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36)
0436 / 0777 ———————————————-
110# 엇갈림
지금의 퀸젤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상했다. 마치 신부 앞에 선 죄인이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가주 어르신들은 항상 날 예쁘게 봐 주셔. 내게는 어딜 봐도 다정한 어르신들이야. 하지만… 사정을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 아마 악마가 따로 없을 걸?”
“…….”
노구덕은 문득, 크리스탈 기둥이 길게 도열한 방에서 위원회 늙은이들이 퀸젤을 친손녀처럼 귀여워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결국 신인으로 여겨지던 위원회도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은 것일지도.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야. 노구덕 위원, 당신도 벌써 느끼고 있겠지? 수백 년 간 지속되던 위원회의 통치는 무너졌어. 각 지역은 몇 개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뭉쳐 자치령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일부는 벌써 구체적인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어. 그리고 위원회 역시… 일각에선 다시 구(九) 왕국 체제로 회귀하려는 세력들까지 생겼지.”
노구덕은 눈두덩을 크게 꿈틀거렸다. 앞서 언급한 일들이야 익히 알고 있던 바였지만, 위원회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위원회의 내부 사정은 예상보다 더욱 심각했다.
“위원회까지 분열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그래. 당연하잖아? 지금까지 위원회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대륙 전체에 고른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야. 동서남북중. 각 지방을 통치하던 왕가의 지배자들이 그 영토와 세력을 고스란히 들고 와서 뭉친 덕분이지.”
“그래서?”
“지금 상황을 봐. 그나마 위원회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은 중부와 동부, 서부의 일부분 밖에는 없어. 과거 군다르와 시온, 이레브, 팔콘 왕국이 있던 곳이지. 그럼 과거 영토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생긴 나머지 왕가의 입장은 어떨 것 같아?”
“권력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동맹은 의미가 없단 뜻이군.”
“맞아. 이대로 중앙에 눌러앉아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느니, 그나마 남은 세력을 이끌고 구 영토로 복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지. 실제로 벌써 몇몇 가문들은 강경파 후계자들을 앞세워서 각 지구의 대도시에 세력을 주둔시키고 있어.”
개판.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노구덕은 이제야 퀸젤이 왜 위원회의 통치가 끝났다고 단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래서는 위원회가 발레기우스를 비롯한 반군을 격멸시키더라도 의미가 없다. 한 번 금이 간 유리가 저절로 붙진 않듯이, 싹트기 시작한 위원회의 분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화될 터.
결국, 위원회란 절대적인 힘을 중심으로 한 데 묶여있었던 대륙은 조각조각 나뉘어 흩어지게 될 게 뻔했다. 바야흐로 진정한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위원회가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다니… 기가 차는군. 발레기우스, 그놈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게 너무 늦었던 거지. 어차피 위원회란 공동체도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각 왕가의 이득을 위해 뭉쳤던 것이 그 시작이었어.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다면, 해체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야.”
“정말 그것뿐인가?”
“…무슨 소리야?”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시스템’이란 불가사의한 존재는 어떻게 생겨난 거지? 시스템의 통제조차 버거워하는 위원회가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은데…… 이 대륙에 처음부터 있었던 힘인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힘? 그도 아니라면…….”
그때, 착 가라앉은 퀸젤의 음성이 노구덕의 말을 칼로 끊어내듯 잘라버렸다.
“노구덕 위원. 뭘 궁금해하는진 알겠어. 하지만…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고.”
“왕가의 직계 후손조차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 가주들도 모른단 말인가?”
“말했다시피 나는 시스템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 어르신들은 어쩌면…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 더는 묻지 말아줘.”
금기라는 것일까. 무엇이든지 말해줄 것 같았던 퀸젤도 더는 그 주제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노구덕은 수백 년을 이어온 위원회, 그 유구한 역사의 너머에 검은 베일에 휩싸인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질문할 건?”
“음…….”
노구덕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남아 있기는 했다. 태양왕이나 퀸젤의 저널 정보를 가리고 있는 그 특수한 수단. 노구덕은 아직 그 수단, 혹은 능력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그녀에게 그 수단에 대해서 물어볼까 갈등하던 노구덕은 결국 그 의문을 속내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크게 중요한 사안도 아니었고, 그걸 대놓고 물어본다는 건 그가 스카우터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자백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해득실을 따져봤을 때, 그건 확실한 손해였다.
심유한 눈으로 노구덕의 눈치를 살피던 퀸젤은, 한동안 생각에 골몰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자 휴우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 그의 질문들이 하나 같이 핵심을 콕콕 찔렀던지라, 정신적으로 꽤나 압박이 컸던 모양이었다.
“꼭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사람 같은 얼굴이군.”
“무슨 비유가 그래? 후후… 하지만 한 숨 돌린 건 사실이야. 또 뭘 물어볼까 조마조마했거든. 이미 극비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뭉텅이째 풀어버려서 별 의미도 없지만.”
“이 정보들로 목숨값을 대신하겠단 건가?”
“왜? 모자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쯤에서 타협할 수밖에. 오늘 풀어둔 정보들 중, 추후 검토를 통해 의문이 가는 게 있으면 나중에 묻도록 하지.”
“욕심도 많으셔라. 알았어. 그 정도 애프터서비스라면 받아들여야지.”
달리 퀸젤에게서 받을 것도 생각나지 않았기에, 노구덕은 이 정도 선에서 퀸젤과의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퀸젤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받은 것은, 약 삼십 분에 이르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를 통해 얻어낸 단편적인 정보들. 허나, 이 정보들이 지닌 가치를 생각한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위원회의 가주급이 아닌 한, 위원회 고위층만 알고 있는 제한된 정보들을 손에 넣은 셈이었으니. 어쩌면 이중에 현재의 정국을 관통하는 어떤 열쇠가 있을지도 몰랐다.
퀸젤이 오늘 한 행동은, 단언컨대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그녀가 외인에게 극비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암만 그녀가 왕가의 직계손이라 할지라도 수위 높은 처벌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심한 경우엔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목숨을 구해준 대한 보답으로서, 퀸젤은 그와 비슷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의 의문을 풀어준 것이다. 화끈한 걸 좋아하는 그녀답다고 해야 할까. 빚지는 걸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대목이었다.
“후움, 그럼 대출혈 서비스도 끝났고… 노구덕 위원, 이제 우리 사이에 채무 관계는 없는 거겠지?”
“혹시 또 모르지. 채무란 없다가도 있게 되는 거니까.”
“끔찍한 소리하지 마셔.”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것 같은데? 들어보지.”
“…정말 눈치 하나는 귀신인데? 그게 연륜이라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을 표하던 퀸젤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어져있던 얼굴을 딱딱하게 경직시켰다.
“노구덕 위원, 우리 관계는 오늘로 끝이야. 아마 오늘 이후로 따로 이렇게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퀸젤의 목소리를 들은 노구덕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했다.
“…이별 선언인가?”
“그래. 이별이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처음엔 각광받던 당신을 키워서 내 가신(家臣)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제 그건 무리라는 걸 알게 됐어. 이대로는 노구덕 위원, 당신에게 끌려 다니기만 할 뿐이야. 목숨 빚까지 진 이상 절대 내가 입장의 우위에 설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래서야 주인과 객이 뒤바뀐 꼴이잖아?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빚은 다 해결되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형식적으로야 그렇지. 하지만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당신은 날 불편하게 만들어. 그게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야. 어차피 당신도… 내게 더 미련은 없잖아? 얻어낼 건 다 얻어냈으니까.”
단정 짓듯이 말한 퀸젤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석상처럼 굳어있는 노구덕을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안녕. 부디, 이 난세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기를.”
…이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서.
++++++++++++++++++++++++++++++
감옥. 어둡고 읍습하여 유령이라도 출몰할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의 감옥이었다.
감옥은 마치 거대한 새장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냉골 같은 한기가 스며있는 쇠창살로 겹겹이 둘러싸인 원형의 구조물 안에 죄수를 가둬놓는 구조인 것 같았다.
진한 기름 냄새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은 등잔불이 쥐꼬리만 한 빛을 밝히는 가운데,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쇠창살 사이로 격하게 움직이는 두 개의 그림자가 비쳐보였다.
“헉… 헉…!”
어두운 등잔불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의 정체는 한창 관계에 몰두하고 있는 두 명의 남녀였다.
허름한 감옥 내에서 유일하게 화려해 보이는 커다란 침대의 중앙, 왜소한 몸집의 사내 밑에 개처럼 엎드려 있는 여인의 표정은 인형처럼 공허했다. 그녀는 그저 기계적으로, 사내의 하반신이 격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생리적인 신음을 간간이 내지를 뿐이었다.
백옥을 빚어 만든 하얀 피부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지독한 상흔이 낭자해 있었다. 대개는 세게 깨문 이빨 자국이거나, 혹은 세게 손찌검을 당한 듯 낙인처럼 찍혀 있는 손자국들이었다.
철썩! 철썩! 철썩!
“허으으으……!”
문득, 엎드린 여인의 엉덩이에서 불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이던 사내의 하반신이 갑작스레 율동을 멈추고 바들바들 경련했다. 잠시 후, 바짝 결합한 두 남녀의 음부 사이로 허옇고 끈적한 액체가 주르륵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정(射精)이었다.
그 깊은 여운을 만끽하듯, 엎드린 여인의 등에 상체를 기댄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환한 금발을 신경질적으로 잡아채 들어올렸다.
“…쯧, 이제는 별 재미도 없군.”
“…….”
모발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인지, 줄곧 무표정하던 여인의 표정이 살짝 고통으로 찡그려졌다. 사내는 그런 여인을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이봐, 아가레스트.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잖아? 이왕 하는 거, 좀 같이 즐기면 서로 좋을 텐데… 어리석기는.”
“…….”
“허 참, 묵언수행도 아니고……. 하긴, 이 정도로 무너지면 천하의 안개여왕이 아니지.”
“…윽!”
작게 혀를 찬 사내가 쥐고 있던 그녀의 머리채를 짜증스럽게 밀쳐버리자, 금발의 여인은 그 완력에 밀려 힘없이 침대 구석으로 쓰러졌다.
거듭된 추행과 폭력적인 섹스로 터질 듯이 부어오른 그녀의 음부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사내는 그저 지나가듯이 가벼운 투로 말했다.
“…참, 그거 알고 있나? 이번에 에덴에서 안개여왕 아가레스트의 처형식이 집행됐다는군.”
“……!”
순간, 텅 빈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던 금발 여인의 얼굴에 비로소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깃들었다. 언뜻 보이는 그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사내는 그녀의 변화를 즐기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가레스트가 어떻게 죽었는 줄 아나?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어. 블러디핀드가 직접, 목을 뽑고, 팔을 찢고, 다리를 절단내버렸지. 마지막엔 시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핏가루로 만들어버렸는데… 북왕이 눈알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게 어찌나 우습던지. 푸흐흣!”
“…….”
“재밌기도 하지. 진짜 아가레스트는 여기 있는데. 고작 가짜의 죽음에 그 난리를 피웠단 말이야. 근데, 그토록 처참하게 죽은 가짜는 누구였을까?”
“가리… 발디…….”
쉬어버린 목청을 타고 원독어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사내는 전혀 아랑곳없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 넣었다.
“뭐, 마침 적당한 재료가 있었지. 체형도 비슷하고, 피부색도 엇비슷해서 대충 꾸미기가 쉬웠단 말씀이야. 혀를 자르고 이빨도 죄다 뽑아놨으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염려도 없고. 아, 조금 아깝긴 하더군. 그 계집, 너보단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조이는 맛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름이 이오라고 했었나?”
“…너, 너어어어—!”
“크흐흐흐…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이래야 할 맛이 나지. 아가레스트, 다시 즐겨보자고!”
늑대왕 가리발디는 광기어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분노에 치를 떠는 여인의 몸 위에 다시 올라탔다. 여인, 아가레스트는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평범한 여인보다 쇠약해진 그녀가 늑대왕의 완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차가운 지하 감옥 내부는 야수 같은 사내의 징그러운 웃음과 함께, 비통에 젖은 여인의 절규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up up up up up up up up 나는 기계다.. 나는 기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