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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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엇갈림
110# 엇갈림
퀸젤을 만난 곳은 이레브의 상회, 그 중에서도 그가 직접 경영에 관여하는 직영점 내부의 비밀 응접실이었다. 이레브에 마땅한 살롱이 없는 노구덕이 주로 중앙정계의 주요 인물과 은밀한 회동을 가지고 싶을 때 이용하는 곳으로서, 퀸젤 또한 몇 번이고 이 응접실에 방문한 전력이 있었다.
“고맙군. 수고하게.”
“예. 위원님.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꺾인 허리가 염려될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가는 점장을 뒤로 한 노구덕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고풍스러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는 퀸젤의 모습이 보였다.
“…왔어?”
퀸젤의 안색은 오랫동아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얗게 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했던지, 하유라에게 당했을 적의 하얀 서리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더불어, 팔목이 비쩍 마른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야윈 모습이었다. 그래도 툭 불거져 나온 풍만함은 여전했지만… 다른 부위가 많이 깡마른 것은 사실이었다.
“퀸젤 위원… 몸은 괜찮은 건가?”
“…응. 덕분에. 고마워. 노구덕 위원. 이 말만은 직접 하고 싶었어.”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늘 자신감이 넘치던 눈은 시종일관 노구덕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
“날 보자고 했는데. 용건이 뭐지?”
“…….”
내심 짐작가는 바가 있기는 했지만, 노구덕은 모르는 척, 그녀의 내심을 떠 보았다. 이미 입장에서 한참이나 우위를 점하고 들어가는 만큼, 괜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퀸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뭔가 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뒤늦게 후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퀸젤이 크게 한숨을 내뱉은 것은, 그녀의 침묵을 받아주던 노구덕이 슬슬 엄습해 오는 지루함에 막 하품을 하려던 찰나였다.
“후우!”
별안간, 테이블과 원수라도 진 듯이 아래만 쳐다보고 있던 퀸젤의 고개가 급작스럽게 쳐들렸다. 큰 결심이라도 한 양 똑바로 노구덕을 마주한 퀸젤은 도톰한 입술에 진한 자국이 남을 정도로 짓씹고 있던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어…. 미안해. 노구덕 위원.”
“흠.”
“당신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난 그 자리에서 서리여왕에게 죽었을 거야. 날 도와준 도정섭 헌터도 같이 목숨이 다했겠지. 인정해. 이번 일은 명백한 내 미스였어….”
“그게 전부인가?”
“이번 일을 계기로, 난 당신에 대해서 꽤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 아마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받고 싶은 것도 많을 테지. 그렇지?”
비꼬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퀸젤은 자신이 보고 느낀 그대로의 감상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 지금의 그녀는 다 타버린 하얀 잿더미처럼 기력이 쇠한 느낌이라, 이전처럼 쓸데없는 기 싸움을 벌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상태가 이렇다면, 벼르고 있던 얘기를 쉽게 꺼내놓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노구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순 없겠군.”
“우선, 당신이 알고 싶은 것부터 물어봐주지 않겠어? 내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보단 그게 더 빠를 것 같은데.”
바라던 바였다. 노구덕은 퀸젤의 시원시원한 제의를 재지 않고 수락했다.
“좋다. 당신이 지니고 있던 스크롤, 그건 뭐였지?”
노구덕은 시작부터 무서운 돌직구를 던졌다. 아마도 이건 극비에 해당하는 정보일 터. 잠깐 머뭇거리던 퀸젤은 이미 숨기기엔 글렀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옅은 한숨을 지으며 답했다.
“…왕가 직계만이 쓸 수 있는 통제 스크롤이야. 시스템이 부여한 힘. 즉, 임파워링을 근간으로 한 모든 힘을 무효화할 수 있어. 저널 정보로 발휘되는 힘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지워버릴 수 있는 스크롤이야.”
“예상대로군. 그런 스크롤이 얼마나 많이 있지?”
“그건 나도 몰라.”
“모른다고?”
“그래. 내가 군다르 왕가의 직계라지만, 직계 후손이라고 모든 정보와 소스가 오픈되는 건 아니거든. 아마 당신이 물어본 사항을 알고 있는 건 가주 항렬의 어르신들뿐일 테지. 시스템에 관한 정보는 위원회 내에서도 그만큼 은밀하게 통제되고 있어. …그래서 이번 카멜롯의 파괴가 믿기지 않는 거야.”
퀸젤의 눈이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이 또렷한 걸로 봐서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노구덕 또한 질문을 하면서도 퀸젤이 모를 것을 염두에 두었던 터라,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이전에 내게 부탁을 하러 왔을 때, 그 스크롤의 존재를 미리 알려줬더라면 내 대답이 달라질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그 스크롤의 존재는 일반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극비 사안이야. 나는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와준 도정섭 헌터에게도 그 스크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그리고… 솔직히 그런 것에 상관없이, 날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고.”
“낭만주의자로군.”
“알아. …그래서 실패했지.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실패를 입에 담는 퀸젤은 쓰게 웃고 있었다. 노구덕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원망과 서운함이 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노구덕의 판단은 지극히 이성적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그 전에 노구덕이 자신을 도와줬더라면…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계획이었다. 이 또한 억지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쓴 약을 삼킨 듯 착잡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노구덕은 무심히 질의를 이어나갔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얼마든지.”
“에덴… 그때, 왜 거기 있었던 거지?”
“그건…….”
이번 질문 역시 답하기 곤란한 것이었는지, 잠시 말끝을 흐리던 퀸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답변했다.
“…아가레스트를 구하기 위해서였어.”
“아가레스트는 발레기우스에게 처형되었을 텐데… 혹시?”
“맞아. 그녀는 가짜야. 진짜 아가레스트는 아직 살아 있어. …아마도.”
“안개여왕이 살아있다…라.”
그녀의 말을 작게 되풀이한 노구덕은 습관처럼 팔짱을 꼈다. 기실, 퀸젤이 그곳에서 하유라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던 그 시점부터 처형당한 아가레스트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 방식의 참혹함과 곧바로 난입한 십존들의 결투, 그리고 전쟁… 연이은 큰 소란에 가려지긴 했지만, 아가레스트의 처형은 여러모로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대대적인 선전에 비해 절차를 거치지 않은 조급한 처형, 다소 의도적으로 보이는 시체의 폐기 등. 합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녀가 가짜일 것이란 정황은 충분했다.
그런데 퀸젤은 정황뿐 아니라 아예 확신을 줄 수 있는 어떤 물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록 말끝에 ‘아마도’란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고 에덴에 잠입할 정도니 꽤 믿을만한 증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어.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 나? 아가레스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고 했지. 내겐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구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그랬었지.”
“그건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야. 당신은 모르겠지만… 왕가의 왕녀라는 거, 생각보다 편한 지위는 아니라고? 특히 후계 싸움은 피비린내가 진동할 정도로 치열하지. 아가레스트와 나는 그 수라장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우였어. 우린 서로 많이 닮았거든. 생각도, 나이도, 입장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으니까. 아, 덤으로 예쁜 외모까지.”
“…뒷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아하하.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모처럼 밝게 웃은 퀸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비정하고도 잔혹한 후계다툼에 관한 것이었다. 각자의 후계자들을 받들어 모시는 가신들과, 정식 후계자로 지명받기 위한 혈족들 간의 피 튀기는 암투. 그렇잖아도 얼마 전, 장자 문제로 다툼을 벌이는 임유진과 데모나를 보았던 터라, 노구덕은 그녀의 말이 마냥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내가 열다섯 살 때였나? 그때 정말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어. 십 년 동안 나를 길러줬던 유모가 배신을 했거든. 그때는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지독한 배신감에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어. 그때 날 구해준 게 아가레스트야. 어때? 흔하디 흔한 얘기지?”
“…….”
“쳇, 재미없어. 들어주는 사람의 반응이 영 시답잖네. 긍정이든 부정이든 좀 리액션을 보여주면 안 되겠어? …하여튼,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리는 어디서든지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어. 저널을 지닌 헌터가 어디 있든지 그 정보를 포착할 수 있는 시스템의 힘을, 최소한으로 한정해 우리 두 사람에게만 적용시킨 거지. 이건 다른 어르신들도 모르는 비밀이야. 아가레스트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그래서 난 아가레스트의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거야.”
듣고 있던 노구덕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극비로 치부되는 시스템의 힘을 그 어린 나이에 편집(아주 약간이지만)해서 이용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게 가능한가?”
“응. 아가레스트는 천재거든.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제법 머리가 좋은 편이라서. 물론 아가레스트가 ‘카멜롯’의 관리를 전담하는 오라클의 총수가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그리고 말야, 기본적인 수식만 알고 있으면 시스템의 편집은 그리 어렵지 않거든.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수준에 한해서.”
“뭐라고?”
“생각해 봐. 타차원에서 영입을 전담하는 하이 스카우터들의 눈. 그걸 누가 ‘허락’해 줬는지. 그리고 작게는 최근 난리가 난 해금 같은 것들. 그런 권한들을 부여하고 설정하는 건 전부 위원회야. 원리만 알면, 다른 식의 편집도 가능하단 소리지.”
저토록 술술 말해주니 정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지금 퀸젤이 입에 담고 있는 것은 방금 전 그녀가 말한 극비 사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위 정보였다. 다들 막연히 그럴 것이라 인식은 하지만, 위원회의 그 어느 누구도 직접적으로 확인해 준 적은 없는 ‘전지전능’의 힘.
노구덕은 지금 그 실체를 일부나마 알게 된 것이다.
“그럼… 발레기우스가 노리는 건 그 힘인가?”
“아마도 그럴 거야. 마음만 먹으면 세상 전부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니까. 그자를 따르는 다른 십존들도 그 힘에 눈이 뒤집혀 있겠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것도 모르고 말야.”
또다시 묘한 사족을 덧붙이는 퀸젤. 노구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하하… 시스템이란 말이지, 그렇게 고분고분한 처녀가 아니야. 위원회도 다룰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해. 흔히들 생각하는 것들 있지? 예를 들어… 저널을 편집해 무적의 헌터를 만든다? 불가능해. 저널을 무적으로 편집하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울뿐더러, 지나친 간섭을 받으면 그 대상이 버티질 못해. 나와 아가레스트가 그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로 그친 것도 그 때문이야. 그게 가능했다면, 가장 먼저 우리가 무적이 됐겠지.”
“…….”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위원회는 일반 헌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스템적으로 막강한 제재를 가할 수단은 없어. 그저 정제소와 언론장악, 약간의 편집 기능으로 대대손손 먹고사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이건 나도 최근에 알게 된 거지만… 이레귤러의 조정까지 포함해서 말야.”
묵힌 응어리를 토해내듯, 위원회의 치부를 시원하게 까발리는 퀸젤. 그녀는 말을 잃어버린 노구덕을 바라보며 쓰게 자조했다.
“…역겹지 않아? 나도 위원회 쪽 인간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정말 구역질이 날 지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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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아침 투척…
저는 이번주를 하얗게 불태우고 영면에 들겠습니다. 독자님들, 뒷일을 부탁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