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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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암약(暗約)
경쾌하게 명령서를 읽어 내린 유메르바인은 더 질문할게 있냐는 듯, 멀거니 자기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상입니다. 이의 있으신가요?”
“…….”
위원회의 직인과 군다르 왕가의 문양이 찍힌 명령서다. 게다가 그 보증인은 십존의 일인인 파멸의 현자. 이의가 있을래야 있을 턱이 없었다.
다만, 의문점은 하나 남아 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칼립스의 위원인 노구덕이 긴트까지 관리하게 되었는가?
방관자가 되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황석문은 쉽게 그 뒷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군…. 허영덕만 나가리가 됐어.’
정황을 보아 노구덕은 이미 허영덕의 의원직 박탈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듯했다. 미리 유메르바인에게 언질을 받고, 위원회의 허가를 받았다면 그가 이토록 막무가내식으로 나온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상세한 배경까진 모르겠지만 허영덕이 끝장났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긴트도 끝장났군.’
각지의 군웅들이 할거하는 난세. 허영덕이란 우두머리를 모신 긴트가 과연 어디까지 갈지 걱정했던 그였지만… 이건 뭐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나 버렸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양떼처럼 꿇어 앉아 있는 헌터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석에 잘난 듯이 서 있었지만, 자신 역시 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처지라는 걸 상기한 것이다.
노구덕이 위원이 된 이후, 최근까지 앙숙으로 지내던 긴트와 칼립스다. 그런 노구덕이 긴트의 위원을 겸하게 되었으니, 긴트의 앞날은 불 보듯 뻔했다. 긴트의 시민들과 헌터들은 걸레짝처럼 쥐어짜져서 고혈이 빨릴 테고, 그 피땀은 고스란히 칼립스의 배를 불려줄 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암담한 미래였다.
‘노구덕 위원이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랄 수밖에…….’
도시 전체의 운명을 얄팍한 희망에 기대야만 한다는 게 참으로 서글펐다. 황석문과 도시연합의 간부들, 그리고 긴트의 헌터들과 시민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며 울적함에 젖어있는 그때, 어디선가 짝! 짝! 세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박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했다. 소리가 나는 곳은 성벽 아래 마련되어 있는 임시 단상이었다. 단상에는 지린내를 풍기며 널브러진 허영덕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 옆에는 어느새 거구의 오크, 노구덕이 올라 서 있었다. 딱딱 끊어지는 박수 소리는 그가 내고 있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이취임식을 겸하게 되었군. 보다시피 전임자는 이 꼴이 되었지만…….”
산송장이 되어 숨만 내쉬고 있는 허영덕은 노구덕이 바로 옆에서 말을 하고 있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지금의 그는 그럴싸한 껍데기만 남은 텅 빈 깡통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헐적인 기복만을 보이고 있는 노구덕은 천천히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단상 아래, 예기치 않게 상전이 바뀌어버린 긴트의 사람들이 의혹과 불신, 좌절이 담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적으로 뚜렷이 마이너스적 성향을 보이는 감정들. 그들이 특별히 허영덕을 좋아했던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허영덕은 그래도 지금까지 겉보기엔 별 탈 없이 긴트를 이끌어왔다. 말하자면 무난한 구관(舊官)인 셈이다.
아마도 그들은, 칼립스의 지배자인 노구덕보다는 차라리 허영덕이 나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러할 것이다.
노구덕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것은 체스터와 밀약을 맺고, 긴트를 손에 넣으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곧이어, 고동을 통한 것처럼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밀물과도 같이 장내에 스며들었다.
“너희들이 날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원망하는 자도 있을 테고, 속으로는 욕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연하겠지. 너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긴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고, 비겁한 뒷공작으로 긴트를 차지한 모략가이며, 한동안 소원했던 경쟁도시의 수장이니까.”
길게 서두를 늘어놓은 노구덕은 뚝 말을 끊고 형형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 내렸다. 그러자 일순 그와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했는지, 움찔 몸을 떠는 자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아마 앞서 그가 언급했던 것처럼,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일 터.
하지만 상관없었다. 저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애초에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들은 도구일 뿐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그의 가정, 그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더불어,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줄 발판이기도 하고.
그러나 도구나 수단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신망은 얻어야 한다. 이것은, 그를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별안간, 잔잔하게 퍼지던 그의 어조에 격한 고저가 깃들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의 전신에서 성난 파도 같은 기세가 일어나고,
“허영덕 위원이 버림받은 것, 그리고 파멸의 현자가 나타난 것. 이것은 전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조악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들도 헌터라면 똑똑히 느끼고 있겠지! 힘 대 힘의 대결에서 무참히 패배했다는 것을!”
노을빛 투기가 점점이 흩어져 일 천 군중의 숨통을 바싹 옥죄었다. 노구덕은 하찮은 개미새끼들을 보듯 오연히 서서, 무시무시한 위압으로 긴트의 헌터들을 압박했다.
“적어도, 긴트를 무릎 꿇릴 기회가 서너 번은 있었다. 최초로 내가 성벽에 올랐을 때 도시 수뇌부를 격살했었더라면! 성문이 돌파 당했을 때 3천 병력이 그대로 밀어닥쳤더라면! 룬메이커가 방어 주문이 아니라 공격 주문을 펼쳤더라면! 너희들은 지금과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모조리 다 죽었을 테니까.”
“너희들은 내게 패했다. 패자는 유구무언,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의 모습을 보라! 구차하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비를 구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고작 서넛의 헌터들에게 압도당해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린 패잔병들! 그게 너희들의, 긴트의 현주소인 것이다!”
단상에서 웅변을 토하는 노구덕의 눈에서 시뻘건 광망이 번뜩였다. 그의 기도에 압도당한 헌터들은 모두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죽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미 싸우기를 포기한 너희들에게, 현실을 불평할 권리는 없다.”
긴트의 헌터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치미는 짙은 무력감에 이를 악물었다. 노구덕의 입에서 튀어나온 구절 하나하나가 뾰족한 바늘이 되어 가슴어림을 따끔하게 짓쑤시는 느낌이었다.
노구덕의 말은 모두 옳았다. 긴트의 헌터들 또한 아이리스의 정예들과의 엄청난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실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아예 ‘격’이 다른 느낌이었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의문점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왜 그들이 성문에 난입했을 때 그렇게 느슨하게 싸웠는지. 그들은 일부러 사정을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전심전력을 다한 필사의 공격들이 그들에게는 식후 운동거리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니.
…그게 헌터들의 세계인 것이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력만으로는 극복이 되지 않는 세계.
으뜸가는 재능을 가진 헌터가 그저 그런 재능을 가진 헌터 천 명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세상. 그런 불합리한 공간이 바로 헌터들이 살아가는 스퀘어 대륙이다.
재능을 가진 이들만이 대접받는 세상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설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들은 호되게 꾸짖는 노구덕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 어쩌란 말이오!”
“항복하지 않고 궐기해서 끝까지 싸웠더라면 당신들을 이길 수 있었을 거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우리라고 이렇게 살고 싶은 줄 아냐!”
“네놈들이 뭘 알아! 그저 운이 좋아서, 온갖 재능을 타고난 너희들이 뭘 아냔 말이다!”
평생을 밑바닥에서 굴러먹으며 쌓여왔던 고충이, 그 응어리진 절망이 피 맺힌 절규가 되어 폐부를 비집고 뛰쳐나왔다.
“이, 이런…!”
일부 헌터들이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설움을 격렬히 터뜨리며 반발하고 나서자, 그것을 지켜보던 황석문의 낯빛이 급변했다. 그중에는 그의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헌터들도 있었던 것이다.
노구덕이 이를 구실 삼아 어떤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찰나, 담담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노구덕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암, 알지. 알고 말고. 모를 수가 없지.”
“무슨…! 당신이 대체 뭘…!”
“나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약 5년 전만 하더라도, 난 어떤 재능도 가지지 못한 쓸모없는 헌터였다. 노 탤런트(No talent)라고 들어봤나? 내겐 그 흔한 검술도, 마법도… 그 어떤 재능도 없었다.”
“……!”
“혹시 신문을 자주보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지도 모르겠군. ‘고춧가루 헌터’, ‘불알 사냥꾼’…. 그게 내가 스퀘어에 와서 얻은 첫 별명이었다. 레드고르곤이란 클럽과의 주스트에서 상대에게 고춧가루를 뿌리고, 불알을 걷어차서 이겨버렸거든. 푸흐흐흐…….”
잠시 그리운 옛 추억을 회상하듯, 노구덕은 먼 곳을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울분을 토해내던 헌터들은 그의 충격적인 고백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아연하게 벌려진 입술만 벙긋거릴 따름이었다.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칼립스 위원, 그리고 클럽 아이리스의 오너이기도 한 노구덕에게도 그런 흑역사가 있었다니. 이걸 믿어야만 하는 걸까? 아니, 그전에… 불과 4, 5년 전까지 아무런 재능도 없었던 헌터가 조금 전과 같은 무위를 보였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갈팡질팡하던 헌터들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노구덕의 말을 부정했다.
“허, 헛소리…! 재능이 없는 헌터가 어떻게 5년 만에…….”
“맞아. 우릴 물로 봐도 정도가 있지…….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아니, 잠깐만. 난 분명 들어본 적이 있어.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어떤 소도시에서 벌어진 주스트에서 상대에게 고춧가루를 뿌려 승리한 헌터가 있었다는 걸. 당시엔 꽤 화제가 됐었던 걸로 아는데….”
“나, 나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그 헌터가 오크라고… 그, 그럼 정말로?”
연맹위원인 마티아스가 직접 공증인을 선 데다, 많은 언론사에서 취재를 했었던 레드 고르곤과의 주스트는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여기저기서 그 사건을 알고 있다는 증인들이 속출하자, 긴가민가하던 헌터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건 진실과 상식의 괴리였다. 노구덕의 말은 진실이지만, 상식적으로 진실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저널이 공백인 헌터가 이토록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쿵!
웅성거리던 소리가 단번에 잦아들었다. 단상에서 발을 굴러 소요를 가라앉힌 노구덕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강해질 수 있었던 비결은 두 가지다. 알고 싶은가?”
“…….”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을 마주친 무수한 이들의 눈빛엔 힘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조금 전의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은 물에 씻겨나간 듯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노구덕은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했다. 드디어 수확의 계절이 임박했다.
“정제된 카름의 핵과, 고대 스퀘어의 비법인 오리지널이다. 더불어, 정말 죽을 만큼 노력하기도 했지.”
그러면 그렇지, 헌터들의 얼굴에 옅은 실망감이 감돌았다. 카름의 핵과 오리지널이 헌터를 강하게 만든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허나 다음 순간, 이어진 노구덕의 말은 헌터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원한다면, 너희들이 바라는 오리지널을 주겠다. 익히기만 하면 확실히 강해질 수 있는 상등급의 오리지널이다. 그리고 핵은 줄 수 없지만, 일단 가져오면 정제해 줄 수도 있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천의 고개가 높이 쳐들렸다. 거북이처럼 길게 목을 내뺀 헌터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들이었다.
노구덕은 태연한 얼굴로 수천 쌍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그리곤, 잠시 사그라들었던 존재감을 사방으로 줄기줄기 떨치며 우렁찬 호령을 내질렀다.
“긴트니, 칼립스니, 자질구레한 소속은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건 너희들의 충성심이다! 내게 복종해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들에게 염원하던 힘을 주겠다!”
하늘 높이 뻗친 그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추기경의 홀’이 들려 붉은색의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단체로 홀린 것처럼, 하염없이 단상 위를 바라만 보고 있던 헌터들의 머리가 일제히 숙여졌다. 오랫동안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갈증에 시달리던 그들이다. 이제야 비로소 해갈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힘. 적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그토록 바라던 힘. 재능이라는 저주받은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강력한 힘.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물며 목숨쯤이야!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목숨을 바치겠어요!”
“노구덕 위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일천의 인간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굴종했다. 그 막대한 영력이 전해진 듯, 벌레교단의 신물인 피의 홀이 더욱 진한 핏빛을 머금으며 스스로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추기경에서 교황(敎皇)으로.
바야흐로, 고대 피의 교단이 진정으로 부활하여 현세에 도래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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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역시.. 어제는 너무 바빠서 연재할 틈이 없었네요. 새벽화 투척하고, 오늘부터 다시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체스터와의 밀월 관계라든가, 위원회가 노구덕의 사병대를 허용해준 이유라든가 하는 건 바로 다음 화에 나올듯!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