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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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암약(暗約)
113# 암약(暗約)
이번 지구총회를 통해 새로이 십존에 오르게 된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도왕 티렐의 클럽인 판데모니엄에 몸을 담은 경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능력이 티렐과 엇비슷하게 비견될 정도로 가공하다는 것 정도였다. 실제로 티렐과 같은 반열에 이름을 올린 어스퀘이커 앵거스와 거의 동수를 이룬 전적도 있었으니, 아예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허영덕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구원의 빛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선을 대고 있는 군다르의 왕자 체스터의 심복이었으니까.
“오, 오오…! 유메르바인 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비에 젖은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허영덕의 얼굴에 금세 화기가 돌았다. 아직 체스터에게 연락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나타났느냐 하는 의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지금 이 절망적인 상황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카드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려 떨어지기 직전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격이었다.
“유메르바인 님! 이 무도한 놈들을 좀 보십시오! 서부 지구를 어지럽히는 이 날강도 같은 작자들을요!”
“허영덕 위원. 내가 분명히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한번만 더 입을 나불거린다면 그대로 장대에 꿰서 성벽 위에 걸어놓겠어요.”
“어, 어…?”
얼굴은 여전히 싱긋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예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벌했다.
얼른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허영덕이 멍청하게 입을 벌린 사이, 유메르바인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천천히 두 무리 사이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타 십존들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강자 특유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팡이로 땅을 더듬어가며 걷는 모습이 혹여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일정 경지에 오른 아이리스의 헌터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기분에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감지 능력이 뛰어난 안세희는 유메르바인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딸꾹질까지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눈에는 고요한 바다를 가장하고 있는 유메르바인의 진면목이 어설프게나마 엿보이고 있었다.
양의 탈을 쓴 암사자? 아니면 뱃속에 칼을 숨긴 냉혹한 살인마? 대체 무엇에 그녀를 비유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얼핏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해 보이는 이미지 뒤에,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성이 괴물처럼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 당신. 숙녀의 비밀을 엿보는 건 좋지 않아요.”
“…히끅!”
“뭐, 뭐하는 거예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코앞에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새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세희는 지그시 감겨 있는 그녀의 눈꺼풀을 마주 대하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깜짝 놀란 안세희가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딸꾹질을 해대자, 근처의 신소율이 사납게 눈을 치뜨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당신들, 꽤 귀엽네요. 여동생으로 삼고 싶어. 호호.”
신소율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지만, 유메르바인의 앞에 선 그녀의 두 다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지 이를 악물어 보지만,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는 떨림이었다.
그런 신소율을 보며 피식 실소를 터뜨린 유메르바인은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쳐 나아갔다. 그 다음으로 보인 것은 굳은 표정의 이두식과 박승찬, 그리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도일이었다.
“누님, 오랜만입니다.”
“격조했네요. 도일.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 제안을 뿌리치고 아이리스에 들어가다니, 조금 섭섭해요.”
말갛게 웃는 낯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서늘한 냉기를 품은 얼음송곳이 되어 도일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내고 있었다. 도일이 자기 제안을 뿌리친 것을 꽤나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 하하… 그게, 남자의 뜨거운 우정과 관계된 일이라서…….”
“그렇겠죠. 속 좁은 아녀자가 넓은 사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리 없죠. 이해해요.”
“그, 그게 아니라… 윽! 죄송합니다! 다음에 식사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됐어요. 상처 입은 제 마음은 고작 식사 한 끼 정도로 치유되지 않아요.”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그러나 도일은 이럴 때를 대비해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30년 산 ‘갈드루헨’ 브랜디. 메이커는 마이다스. 어떻습니까?”
무심히 지나치는 듯하던 그녀의 지팡이가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추어 섰다. 아마도 속내로 엄청난 갈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 뒤로 보이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떨림을 멈춘 그녀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최고의 브랜디에는 최고의 진미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분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레브의 최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죠.”
“호호호. 기대할게요.”
짤랑거리는 교소를 터뜨린 유메르바인은 퍽 만족스러운 듯, 작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아이리스 일행을 지나쳤다.
군다르의 정복자 갈드루헨의 이름을 딴 30년 산 브랜디는 부르는 게 가격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지닌 술이다. 그것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마이다스 브랜디라면 그 가격은 배로 뛰게 된다.
엄청난 출혈에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워하던 도일은 일행의 어처구니없는 시선이 모이자, 금방 표정을 원상태로 회복하더니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폈다.
“저 누님은 알아주는 애주가거든요. 고급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시죠. 후후. 어떻습니까, 제 인맥관리가?”
“…….”
자못 자랑스러운 말과는 달리, 그의 잘생긴 얼굴이 유난히 비통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기에, 일행은 말없이 도일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긴트의 헌터들은 유람하듯 느긋하게 걸어오는 맹인 여인을 긴장된 낯빛으로 응시했다.
말로만 듣던 십존의 출현이다. 기대했던 것만큼 흉맹한 기세를 떨치는 이는 아니었으나, 긴트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허영덕을 말 한마디로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권력이든, 무력이든 상관없이, 그녀는 틀림없는 강자였다.
탁.
띄엄띄엄 움직이던 지팡이가 정확히 두 무리의 중앙에서 멈추었다. 수천 명의 주목을 한 몸에 휘어잡은 유메르바인은 나비가 나풀거리듯 경쾌하게 몸을 틀더니, 저쪽 구석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허영덕의 낯짝에 경멸이 깃든 시선을 내던졌다.
“허영덕 위원. 당신에겐 정말 실망이에요.”
그녀의 끔찍한 폭언에 기가 죽어 있던 허영덕은 재차 이어진 그녀의 말에 도무지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대,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잘못? 진정 당신의 잘못을 모르는 건가요?”
“아니, 대체 무슨 당치도 않는 말을…! 대관절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제 잘못이라면 저 되먹지 못한 놈들에 맞서 긴트를 지키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유메르바인은 정말 원통하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허영덕의 태도에 피곤함이 묻어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둔한 사람 같으니. 아무래도 제가 좀 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뇌물 수수 170여 건, 살인 교사 17건, 납치 및 감금 30건, 권력과 금품을 동원한 부당 청탁 100여 건… 근 5년 간, 제대로 확인된 것만 이 정도네요. 3선 위원인 당신이니,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죄질은 더욱 심각하겠죠.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죽을 죄이긴 하지만요. 참고로 증거는 전부 가지고 있어요.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즉결처분이 가능할 정도죠.”
“……억…!”
두터운 허영덕의 턱이 세 겹의 주름을 만들며 목젖까지 늘어졌다.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은 봐주기에 불쌍할 정도로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잘도 나불거리던 입에 자물쇠라도 걸린 것일까. 애꿎은 입술만 붕어처럼 뻐금거리던 허영덕은 갑자기 필사적으로 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메르바인의 매몰찬 말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되었다.
“허영덕 위원.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지만… 당신은 좀 심했어요. 오늘 이 시간부로 당신의 위원직을 박탈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얌전히 이 자리에서 죽어주셔야겠어요. 여기, 그 명령서. 제대로 보세요. 위원회 직인이 잘 찍혀 있죠?”
“그, 그럴 리 없어! 이건 모함이다! 체스터 님께서 날 버리실 리가……!”
유메르바인이 붉은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들어보였음에도, 허영덕은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주머니 속에서 동그란 수정을 찾아냈다. 바로 체스터에게로 통하는 비상용 핫라인이었다.
“체스터 님… 체스터 님……! 제발, 제발…!”
허영덕은 체스터의 이름을 염불처럼 외우며 수정을 작동시켰다. 오로지 그것만이 지금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그를 구원해줄 유일한 수단이라는 듯이.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손에 잡힌 영상수정엔 빛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한껏 마력을 주입해도 빛을 잃은 영상수정은 컴컴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 이게 왜 이러지?”
당황한 허영덕이 핫라인을 부여잡고 온갖 용을 쓰는 것을 지켜보던 유메르바인은 지그시 이마를 짚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체스터 님이 한낱 범죄자를 일일이 상대해 주실 정도로 한가로운 분인 줄 알아요? 주제를 알도록 하세요.”
“그럴… 수가…….”
한 가닥 남은 자존심으로 겨우 지탱되고 있던 허영덕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부를 들춰버린 유메르바인과 아무리 해도 연결되지 않는 연락수정. 그가 처한 상황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그의 가장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었던 정치적 지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이치고는 혈색이 좋던 허영덕의 얼굴은 십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급격히 노화해버렸다. 동시에 그의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그만 실금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오줌에 절인 돼지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형은 뭐가 좋을까… 흠, 비린내도 싹 씻어버릴 겸, 화형이 좋겠네요.”
당사자 앞에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늘어놓는 유메르바인. 그러나 이미 정신줄을 놓아버린 허영덕의 귀에는 그녀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유메르바인은 그게 조금 아쉬웠던지, ‘아. 이러면 재미없는데.’라고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유메르바인이 지팡이의 끝부분을 바닥에 대고 장난치듯 톡톡 두드리자, 그녀의 주변에 무수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수십여 개의 불덩이가 생겨났다.
“이만 안녕이에요. 허영덕 위원. 내세에서는 적당히 해먹으시길.”
짤막한 인사말을 남긴 그녀가 실성해버린 허영덕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찰나, 중후하고도 묵직한 음성이 들려오며 그녀의 작은 귀를 토끼처럼 쫑긋거리게 만들었다.
“잠깐.”
그녀를 제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노구덕이었다. 유메르바인은 고개를 돌려, 감긴 눈꺼풀로 그를 응시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인계를 받아야지. 그놈을 죽이는 건 아직 시기상조요.”
그의 말을 들은 유메르바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구덕 위원의 능력이라면 굳이 인계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굳이 쉬운 길이 있는데 돌아서 갈 필요는 없잖소. 그리고 아직 선포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리 말하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하는 노구덕. 비로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유메르바인은 아하! 하고 지팡이를 딱딱 두드리더니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가 생각나는, 약간의 백치미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대로 천천히 몸을 돌려, 긴트의 헌터들에게 얼굴을 내보인 그녀는 일부러 가장한 것이 분명한 엄숙한 얼굴로 ‘선포’를 했다.
“…하나 깜박한 게 있는데, 아주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허영덕 위원의 박탈된 긴트 위원직은 이웃 도시인 칼립스의 노구덕 위원에게 위임됩니다. 여기, 그에 관한 명령서를 봐 주세요. 물론 위원회에서 직접 내린 인사명령이겠죠?”
유메르바인은 허영덕의 처우를 공표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얀 종잇장을 내보였다.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는 명령서의 말미엔 위원회의 직인과 더불어 군다르 왕가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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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 3연참 분량을 쌓아놨는데 일부러 이 시간에 올린 것은 내일 연재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ㅠㅠ
저번화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내일 많이 바쁠 것 같거든요..
아 참! 96# 이별과 만남 파트 첫머리에 아이리스가 이번 이적시장에서 풀 돈이 5천만 골드일거라 예상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설정 오류입니다. 5백만 골드로 수정했습니다. 당시 제가 돈독이 올랐는지 0을 하나 더 붙여버렸네요. 제보해주신 smxdmdmd 님 감사드립니다.
저번화에 리리플 달아놨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확인해 주세요! 혹시 추천 깜박하셨다면 겸사겸사 부탁드릴게요!
덧) 쿤다라님 쿠폰 감사합니다! 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덧) 요새 연재속도를 올리다보니 자잘한 오타가 꽤 많네요 ㅠㅠ 죄송할 따름입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