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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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광야의 혈전
117# 광야의 혈전
가을의 고즈넉한 정취가 한껏 깊게 스민 광야(廣野).
머리 위로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뿌연 달무리에 수줍게 얼굴을 숨긴 초승달 밖에 없는, 그런 밤이었다. 시간대를 봐서는 새벽 한 시, 혹은 두 시쯤 됐을까.
문득, 크게 바람이 일었다.
우스스스스….
거센 들바람에 못 이긴 풀잎들이 얕게 몸부림치는 소리가 흡사 처녀귀신의 호곡성처럼 구슬프게 들려왔다.
“추워….”
무리 중 누군가가 오돌오돌 몸을 떨며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안세희일 것이다. 낮에는 조금 더운 감이 있었는데, 막상 밤이 되니 옷을 껴입어야 할 만큼 공기가 차가워졌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니, 한창 일교차가 클 때다.
그러나, 유독 오늘의 밤공기가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날씨 탓만은 아닐 터.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화기(和氣)가 남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곤조곤 떠드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신소율과 박지현의 수다도, 도일과 헨더슨의 수더분한 넉살도 을씨년스럽게 휘감기는 바람 속으로 깊게 침잠했다.
말을 잃고 움츠러든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간혹 가다 들려오던 올빼미의 흐느낌도, 달빛 아래 짝을 찾아 헤매이는 귀뚜라미의 소성도 모두 깊은 밤잠에 빠져든 것처럼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니, 어쩌면 잠자리에 든 것이 아니라 겁에 질려 이 벌판을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야생의 동물들은 사람보다 감이 좋다고 하니까.
무리의 선두, 벌판 한 가운데 말뚝처럼 서 있던 노구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잿더미처럼 검게 물든 밤하늘 아래, 어렴풋하게 내비치는 달빛 사이로 거대한 새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야조(夜鳥)의 그림자는 무리가 있는 곳으로 급격히 활강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사람의 모습으로 화했다. 젤리로 빚어 만든 듯, 반투명한 물질을 대붕의 날개처럼 어깨에 매달고 있는 그는 ‘에테르 윙’, 박승찬이었다.
‘창공을 누비는 독수리’ 특성을 가진 그는 공중을 누빌 때 최고의 첨병이 된다. 정찰 임무를 맡아 나간 그가 돌아왔다는 것은, 즉.
“…그가 오고 있습니다.”
“음.”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노구덕의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주변에 늘어선 헌터들의 낯빛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나친 긴장은 독이라지만, 이만한 대적을 앞에 두고 어찌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수의근처럼, 그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늑대왕 가리발디. 거울의 숲을 벗어난 그가 친히 노구덕의 초대에 응해 이곳 전장에 왕림한 것이다.
그 막강한 존재감은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평소에 억누르고 있던 기세가 사정없이 뻗치고 있는 걸로 보아, 현재 그의 감정 상태가 얼마나 격해져 있는지 알 만했다.
“피부가 따끔따끔한데. 제대로 꼭지가 돌았나보군.”
“…그렇게 도발을 했으니까요. 당연하죠.”
“맞아. 맞아. 늑대왕한테 그렇게 막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니깐. 오너는 틀림없이 간이 두 개일 거야.”
“박지현 헌터,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겁니다. 모르시나본데, 오너는 그 서리여왕의 면전에 대고 똥갈보라고 욕한 전적도 있는 사람입니다.”
도일의 생생한 증언에 잔뜩 긴장해 있던 일행은 어이없는 눈길로 노구덕을 돌아보았다. 천하의 서리여왕에게 똥갈보라니.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에엑? 진짜에요, 그거?”
“아니, 왜 여태껏 숨겼어요?”
사방에서 질문과 감탄이 빗발치자, 노구덕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무사하니 됐잖아.”
“…그게 그렇게 구렁이 담넘듯이 넘어갈 일이에요? 하여튼. 나중에 꼭 말해줘요.”
“잊어버리시면 안 돼요. 주인님.”
“별 일 아니었다니까 그러네. …알았다.”
대충 말을 얼버무리던 노구덕은 신소율이 샐쭉하게 도끼눈을 치뜨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괜한 사실을 까발린 도일을 향해 엄한 시선을 던졌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딴청을 피우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구덕은 그의 밉지 않은 태도에 낮은 실소를 흘렸다. 어쨌든 도일 덕분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으니,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이렇듯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노구덕을 비롯한 일행의 눈은 저 광야 너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슬슬 보이기 시작한 까마득한 그림자를 뚫어져라 주시하는 중이었다.
‘…오는군.’
거리가 멀어 제대로 된 형체를 식별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너무도 강렬한 투기 탓에 그림자 주위의 대기가 망토처럼 펄럭이고 있는 것은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대륙에 많고 많은 이들 중, 세상에 저 정도로 막대한 투기를 다룰 수 있는 괴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저리 광포하게 기세를 뿜어대는 이가 늑대왕 가리발디말고 또 누가 있을까.
눈매를 좁힌 노구덕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가리발디의 주위를 살폈다. 눈에 띄는 자들은 네 명. 모두가 강맹한 기세를 떨치는 라이칸스로프들이었다.
‘혼자 오라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나마 늑대왕을 제외하고 네 명이면 그럭저럭 상대해 볼 만한 숫자다. 사방이 탁 트인 이 벌판을 전장으로 삼은 것은 일찌감치 늑대왕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다수의 수하들을 데리고 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물러나려고 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공교롭게도 그가 데려온 네 명이란 인원수는 노구덕이 상정한 상한선에 딱 걸친 숫자였다.
‘옆에 보이는 놈은 저놈의 오른팔인 로건이란 자일 테고, 나머지 셋도 루나틱스의 1군이로군.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저쪽의 전력은 늑대왕 가리발디와 프라임리그급의 헌터 네 명. 저 중 로건은 도일이나 박승찬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자랑하는 헌터다. 그 외 나머지 세 명도 사울로나 투르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꾸준히 프라임리그에서 성과를 보인 베테랑들.
개개인의 질로 따지자면 분명 저쪽이 우위였다. 하지만, 전력의 총합으로 보자면 이쪽의 양은 저쪽의 질을 넘어선다. 단, 늑대왕이란 미지수를 제외한다는 전제 하에.
“네놈이냐.”
귀 옆에서 번쩍 천둥이 내리치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늑대왕 가리발디와의 거리는 어느새 약 이백 미터까지 좁혀져 있었다. 이백 미터… 길다면 긴 거리지만, 상대가 늑대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안심이 되지 않는 간격이다. 조금 전까지 살짝 따끔거리던 살갗이 이제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려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말인즉슨, 아이리스 헌터들은 벌써 늑대왕의 범위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같잖은 수작으로 날 불러낸 놈이.”
“…….”
광망을 내뿜는 늑대왕의 두 눈은 밤중에 이글거리는 한 쌍의 도깨비불을 보는 듯했다.
이 광대한 벌판에 오롯이 그 혼자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아니, 하유라가 얼음, 임유진이 불로써 존재감을 피력했다면, 늑대왕은 순수한 투기의 색채로 이 공간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구덕은 그를 보며 전설로나 치부했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란 단어를 떠올렸다. 왜소한 작은 몸집이지만, 그 몸에서 발하는 위압은 실로 산천초목을 떨어 울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장난이 아니군.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어.’
김정인이 십존에 오르고, 임유진이 십존에 올랐다. 그리고 북왕 아이벤과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다. 주변에 워낙 인물들이 많아서일까. 예전,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경외의 대명사였던 십존이란 이름값이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었다.
겁도 없이 늑대왕의 목을 따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한 것도 그런 영향이 없잖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가리발디의 위용을 직접 목도한 순간, 노구덕은 솔직히 인정해야만 했다.
어쩌면, 자신은 터무니없는 객기를 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허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넘어서야 할 벽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성패는 내게 달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하늘이나 신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오직 믿는 것은 자신. 그리고 마음을 나눈 사람들 뿐. 일이 실패로 끝난 마당에, 최후의 변명으로 불운을 탓한다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지 않은가.
각오를 굳힌 노구덕은 말없이 성큼, 한 걸음을 내딛으며 늑대왕 가리발디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물리적인 눈높이가 아니라, ‘그릇’으로서의 눈높이를.
“그래. 나다.”
“감히…!”
“크르르르르!”
대뜸 던져진 반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늑대왕을 수행한 네 명의 헌터들이었다. 사납게 털을 곤두세운 그들은 금방이라도 노구덕의 목줄을 움켜쥘 것처럼 흉포한 울음을 토해냈다.
허나, 정작 늑대왕 가리발디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백 미터. 노구덕과 아이리스 헌터들의 얼굴이 훤히 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멈춰 선 그는 좀 전의 흉포한 기세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양, 힘없이 입매를 터뜨렸다.
“‘나’라……. 그래, 그래. 제법 배짱이 있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나? 응?”
늑대왕 가리발디의 얼굴엔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비웃음어린 눈으로 노구덕을 포함한 아이리스 헌터들의 면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이는군. 룬메이커, 에테르 윙… 그쪽은 혼돈의 정령사인가? 비트레이에서 본 적이 있었지. 제 언니를 꼭 빼닮은 얼굴이야. 한꺼풀 벗겨 보고 싶은 계집이군.”
도일과 박승찬의 몸이 주춤거리고, 아픈 기억을 꼬집힌 소피아의 표정이 마뜩찮게 일변했다.
“다른 떨거지들도… 어설프지만 그래도 이빨은 나 있는 것들이군. 빗대자면 개미 정도… 인가. 물리면 꽤 아프겠어.”
박지현, 신소율, 안세희, 이두식, 헨더슨… 모두의 얼굴 근육이 불쾌하게 씰룩였다. 꼭 ‘누가 떨거지야?’라고 되묻는 듯하다.
그러나 늑대왕은 그에 아랑곳없이 두 팔을 널찍하게 벌렸다.
“저만한 인원, 그리고 이 장소. 밑에 깔린 트랩들만 해도 거의 백여 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과하하하핫…!”
신나게 웃다가 뚝, 멋대로 입을 다문 늑대왕은 시퍼런 살광을 일으키며 노구덕을 질타했다.
“벌레 같은 놈. 정당한 대결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정말 수준이하로군. 쓰레기라 부르는 것도 아까울 정도야. 겨우 이 따위 조잡한 함정으로 이 가리발디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씨팔놈. 쫄려서 네 명이나 데리고 온 주제에 큰소리치기는.”
은근하게 달아오르던 공기에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졌다. 늑대왕과 그 수하들은 물론이고, 노구덕 주변에 있던 헌터들마저 잠깐 얼이 빠진 얼굴들이었다.
“이놈이 지금 뭐라고…?”
대놓고 쌍욕을 처먹은 늑대왕의 얼굴이 악귀처럼 흉악하게 변했지만, 한번 고삐가 풀려버린 노구덕의 주둥이는 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네놈도 이것저것 재보다가 나왔을 거 아니냐. 유진이가 있었다면 절대 그 인원으로 기어 나오진 않았겠지. 그런 놈이 무슨 이제 와서 실망했다, 어설프다? 에라, 이 개새끼야.”
“이, 이놈이…….”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아가레스트에 대한 일이 위원회로 흘러드는 건 뒤가 켕겼나보지? 하긴, 그게 터지면 반군에서의 입지도 많이 좁아질 테니까 똥줄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겠지. 곱창 타는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이 새끼야. 정당한 승부는 개뿔. 꼬우면 도로 돌아가든가.”
어버버거리며 이놈만을 연발하던 늑대왕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뚜둑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위엄이고 나발이고, 이런 욕지거리를 얻어먹고 그냥 참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었다.
“죽여버리겠다–!”
“오냐, 바라던 바다.”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튀어나간 두 남자가 광야 한복판에서 세차게 격돌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노구덕.. 간만에 초년차때의 날건달 모드가 발동했네요.
가리발디와의 싸움은 이것저것 꼬는 것 없이 곧바로 대장전이 되겠습니다. 자고로 남자의 싸움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참… 예전 코멘 중에 십존들 나이가 궁금하시다는 독자분이 계셨는데, 답변해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ㅠㅠ
십존들 나이는… 죄송하지만 대략적으로 작품에서 보이는 정도로만 짐작해 주시길! 그렇게 상세한 설정까지 파고 들어가면 작가는 머리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양해부탁드려요!
오늘도 3연참을 달릴지 2연참을 달릴지는 모르겠습니다.. 가게 사정은 제 임의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어쨌든, 좋은 하루 되시고!
잊고 계신 추천이나 물어볼 말이 있으시면 코멘 달아주세요! 대략적으로 답변해드릴 수 있는건 후기에, 리리플은 오늘 마지막화에 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