽을 듯이 아팠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뒷골이 띵 하고 울릴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서 뒹굴뒹굴 굴러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노구덕은 어금니를 깨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그가 번 시간은 겨우 수 초, 그 안에 어떻게든 퀸젤과 도정섭을 이곳에서 빼내야만 했다.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즉발형 워프게이트였다. 시온에서 퀸젤이 사용했던 바로 그것. 암시장에서 엄청난 거금을 주고 구입한 만큼, 효과는 확실하리라.
“노, 노구덕 위원….”
“제길, 조용히 있어. 안 그래도 아까워서 미칠 것 같으니까.”
“이, 이, 이거…….”
시퍼렇게 굳어버린 그녀의 입술은 이미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 벌벌 떨리는 퀸젤의 눈동자가 간절한 빛을 담아 아래로 향했다. 막 혼절한 도정섭을 그녀의 다리 아래에 가져다 놓고, 워프게이트를 발동시키려던 노구덕은 퀸젤의 간곡한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이 상황에서 저리 애타게 눈을 굴리는 데에는 필시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퀸젤의 발치에 작은 종이뭉치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는 주문 스크롤이었다.
“…스크롤?”
“바, 바, 발…….”
딱딱 끊어지는 음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을 해보건대 이 스크롤을 사용하라는 뜻이리라.
대강 그 뜻을 짐작하고 스크롤을 펼친 노구덕은 바로 표정을 구겼다. 스크롤 안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문양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지간한 스크롤은 거의 다 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종류.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초가 아까운 마당에 뭔지도 모르는 스크롤을 어떻게 사용하란 말인가.
“염병! 무슨 마법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용하라는 거야? 아니지, 우선은 워프게이트부터!”
하유라는 거의 수십 미터가 떨어진 거리에서도 퀸젤의 발밑에 그려진 워프게이트 마법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말했을 텐데!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한다고!”
표독스럽게 눈을 부릅뜬 그녀의 손등에서 두 개의 마법진이 중첩되어 발현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살갗을 찢어발길 듯한 혹한의 눈보라와 셀 수조차 없는 무수한 우박 세례가 천지를 뒤덮었다. 그녀의 장기인 블리자드와 헤일스톰이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그 순간, 또 한 번의 이변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갑자기, 망막을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열기를 동반한 불꽃의 폭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붉은 그물망처럼 퍼진 수백 개의 단검과 함께 출현한 화염의 폭풍은 분노의 화신처럼 날뛰며 하유라가 발현시킨 혹한의 지옥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금방이라도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듯, 무시무시한 위세를 뽐내던 화염폭풍은 그녀의 광역 주문 두 개를 무위로 돌림과 동시에 마치 그 등장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픽 사라졌다.
한순간이나마 임유진의 존재를 의식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던 하유라는 이내 그 ‘주문’에 실린 마력의 성질이 임유진과 전혀 다름을 간파했다.
“…임유진? …아니, 아니야. 그래… 룬메이커로구나.”
하유라의 서늘한 시선이 저 아래에서 어설프게 웃고 있는 잘생긴 낯짝 위에 잠깐 머물렀다. 노구덕에게 주의를 집중하느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젊은 청년.
룬메이커 도일. 프라임리그에서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는 헌터다. 그의 능력은 룬워드를 통해 상상을 현실로 구현시키는 힘. 방금 전, 잠시나마 임유진을 연상시켰던 화염 폭풍도 잠시 그가 ‘빌려온’ 복제판이 분명했다.
노구덕이 데려온 지원군이 예상외의 선전으로 시간을 번 사이, 노구덕이 설치한 즉발형 워프게이트에서 하얀 빛의 결정이 달무리처럼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마침내 워프게이트가 가동된 것이다.
“성공이다!”
“휴우!”
워프게이트가 발하는 순백의 빛이 이토록 반가울 때가 있었던가. 빛무리에 휩싸인 노구덕이 쾌재를 부르고, 도일 역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1초, 아니, 0.5초만 있으면 저 얼음마녀의 손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서리여왕 하유라의 붉은 입술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선언이 떨어졌다.
“…앱솔루트 제로.”
…일대의 모든 마력을 동결하는 절대적 명령의 구현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투척! 지구인들의 힘을 끌어 모으면 삼연참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참, 이번에 표지를 새롭게 바꿨습니다..
리리플은 최근 늘 그랬듯이 하루 마지막화에 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장문으로 질문을 주셨던 독자님의 성의에 보답해, 몇 가지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1. 발레기우스는 게이입니까?
-> 아닙니다.
2. 시스템이 일부 남아 있다면 왜 그걸로 반군을 정리하지 못하나?
-> 정리할 수 있다면 당연히 했겠지만.. ‘일부’남은 힘으로는 카멜롯이 완전했던 때처럼 강력한 통제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발레기우스가 지금처럼 설칠 수도 없었겠죠!
3. 위원회가 막장인게 드러난 마당에 헌터들이 따르는 게 이상하다.
-> 정확히 말하면 모든 헌터들이 따르는 게 아니라, ‘절반’이나 위원회의 소집을 거부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위원회의 권위가 엄청나게 떨어진 걸 알 수 있죠.
그리고 발레기우스의 선포는 확실히 치명적이긴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그의 선언을 뒷받침해줄 어떤 물증도 없습니다. 이레귤러를 조정했다든가, 생체실험을 했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그나마 있는 건 오베른을 죽일때 녹화했던 영상 정도로, 반란을 애초에 위원회가 꾸몄다고 자발적으로 시인하는 장면이죠.
물론 이것만으로도 헌터들 입장에서는 화딱지가 날 만한 일이지만, 일단 당장 아직까지 대륙을 주름잡고 있는 건 위원회입니다. 반군의 세력은 아직 동부와 남부 일부밖엔 되지 않아요. 아무리 위의 부패가 드러났다고 한들, 당장 자기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이상 어떻게든 주류에 붙어있으려고 하는 게 인간이죠.
만약 반군이 패배하고 진압되면, 위원회에 반기를 든 헌터들은 당장 다 싸그리 쓸려나갈 텐데, 헌터들이 목숨을 건 결정을 그리 쉽게 내릴 수 있을 리 없죠!
작가의 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외에도 따로 궁금하신 게 있다면 코멘트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