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51)
0451 / 0777 ———————————————-
114# identity
티렐은 발레기우스의 두루뭉술한 표현에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에둘러 말하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정확한 시스템의 본질은 악(惡)에 가깝습니다. 신에 비유하자면 악신(惡神)이지요.”
시스템의 정체가 악신이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발레기우스는 어리둥절해 하는 이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언젠가는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좋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 이번에 진실을 아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진실이라…… 그동안 모르쇠로 일관해 왔던 것치고는 상당히 뻔뻔한 발언이군.”
“그야, 혹시 모를 배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입니다. 여러분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 목적이 다를지라도… 여러분이 원하는 건 시스템의 힘 아닙니까?”
계속되는 권태를 이기지 못한 자, 단순히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자, 위원회의 군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는 자, 세상의 평화가 아닌 혼란을 바라는 자… 발레기우스의 말대로, 이곳에 모인 이들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그 목표의식을 관통하는 큰 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역시 전지전능하다고 일컬어지는 시스템의 힘. 아홉 명의 마인들은 일제히 귀를 씻고 발레기우스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레기우스의 이야기는, 이 세계의 창조로부터 비롯되는 장황한 신화에 관한 것이었다.
태초에, 이 세계에는 관리자가 있었다. 이 이름 모를 관리자가 세계를 직접 창조했는지, 혹은 세계의 창조에 일부라도 기여를 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관리자는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절대자였다. 하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나서기를 싫어했던 것인지,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그저 오랫동안, 만들어진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관망했다.
수천, 수만 년이 지났을 무렵, 관리자는 이 세계에 자신도 모르는 거대한 힘, 혹은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순환(循環)이었다.
창조와 멸망의 사이클. 아무리 문명이 번영을 누리더라도, 세계가 정해진 틀을 벗어날 만큼 크게 융성했더라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멸망의 그림자를 막을 순 없었다.
전쟁, 재해, 역병… 재앙의 형태는 제각기 달랐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비슷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눈부신 문명은 폐허로 변했다.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세계는 크게 퇴보하여 그 번영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 무력한 광경을 지켜보던 관리자는 깊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는 매번 떼죽음을 맞이하는 생명들을 동정하고, 가엽게 여겼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순환의 법칙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순환의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관리자는 마침내 그 원리를 깨달았다.
멸망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원인은 업보(業報).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로부터 비롯되는 업보, 즉 카르마(Karma)가 일정치 이상 누적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재앙이 도래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세계가 멸망에 이르는 대재앙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 그의 능력은 전능에 가깝지만, 카르마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멸망의 순환 고리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고심하던 관리자는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을 내놓았다.
카르마가 쌓이는 걸 막을 수 없다면, 그 모든 악기(惡氣)를 한 데 모아 소모시키자.
그것이 관리자가 한 생각이었다.
카르마를 한 데 모아 누적시키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소모시킨다면 대재앙이 올 일도 없으리라. 비유하자면 정화시설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한 관리자는 원(元) 대륙의 일부에서 커다란 땅덩이를 뚝 떼어 또 하나의 대륙을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누적되고 있던 카르마 에너지를 오직 그 대륙에만 모이게끔 했다.
거기까지 일을 진행한 관리자는 다시 난관에 빠졌다. 카르마를 모아두긴 했는데, 정작 그것을 소모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스스로가 지진이나 해일 등 작위적인 재앙을 일으켜봤지만, 그런 짓은 누적된 카르마의 총량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관리자는 다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가 머리를 싸매는 동안, 새로 만들어진 대륙에선 나름대로의 문명이 생기고, 지성을 갖춘 인간을 비롯한 아인종들이 왕국을 일으키는 등 나름대로의 번영을 이루었다.
그때까지도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관리자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가 새로이 만들어낸 대륙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다시 수백 년이 흐른 뒤.
마땅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관리자가 언제, 어떤 형태의 재앙이 들이닥칠까 전전긍긍하던 그때. 대륙에선 생각지도 못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과도하게 누적된 악기에 영향을 받은 대륙의 동식물들이 흉포한 괴물로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아니, 카르마에 의한 이상 현상은 비단 동식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공기 같은 자연적 지형지물마저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전염병과 비슷하게 변한 카르마에너지는 종을 가리지 않고 기괴한 변종을 만들어냈다. 바로 카름(Kar’m)이라 불리는 변종 괴물들의 등장이었다.
관리자는 크게 당황했다. 원래대로라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어야 할 카르마 에너지. 그것을 인위적으로 한 대륙에 모아 놓은 게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큰 혼란에 빠진 대륙을 두고, 서둘러 대책을 강구하던 그는 또다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카르마에 오염된 생명, 즉 카름을 처치했을 시에 누적된 카르마가 일시적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돌파구였다.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저 괴물들을 꾸준히 처리할 수만 있다면, 처음 세웠던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변종 괴물들은 너무나 강력했고, 주(主)가 되어 괴물들과 맞서 싸웠던 신대륙의 인간들은 자력으로 괴물들을 퇴치할 힘이 없었다.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생명들을 지켜보던 관리자는 깊은 책임을 통감했다. 어찌됐든 죄 없는 그들이 목숨을 잃는 건 그의 탓이었으니까.
괴로워하던 관리자는 결국, 세계에 직접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괴물들을 처치할 힘이 없다면 그 힘을 주면 된다. 이곳의 인간들로 안 된다면, 다른 곳에서 전력을 끌어오면 된다. 이 세계의 업보,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차원의 인간들을.
그러나 카름의 퇴치는 이번 한번으로 끝내고 말 일이 아니었다. 카르마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이상, 카름의 퇴치도 꾸준히 반복되어야 할 일. 날뛰는 카름과 그가 불러들인 이차원의 전력들을 지속적으로 관리, 유지할 체계가 필요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관리자는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자신이 직접 그 체계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그의 능력이라면 그 막중한 책임도 능히 떠안을 수 있으리라.
스스로 신대륙을 통제하는 진정한 ‘관리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몸을 녹여, 광활한 의식의 형태로 세계에 스며들었다. 관찰자로서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신대륙 전체를 포괄하여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상만물을 하나하나 통제하고 감독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한 부담이었다. 초월적인 그의 정신력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정보량이 아니었던 것이다.
끝없이 가해지는 정신적 부하를 견디다 못한 관리자는 끝내 스스로의 의지를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의식을 짓누르는 부담을 나누기 위해 하나의 정신을 여러 조각으로 잘게 나누었다.
확고한 의지를 잃어버리고, 수천 갈래로 찢어져 공허하게 부유하는 신.
그것이 대륙을 관리하는 시스템의 정체였다.
“정말로 악취미이지 않습니까? 어떤 악신도 이보다 더 잔인하지는 못할 겁니다. 세상의 온갖 괴물들을 모아놓고, 그 안의 인간들에겐 피터지게 싸워 살아남아 보라며 가둬 놓다니… 북부에서 전래되는 독 중에는 고독(蠱毒)이라는 게 있다지요? 항아리 안에 갖가지 독물들을 모아놓고 한 놈이 살아남을 때까지 가둬놓는 수법 말입니다. 이와 별로 다를 것도 없군요.”
“이 대륙은 스퀘어라고 불리지만, 그 앞에는 생략된 단어가 하나 더 있지요. 셉틱 스퀘어(Septic square)…. 말 그대로 카르마를 정화하기 위한 정화조란 의미입니다.”
길게 이어지던 장광설이 끝났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였지만, 생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없었다.
모두들 경지에 이른 자들이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 질의를 한 티렐만 하더라도 시스템의 정체를 대강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크크크… 온 세계의 업보를 모두 떠안고 있는 하수처리장이란 말인가. 이 추잡한 대륙에 어울리는 이름이군.”
“뭐, 다들 예상은 하지 않았소? 그 정도 스케일이 아니고서야 이 기묘한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할 순 없지. 그런데… 블러디핀드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금제가 걸려 있다면서?”
가늘게 눈매를 좁힌 라키오라가 제법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발레기우스의 얼굴엔 어떤 동요나 당황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손을 들어올려, 무릎 위에 깍지를 낀 그는, 자신을 향한 빤한 시선에 새하얀 웃음으로 답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래요. 마도왕, 좀 전에 통제불능인 시스템의 힘을 어떻게 제어할 생각이냐고 물었지요?”
“…그렇다.”
“두 분의 질문에는 같은 답변을 해 줄 수 있겠군요. 간단합니다. 제가 수많은 조각으로 나눠진 신의 의지, 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자,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요?”
이어진 발레기우스의 대답은, 좌중을 일시지간 서늘한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다.
++++++++++++++++++++++++++++++
우드득!
회담 장소를 나선 가리발디는 신경질적으로 목을 꺾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발레기우스가 직접 밝힌 정체는 분명 충격적이었다. 비록 오래 전에 독자적으로 떨어져 나온 불완전한 존재였지만, 그 본인이 시스템의 일부라는 소리였으니까.
뭐, 그의 정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수백 년을 넘게 살아온 노물이니만큼 그보다 더한 신분을 숨기고 있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정작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그의 신분 따위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파편 쪼가리 주제에…….’
발레기우스의 말 몇 마디에 꼼짝 못하는 자신. 그리고 다른 십존들. 마치 수직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은 이 상황이, 그의 심화를 더할 나위 없이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갑자기, 예전 아가레스트를 범할 때 들었던 말이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러는 당신은, 주인에게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으면 여자 하나 맘대로 품을 수 없는 가련한 수캐일 테지요!’
“개소리!”
쾅! 강렬한 진각에 땅거죽이 뒤집히며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누구도… 어느 누구도 내 위에 서 있을 수 없다!”
붉게 충혈된 눈.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손에 피를 묻힐 듯, 사납게 이를 갈아붙인 가리발디는 막 발을 떼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벨트에 손을 가져간 그는 작게 진동하는 호출석을 꺼내들었다. 그의 오른팔, 로건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나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연락을 받은 가리발디. 다음 순간, 그는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흡 숨을 멈추었다.
“…찾았다고? 알았다. 곧 가도록 하지.”
연락이 끊어짐과 동시에 팽창했던 횡경막이 위로 올라가며 격한 숨이 토해졌다. 붉은 기가 어려 있는 그의 눈알에서 진한 광기가 엿보인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의 몸은 거센 소용돌이만을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에구.. 오늘 늦잠을 자서 좀 늦었네요. 다음화는 12시 전후로 올라갈듯 합니다! 오늘은 여유가 좀 있으니 늦지는 않을 거예요.. ㅠㅠ
스퀘어의 진짜 이름이 셉틱스퀘어라는 건 작품설정란 맨 윗줄에 있는 내용인데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음 에피소드는 늑대왕 관련 에피소드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대하시던..
리리플은 오늘 마지막화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 다음편을 쓰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