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71)
0471 / 0777 ———————————————-
119#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일단은… 소피아, 네 말대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
“…….”
그의 말이 떨어지자, 두 여인의 얼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안세희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늘어뜨렸고, 소피아는 당연한 판단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노구덕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가레스트의 아이를 내 아이로 둔갑시킬 생각은 없다.”
“네에?”
이건 좀 의외였던지, 소피아는 토끼 같은 눈을 크게 치뜨고 노구덕을 바라봤다. 더불어, 낙담하여 목을 떨구었던 안세희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살짝 턱을 치켜드는 게 보였다.
노구덕은 말 한마디마다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두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해득실을 따지자면 소피아, 네 말을 따르는 게 옳겠지.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위원회의 한 축을 집어삼킬 수 있으니까.”
“그렇…죠. 저는 주인님께서 직접 위원회의 심처에 개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주인님께서도 그걸 원하시리라 짐작했고요….”
“네 생각이 맞다. 확실히, 난 위원회가 숨기고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일원으로서 편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려고 하시죠?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소피아의 불퉁하게 바람이 들어간 볼은 그렇게 항변하고 있는 듯했다.
“유아나 다름없는 아가레스트를 살살 구슬려 날 따르게 하고, 뱃속의 아이를 내 자식으로 한다…. 나쁘지 않은 계책이다. 네 말대로라면 아이는 확실히 트랑키아의 혈통을 타고날 테고, 아가레스트와의 관계는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지.”
“…네. 팔콘에서는 안개여왕의 정확한 구출 시기를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말이다, 그녀가 낳은 자식이 라이칸스로프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나와 아가레스트 사이에서 라이칸스로프 아이가 나올 가능성은 없다. 반면, 저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수인이 태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높지.”
“…….”
소피아의 새하얀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끼듯 작게 일렁였다.
그녀 정도 되는 책사가 이런 오류를 알지 못했을 리 없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흘러드는 소피아의 잔념만 봐도 그렇다. 이를 악물고 있을지언정, 그녀에게선 당황스러운 빛은 찾아볼 수 없다. 노구덕의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아가레스트가 낳을 아이가 어느 종족으로 태어날지는 예상하기가 어렵다. 해금이 풀리고 나서의 첫 세대. 지금까지 대륙에 유례가 없었던 혼혈이 태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아이가 수인이 아닐 경우와 수인일 경우. 전자는 앞서 얘기한대로 가면 되는 것이고, 후자는…… 유예 기간을 좀 더 늘리면 된다. 다시 말해서 앞서 태어난 아이를 배제하고, 정말로 노구덕과 그녀의 아이를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다. 유예 기간을 1년으로 하든, 2년으로 하든… 어차피 팔콘에서는 알 길이 없으니까.
눈여겨 볼 점은 또 있다. 소피아가 제안한 계책은 어디까지나 아가레스트의 상태가 이대로 쭉 ‘지속’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만약 노구덕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소피아는 아가레스트의 정신이 다시 회복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동원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정말 냉혹하고 비정한 계책이다. 새삼 소피아의 출신 성분을 돌이켜보게 만들 정도로. 아이리스에서는 많이 온후해졌지만, 비트레이와 라이오넬에서의 소피아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의 대가였으니까.
다행인 것은, 그녀 또한 자신의 계책이 남들이 볼 때 도덕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하기 전에 안세희를 의식한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계책을 내긴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성이 마모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노구덕은 그것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피아는 어디까지나 노구덕, 그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 주었을 뿐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오로지 그의 몫.
여기서는, 소피아의 변호를 해 주는 편이 좋았다. 차후 안세희와 소피아의 관계가 껄끄러워진다면 아이리스로서도 손해다. 주저하는 소피아의 등을 억지로 떠민 것이 노구덕 그이니만큼, 책임을 확실히 져야만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가레스트 왕녀가 정신을 차릴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우리 생각대로 따라줄 지는 알 수 없지. 무려 오라클의 총수를 지냈던 여자니까, 분명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거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면부지의 여자가 낳은 자식을 내 아이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내키지 않을 뿐더러, 그러면 너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이건 이해득실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겠지요.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노구덕의 의도를 눈치 챈 소피아는 순순히 ‘실수’를 시인했다.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무언의 대화가 오고갔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안세희는 그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할 뿐이었다.
“저… 오너. 그러면 이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아까 말했듯이 우선은 두고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정신이 멀쩡해 질 수 있도록 도와야하겠지. 그편이 가장 이상적이니까. 아이 문제도 우리가 어떻게 하기 보다는,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니까….”
“저희가 이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사람의 정신과 관련된 문제는 내가 살던 지구에서도 쉽게 다룰 수 없는 문제였다. 이쪽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한 명 있으니까. …아니, 보기에 따라선 두 명이 될 수도 있겠군.”
머리를 갸우뚱하던 안세희는 별안간 크게 손뼉을 쳤다.
“전문가라고 하시면… 아! 혹시 데모나 언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의학적 지식이라면 아이리스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사람이 데모나다. 수준급의 사제인 안세희 또한 데모나에게서 의학과 해부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니까. 또한 그녀는 사람의 정신, 영혼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주술의 달인. 전문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안세희의 생각과는 달리, 노구덕이 처음 떠올린 이름은 데모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데모나는 차선책이다. 데모나의 지식은 아무래도 정신보단 신체 쪽에 편중된 느낌이 있거든. 최선책은 따로 있지.”
거기까지 말하자, 이번엔 잠자코 있던 소피아의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알 것 같네요. 여기 있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분…?”
노구덕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듯 어리둥절해하는 안세희를 보며 피식거리는 미소를 매달았다.
“그래. 브리트라라면 아가레스트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도를 알지도 모르지.”
++++++++++++++++++++++++++++++
노구덕에 의해 아가레스트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최선책으로 지목당한 브리트라.
그녀는 무려 천 년을 살아온 신수이며, 각종 환술과 정신간섭 등 정신계 주문에 능통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비록 최근에 이르러서는 힘의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위엄 넘치는 이미지가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연륜과 해박한 지식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문가들 중 분명 최고로 칠 만했다.
그러나 이 모든 가정도 브리트라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을 때 성립되는 얘기다. 정작 노구덕이 찾아간 그녀는 완강히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중이었다.
“싫다! 거부한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느냐! 이 몸의 거룩한 체면은? 이, 이 몸의 숭고한 위엄은? 모두 나락 끝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에게 거룩한 체면과 숭고한 위엄이 있었던가…….’
노구덕은 부들부들 경련하는 이불 뭉치를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빼애액 소리 지르는 걸 무시하고 들어갔더니,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다.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 짓는 걸 용케 알아차린 듯, 한 데 덩어리진 이불이 격노한 것처럼 높이 쳐들렸다.
“무얼 잘했다고 한숨을 내쉬는 것이야! 그게 사죄를 하러 온 사람의 태도인가!”
“그럼 너도 얼굴이라도 보여줘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게 사과 받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잖냐.”
“으… 나, 난 이미 맨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그렇다고 평생 그거 뒤집어쓰고 살 거냐? 네가 오줌지린 걸로 뭐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부, 불가항력이었다! 이 몸이 본체였다면 절대 그런 추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조악한 인간의 육체 때문에…!”
노구덕은 필사적인 브리트라의 자기변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 그렇지. 애초에 네가 본체였다면 그런 잔챙이 라이칸스로프에게 위협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다. 다 이해한다.”
“그… 그렇지?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럼. 그렇고말고. 네가 그렇게 약해진 데에는 주인인 내 책임이 크다.”
실상 브리트라의 힘의 원천인 심장을 쏙 빼먹은 것이 노구덕 자신이었던 만큼,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노구덕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고 나서자, 브리트라가 뒤집어 쓴 이불이 꽤나 기쁜 듯 덩실덩실 움직였다. 언제나 구박 당하던 처지가 반전되어 노구덕을 나무랄 수 있는 위치에 서자 무척 흥이 오른 듯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어깨춤이라도 출 기세다.
“에헴. 그대는 좀 더 반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까딱하면 내 모, 목이 잘릴 뻔하지 않았느냐!”
기고만장한 와중에도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부들부들 몸을 떠는 브리트라. 확실히 그때는 정말 위험하긴 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어떻게 됐지? 꽤 깊게 베였잖아. 잘 아물었냐?”
“당연한 소리를! 검은 뱀의 회복력을 우습게보지 말거라!”
“어디 보자. 내가 흉이 안 지는 약을 가져왔거든. 예쁜 목에 혹시라도 흉터가 남으면 곤란하니까.”
“오오, 그래? 알았다. 그런 거라면…….”
브리트라는 희희낙락하며 깊게 뒤집어 쓴 이불을 걷어냈다. 앙증맞도록 작은 발목과 얇은 잠옷을 걸친 하반신이 드러나고, 그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간 상의와 그 사이의 귀여운 배꼽이 보이려는 찰나, 부산스럽던 이불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멈추었다.
“…….”
“…….”
두 사람을 끼고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휑하니 드러난 발가락이 불편하게 꼼지락거리는 순간, 노구덕은 번개같이 손을 뻗어 황급히 셔터를 닫는 브리트라의 이불을 확 들춰버렸다.
그러자 풍성한 백금발이 휘날리는 동시에, 앳된 얼굴에 온갖 인상을 쓰고 죽어라 이불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는 브리트라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노구덕은 번쩍 올라간 이불 귀퉁이에 대롱대롱 기를 쓰고 매달려 있는 브리트라를 보며 어이가 없는 듯 머리를 내저었다. 이 이불이 무슨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인지. 어린애들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우이이잇!”
“그만 놔라. 이불 찢어진다.”
“우으으으으읏!”
“이거 찢어지면 네 밥값에서 변상할 테니 그리 알아라.”
“너, 너무해.”
진이 빠져버린 브리트라는 망연자실하여 침대에 주저앉았다. 요 며칠 간 방구석 폐인생활을 하던 왕뱀을 드디어 끄집어내는데 성공한 노구덕은 우울하게 무릎을 감싼 채 쪼그려 앉은 브리트라를 설득했다.
“이번 건을 해결하면 원하는 건 뭐든지 먹을 수 있게 해주마.”
“…….”
어림없다는 듯 픽 고개를 돌려버리는 브리트라. 마치 ‘이 몸이 언제까지 먹을 걸로 움직이는 줄 아는 거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자 노구덕의 눈매가 실처럼 가늘게 변했다.
‘요놈 보게?’
마냥 바보인 줄 알았더니, 이제는 제법 밀고 당길 줄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의 오공이었지만.
“유진이한테 식사준비를 부탁해 볼 수도 있는데…….”
쫑긋. 브리트라의 작은 귀가 펄떡이며 움직이는 게 보인다.
“공교롭게도 환자가 너와 비슷한 증상이라서 말이야. 이 건을 해결하면 네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줄곧 그를 외면하던 브리트라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그렇잖아도 퇴행해버린 정신은 브리트라의 큰 고민거리였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심장을 되찾는 것이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상 차선책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미적지근하게 입술을 꾸물거리던 브리트라는 정말,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알았다….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한번 보도록 하겠다.”
“잘 생각했다.”
“앞서의 조건… 틀림없이 이행하리라 믿겠다.”
“그야 당연하지.”
확답을 받아낸 브리트라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며칠 간 농성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쉬운 함락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111111111111111111111 오늘도 한번 달려보겠습니다.
전편에 달아주신 코멘트는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이런 식의 선택지에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는 매번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주인공의 선택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부제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막장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 비해 계산적이고 냉혹하게 변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