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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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덮쳐오는 그림자
121# 덮쳐오는 그림자
늑대왕 가리발디의 처형. 그리고 거울의 숲의 함락.
얼핏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반군이지만, 실상 이 두 가지 사건이 반군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적었다.
이번에 빼앗긴 거울의 숲은 반군 내의 세력권이라기보다는 늑대왕의 독자적인 영지였고, 그 안의 주민들도 여타 대도시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숲의 부족들이다. 땅덩이 크기로 본다면야 상당한 손실이지만, 실질적인 타격은 그리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그리고 병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나틱스가 멸망하고, 영지에 주둔해 있던 병력들이 대부분 지리멸렬했다지만 그 또한 가리발디가 육성한 사병대가 대부분. 따지자면 이번에 피해를 본 것은 온전히 ‘가리발디의 세력’일 뿐이라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반군의 피해가 제로라는 것은 아니다. 가리발디의 독립 세력이라곤 해도 결국 그 소속은 크게 보자면 반군. 거사를 할 때부터 함께했던 육마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은 결코 쉽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가리발디… 쩝, 근래 어쩐지 조급해보이더라니, 그렇게 가버렸구려.”
동양풍의 장삼을 걸친 중년인, 폭풍왕 라키오라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잘 된 일 아녜요? 거울의 숲에 처박혀서 식인(食人)을 일삼는 늑대새끼들 때문에 깎아먹은 이미지가 얼만데요?”
“흠,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라키오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말끝을 흐렸다. 최근에 가리발디가 거느리는 라이칸스로프들의 흉포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건 사실이나, 악명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바이올렛이 이미지 운운하는 게 기가 찼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파멸의 현자에게 당했다고 하던데……. 앵거스,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좌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던 발레기우스는 티렐의 옆에 있는 앵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앵거스는 과거 유메르바인과 십존위를 걸고 싸웠던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으니.
그로부터 지목을 받은 앵거스는 달갑잖은 기억을 떠올린 듯, 두툼한 턱살을 씰룩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장님 계집애라면… 가능성이 있지. 그 계집, 나와 싸울 때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뜻밖의 비사를 듣게 되는군. 십존위가 걸린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건… 파멸의 현자가 예상보다 강할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흥, 그래봐야 풋내기죠. 발레기우스 님께서 명만 내려주신다면, 언제든지 그 계집의 목을 가져오겠어요.”
신중한 눈빛을 보이는 티렐과,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을 치는 바이올렛. 비슷한 성질의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인데도 이처럼 성격이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사람이었다.
“허, 꼭 파멸의 현자의 목이 제 주머니에 있다는 듯이 말하는구려.”
“…라키오라, 그 말은 내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는 얘기인가요?”
“오오, 서리여왕과 동수를 이룬 그 실력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소? 그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요 주둥이가 내뱉은 소리라오.”
싸우고 싶지 않다는 듯 급히 손사래를 친 라키오라는 불거져 나온 입술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방정을 떨었다. 그 꼴이 누가 봐도 비꼬는 모습인지라, 바짝 약이 오른 전갈처럼 고개를 치켜든 바이올렛의 눈이 뾰족한 세모꼴로 변했다.
“지금 해보자는 거예요?”
“워어, 싸우기 싫다는데 이거 왜 그러시나.”
“바이올렛. 라키오라. 그만들 합시다.”
발레기우스의 눈총을 받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입을 다물었다. 육마 중 가장 말이 많은 라키오라와, 세 악인 중 가장 성격이 더럽고 입이 험한 바이올렛이 회의 때마다 다투는 건 이제 평범한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을 중재한 발레기우스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앵거스에게 눈을 돌렸다.
“앵거스. 파멸의 현자에 관한 이야기, 좀 더 듣고 싶군요.”
“별다른 건 없다.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하게 느꼈을 뿐이니까. 그저 그 계집이 알려진 것보다 더 음험하다는 것 정도라는 말 밖에는….”
“그렇습니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발레기우스는 조금 힘이 빠진 얼굴이었다.
위원회의 치부를 온 대륙에 폭로하고, 내부 분열을 조장시켜 결국 그 강대한 하나의 세력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았다. 거기에 더해, 수많은 연맹 위원들을 학살하고 신궁 클라리스의 목을 베었으며, 안개여왕 아가레스트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카멜롯을 파괴하고 위원회의 주축 멤버 중 한 명인 마리우스를 암살하기까지.
그야말로 흔들기면 흔들기, 뒷공작이면 뒷공작,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동원했다. 이만하면 무너질 만도 하건만, 위원회라는 괴물은 쓰러질 듯 말 듯 비틀거리면서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좀 더 앞당겨야 할 것 같군요.”
“…….”
침중한 표정의 발레기우스가 계획이란 단어를 꺼내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일변했다. 그가 내보인 ‘계획’이라는 말에는 그만큼 무거운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좀… 이르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늑대왕이 죽었고, 안개여왕의 신병을 탈취당했습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전선에 복귀한다면 적들에게는 또 하나의 강력한 전력이 생기는 셈이죠.”
“글쎄. 어차피 전력은 저쪽이 우위다. 우리가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는 것도 그 때문이고. 거기에 아가레스트가 추가된다고 해도 별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라키오라와 앵거스 또한 티렐의 말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에 서리여왕 하유라, 처형자 최훈, 융펠의 대사제 우르슬라, 도살자 이정한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들은 지금 사방으로 흩어져 위원회의 전력을 서서히 갉아먹는 게릴라 전술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술을 쓰는 까닭은 단 하나, 정면대결로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 아니던가.
“그렇지요. 하지만 저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흐트러진 내부 결속을 다시 잇느라 전열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연방 체제라는 새로운 기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전력을 쏟아 부을 수 있다는 말이죠.”
팔콘 가주가 주도한 각 왕조의 독립은 위원회가 주도로 한 반군의 일망타진 계획을 몇 걸음이나 뒤로 늦추었다. 허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 단일 세력에서 벗어나, 연방이라는 신체제로 다시 뭉친 위원회의 칼날이 반군을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으음…….”
“거울의 숲은 그 서막이었을 뿐입니다. 다들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걱정 마시길.”
흑요석처럼 뚜렷한 검은자위를 씰룩인 발레기우스는 뱀처럼 간교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전쟁, 절대로 패배할 일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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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파하고, 아직 빈자리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회장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후드를 뒤집어 쓴 채 금빛 안광을 내보이고 있는 마도왕 티렐과 여전히 상좌에 앉아 있는 흡혈왕 발레기우스가 그들이었다.
기분 나쁜 고요를 음미하듯, 티렐의 어두침침한 후드 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서서히 숨결이 흩어지는 기척과 함께 의미심장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뜻밖이군. 당신이 날 따로 보자고 하다니.”
“특별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린 같은 목적을 공유한 동지인데요.”
발레기우스가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친근히 말을 건네자, 후드 속에서 뿜어지는 안광이 가로로 길쭉하게 변했다.
“그런 상투적인 말로 시간 낭비를 하자는 건 아니겠지?”
“성미가 급하시군요. 하긴, 그런 실용적인 태도가 당신의 좋은 점이기는 하지만요. 항상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간과하는 점을 짚어줄 때가 있거든요.”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을 생각인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발레기우스를 재촉하는 티렐의 어투에는 그에 대한 경계심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조금 전 회의에서 발레기우스가 제시한 ‘계획’. 그 세부내용의 실체는 대략적인 개요를 알고 있었던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 정도로 주도면밀한 것이었다.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야 이런 계획이 가능한 것일까. 티렐은 발레기우스란 인간… 아니, 그 존재에 대해 터무니없는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스스로 완벽에 가까운 인간이라 자부하고 있던 그 자신이 초라해질 정도.
‘그렇기에, 뛰어넘을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레기우스는 언제나처럼 속을 읽어낼 수 없는 얼굴로 얘기를 꺼냈다.
“늑대왕의 일은 안됐습니다.”
“그런 것치곤 별로 슬퍼하는 얼굴은 아니군.”
“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는 제게 있어서도 조금… 골칫덩이였다고 할까요.”
“통제가 힘들었다는 소린가?”
“설마, 통제라니요. 오해할 말은 삼가 주십시오.”
티렐은 발레기우스의 느물거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 자신이 상전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그에게 반감을 느낀 십존들은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늑대왕 가리발디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해 아예 눈 밖에 난 케이스였고.
“그래서, 여기서 같이 가리발디의 애도나 해주자는 건가?”
“하하.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티렐…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드리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내게 도움이 되는 정보?”
“그렇습니다. 혹시… 아이리스의 노구덕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
티렐의 로브가 흠칫하는 떨림을 보였다. 아이리스와 노구덕. 이제는 대륙에서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클럽과 인물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을 발레기우스가 티렐에게 물었다는 것. 거기엔 또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날… 감시하고 있었나?”
“감시가 아닙니다. 그쪽은 제가 먼저 눈독을 들인 물건이라서요. 다른 개입의 흔적이 있길래 역추적을 해보니, 당신에게 다다랐을 뿐이죠.”
티렐의 후드가 마뜩찮다는 듯이 펄럭였다.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으나, 후드 속의 그는 꽤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눈독을 들인 물건이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말 그대로입니다. 노구덕, 그에게는 묵은 빚이 있지요.”
“지금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건가?”
“아아. 경고까지는 아닙니다. 강제할 생각도 없고요. 오히려… 충고를 해 드리는 겁니다.”
“충고?”
“그렇습니다.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면, 방심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조심하는 게 좋아요. 섣불리 다가갔다간 반대로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티렐은 도통 발레기우스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로선 레드레인이나 룬메이커, 에테르 윙 같은 쟁쟁한 실력자들을 제치고 노구덕, 그를 조심하라는 발레기우스의 충고가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노구덕, 그가 바로 늑대왕을 죽인 인물입니다. 그것도, 거의 일대일의 싸움이었지요.”
“…….”
티렐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잃어버렸다. 노구덕… 마지막 경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칼립스 리그의 최상위권에 랭크되었던 헌터다. 현재는 헌터라기보다 연맹위원, 클럽의 오너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고.
그런 인물이 늑대왕 가리발디를 잡아냈다? 일대일로?
하지만 발레기우스의 진지한 분위기로 봐서는 농담처럼 들리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할 인물도 아니었고.
잠시 후, 차분함을 되찾은 티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고, 고맙군. 할 말 다 끝났으면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예상외로 별로 놀라지 않은 것 같군요.”
“…상관없겠지. 그가 어떤 인물이든, 나와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은 없을 테니까. 당신의 먹잇감에 손을 댈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다.”
“흐음?”
떠나기 직전, 잠시 발걸음을 멈춘 티렐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내가 원하는 건… 다른 쪽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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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 편입니다. 빠르면 12시 전후. 조금 늦으면 새벽즈음에 올라갑니다.
리리플은 다음화에 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