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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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생쥐의 이빨
서리여왕의 선포가 떨어지자 주변에서 넘실대는 마력과, 마력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현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건 일행을 구원해 줄 워프게이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구덕은 하얀 빛무리가 일어나는 그 모습 그대로 워프게이트가 정지하자, 끄응 하고 어처구니없는 신음을 흘렸다.
“이럴 수가… 이러면 도망도 못 치잖아.”
“…마력동결이라니… 하하… 영상으로는 많이 봤습니다만, 이거야 원… 답이 없네요. 이곳이 우리 무덤이 될 것 같습니다.”
반쯤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도일의 얼굴엔 벌써부터 진한 절망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방에 우리처럼 빼곡하게 솟은 얼음의 장벽. 어찌할 도리 없이 동결된 마력. 이 골목 전체가,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용기 속에 통째로 담긴 듯한 광경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는 하유라. 이미 일행이 독 안에 든 쥐 신세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 하나에서부터 강자의 오만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구덕의 눈빛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단단하게 얼어붙어, 재생을 방해하는 가슴팍의 살점을 한 뭉텅이나 스스로 떼어냈다.
그러자 시뻘건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 사이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걸 보니 비로소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이보게, 도일…….”
“…뭡니까? 이제 와서 사과라도 할 생각입니까?”
“좀 이상하지 않나? 내가 알기로 이건 마력뿐 아니라 공간 전체를 동결시키는 권능이야. 그런데… 보다시피 우린 지금 이렇게 멀쩡해. 동결된 건 마력뿐이란 거지.”
“엇…….”
그제야 이상함을 알아차린 도일은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확실히 임유진과의 대전에서 보여준 ‘앱솔루트 제로’는 사정권 안의 공간을 통째로 동결시키는 막강한 권능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이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약식? 혹은 다운그레이드 버전? 어찌됐건 기존의 오리지널보다 약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희색을 띠었던 것도 잠시. 도일은 그게 뭔 대수냐는 듯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봐야 변하는 건 없습니다. 마력이 동결된 마법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말이지. 난 마력을 쓰지 않거든.”
“예?”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 테니까, 이 스크롤이나 좀 봐 줘. 난 이게 뭔지 도통 모르겠더군. 어쩌면 이게 우리의 생명줄이 되어 줄 지도 몰라.”
어느새 반말조로 일관하는 그에게 항의할 겨를도 없이, 도일은 노구덕으로부터 정체불명의 스크롤 하나를 건네받았다.
엉겁결에 스크롤을 떠맡아버린 도일은 알 수 없는 문양이 빼곡하게 들어찬 스크롤을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 이건……!”
“역시. 뭔가 감이 오는 모양이군. 그럼 뒷일을 부탁하네.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비장한 말을 남긴 노구덕은 그대로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도일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노구덕의 뒷모습을 보며 꿀꺽, 목울대를 움직였다.
“봐, 봐도 모르겠는데… 나보고 이걸 어떡하라고…….”
뒤에서 도일이 죽상을 짓거나 말거나, 무작정 달려 나간 노구덕은 바로 옆에 있던 꽁꽁 얼어붙은 커다란 가로수를 뿌리째로 뽑아들어 하유라에게 내던졌다.
육중한 가로수에 이어, 널브러져 있는 마차, 건물의 잔해, 심지어는 멀쩡한 집의 기둥뿌리까지 뽑아 던졌다.
쾅! 쾅! 쾅!
허나 그런 원시적인 돌팔매질(?)이 서리여왕 하유라에게 통할 리 없었다. 서리여왕 하유라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전면에 내세운 빙벽으로 노구덕의 공격을 모두 무위로 돌려버렸다.
‘빌어먹을, 결국 이렇게 되는군.’
노구덕은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돌팔매질은 시간벌이였을 뿐, 처음부터 그런 얕은 수작으로 하유라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믿는 것은 고도로 진화한 자신의 육체뿐.
‘이럴 줄 알았으면 데모나에게 미리 약을 받아두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나.’
차라리 하유라를 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면 어땠을까…. 라는 후회도 들었지만, 노구덕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하유라에게서 도주할 수 있었다면 이런 식의 생고생도 하지 않았을 터.
짧은 시간 동안 각오를 굳힌 노구덕은 팽배하게 부푼 다리를 스프링처럼 튕겨 폭발적으로 육체를 가속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유라에게 날아든 노구덕은 유리처럼 투명한 정면의 빙벽의 중심부에 혼신의 힘을 다한 일권을 먹였다.
투콰앙–!
피륙으로 이루어진 주먹과, 무쇠보다 단단한 얼음벽이 충돌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이 고막을 세차게 후려쳤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게 가능하다고?”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노구덕을 응원하던 도일의 서글서글한 눈이 가로로 쭉 찢어져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그만큼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 점의 투기도, 마력도 깃들어 있지 않은 인간… 아니, 오크의 주먹이,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서리여왕의 얼음장벽을 박살내고 있었다.
빙벽의 중심부, 노구덕과 충돌한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균열이, 철옹성 같은 굳건함을 자랑하던 빙벽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전체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퍼져 불투명하게 변해버린 얼음벽은 쩌저적거리는 단말마와 함께 잘게 조각나 부서져버렸다.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잔해 사이로, 서리여왕 하유라의 뻣뻣하게 굳어버린 맨얼굴이 엿보였다.
사력을 다한 단 한 번의 주먹질이 서리여왕 하유라의 얼음가면을 시원하게 깨부순 것이다.
잘게 조각나버린 빙벽의 잔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하유라는 이윽고 시선을 돌려, 피맺힌 주먹을 쓰다듬고 있는 노구덕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쓰레기. 네 이름이 뭐지?”
“흐흐흐… 별로 알려주고 싶지는 않군. 너 같은 여자에게 찍히는 건 사양이다.”
“그래? 그게 네 유언이로군.”
초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던 노구덕은 하유라의 손에 투명한 빛을 내뿜는 검신이 생겨나자, 김빠진 헛웃음을 흘렸다.
“아발란체. 이걸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후랴아아압!”
성난 멧돼지처럼 돌격을 감행하는 노구덕을 보는 하유라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허연 서리가 내려앉고, 일반인은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찬 공기를 계속해서 기도로 들이켜고 있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숨 몇 모금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폐부에 치명상을 입고 죽어 나자빠졌을 냉기가 그의 주위를 압박하고 있을 텐데… 이 오크는 그런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직까지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폐뿐만 아니라, 심장도, 근육도, 뼈도… 둔해지긴 했지만 죽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실로 경이로운 저항력이었다.
불멸자라는 클래스, 이모탈 팩터, 충왕각인의 힘, 브리트라의 권능, 비틀쉘. 이 모든 능력이 더해진 노구덕의 저항력은 바퀴벌레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할 정도로 끈질겼다.
그런 그에게 있어 단 하나의 불행이라면… 상대가 너무 나빴다는 것. 주변을 순백의 서리로 물들인 오만의 여왕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흥…. 어디 이것까지 견뎌내는지 보도록 할까.”
낮게 코웃음을 친 하유라의 손에 시퍼런 냉기가 스며들었다. 동시에, 아발란체의 투명한 검신에서 짙푸른 한기가 서릿발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크라이어제닉 쇼크. ‘빙결’ 그 자체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한빙계열 최강의 권능. 이 푸른빛에 적중당한다면, 아무리 불사신 같은 노구덕이라 할지라도 생존을 장담할 순 없으리라.
그녀를 향해 짓쳐들고 있는 노구덕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등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타 버린 형국인 것이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라 여긴 노구덕은 응어리 진 속내를 풀어내기라도 하듯 잔뜩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며 주먹을 내질렀다.
“죽어도 한 방은 먹이고 죽겠다! 뒈져라, 똥갈보 같은 년아! 우아아아악!”
“뭐? 으, 이 벌레 같은 놈이…!”
그렇잖아도 미미한 균열이 가 있던 서리여왕 하유라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천하의 서리여왕이 면전에서 대놓고 시궁창 같은 쌍욕을 얻어먹은 것이다.
똥갈보… 똥갈보라니! 노구덕의 원초적인 인신공격은 항상 북해의 빙하처럼 얼어붙어 있던 하유라의 얼굴색을 순식간에 뜨겁게 덥혀 놓았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쪽으로.
“더러운 오크 새끼! 죽엇!”
하유라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고성이 튀어나오면서, 아발란체에 어린 시퍼런 기운이 정면의 노구덕을 향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죽음을 의미하는 푸른빛, 크라이어제닉 쇼크였다.
노구덕은 사방을 빈틈없이 에워싸며 덮쳐오는 푸른빛의 위세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동공이 뻑뻑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산 채로 냉동인간이 되어 이곳에 박제품처럼 전시되겠지. 유진이가 너무 충격을 받지 않아야 할 텐데… 퀸젤, 고 망할 년을 구해주는 게 아니었어. 그냥 죽게 내버려둘 것을… 너무 욕심을 냈나…….’
막상 죽음을 앞두니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을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노구덕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1초, 2초는 지났을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데일 듯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뭐지? 허억!’
노구덕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눈을 뜨자마자 크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를 후려맞은 듯 얼이 빠진 하유라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탓이다.
눈은 감았어도, 맹렬히 달리던 육체는 그대로 뇌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하유라와 그대로 충돌할 판이다. 당황한 노구덕은 그대로 팔을 휘둘러 멍하니 서 있는 하유라의 복부에 그대로 강렬한 보디블로를 먹여버렸다.
“흐꺽…!”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얻어맞은 하유라는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리며 한참이나 뒤로 날아가, 뒤쪽에 있던 건물의 잔해에 쓰레기처럼 처박혔다.
“이, 이게 대체?”
아마도 사상 최초로, 서리여왕 하유라의 복부에 통렬한 일격을 먹인 노구덕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자신의 주먹과 하유라가 처박힌 곳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원대로 제대로 한 방을 먹였건만,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도일의 다급한 외침이 패닉에 빠져 있던 노구덕의 정신을 일깨웠다.
“노구덕 위원님! 뭐하는 겁니까! 빨리 오십시오! 워프게이트가 다시 발동됐다고요!”
“그, 그래야지!”
하유라가 쓰러진 여파일까. 일대의 마력 동결은 모두 해제된 상태였다. 다급해진 노구덕은 하유라의 생사를 확인할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다리를 놀렸다.
“빨리!”
“으아아아아!”
도일의 숨 가쁜 독촉에 노구덕은 젖 먹던 힘을 쥐어짜며 워프게이트 위로 몸을 날렸다.
노구덕의 거구가 그 위의 일행을 덮치듯이 날아든 그때, 백열을 거듭하던 하얀 빛무리가 마침내 절정에 달했다.
다음 순간, 두꺼운 빛의 기둥에 휩싸인 네 명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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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똥갈보 서리여왕에게 자그마치 배빵을 먹인 구더기..
아마도 한 편을 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오늘은 좀 쉬고 싶기도 하고… 고뇌와 번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대형떡밥(?)은 아마 다음화에서 터질 것 같네요.
만약 이게 오늘의 마지막화가 된다면, 열두시 즈음에 저번화 리리플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편이 더 올라가게 된다면 열두시전후가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