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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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예정된 위기
깊은 땅울림이 지면을 강타하며 거대한 충격이 신전 일대를 뒤흔들었다.
땅거죽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강한 진동이 발을 타고 전해졌지만, 티렐의 꼭두각시는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균형을 잃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안광을 더욱 형형하게 빛내며 은은한 노기를 드러냈다.
“웬 놈이냐?”
조금 전까지 또렷하게 전달되던 그의 음성이 파리 날갯짓이라도 섞인 양 웅웅 울리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마력전달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
그 원인은 방금 전의 충격파에 있었다. 정체 모를 충격은 티렐이 이 일대에 펼친 마력 결계의 근원을 정확히 타격하여 근방을 완전히 장악한 그의 마력을 크게 흐트러뜨렸다.
티렐이 펼친 마력결계는 결계 안의 존재들을 말살하는데 주안을 둔 종류가 아니라, 내부 공간을 외부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결계였다. 그가 마음먹고 펼친 말살형 결계였다면 고작 이 정도 충격에 흔들리지는 않았을 터.
그러나 티렐을 당황케 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결계를 뒤흔든 충격이 외부가 아닌 결계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즉, 결계 안에 그와 소냐 말고도 아직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제삼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저쪽인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잠깐 사이에 훼방꾼의 마력을 감지해낸 티렐의 시선이 신전의 옆, 우거진 덤불 속을 향했다.
“없애주마.”
우두커니 서 있던 불의 꼭두각시가 느닷없이 손을 내젓더니 덤불 쪽으로 시뻘건 불길을 쏘아 보냈다. 승천하는 이무기처럼 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불길은 흉포한 화마(火魔)로 돌변하여, 앙상한 덤불을 송두리째 먹어치워 버렸다.
제법 큰 면적을 통째로 날려버렸음에도, 꼭두각시의 번쩍이는 시선은 좀처럼 그곳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비쳐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신이 불길에 휘감겼음에도 멀쩡하게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타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인간이 아니로군.”
나직하게 중얼거린 불의 꼭두각시는 곧 직접 몸을 날려 괴인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꼭두각시의 양손은 용암을 찍어 바른 것처럼 매서운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는데, 먼젓번 길포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버닝핸드(Burning hand)로 상대를 찍어 누를 심산인 것 같았다.
허나 이번엔 수수께끼의 괴인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느긋하게 불길 속에서 걸어나온 괴인은 꼭두각시가 휘두르는 버닝핸드를 무식하게 몸으로 맞받더니, 근접한 꼭두각시의 안면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버렸다.
콰앙! 안면이 터져나간 꼭두각시가 지면에 처박히며 육중한 울림이 전해졌다. 더불어 괴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이 세찬 풍압에 벗겨져나가며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서늘한 빛이 감도는 강철의 육체는 섬세한 장인이 무쇠를 두들겨 빚어낸 것처럼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양 팔과 양 다리는 얼핏 보기에 노구덕과 비슷한 우락부락함을 보이고 있었으나, 실상 그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목구비를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얼굴. 괴인에겐 얼굴이란 것이 없었다. 일견 황소처럼 투박해 보이는 괴인은 티렐의 짐작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골렘(Golem)?”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꼭두각시의 눈빛이 새우처럼 가늘게 변한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피잉!
후방에서 나타난 한 줄기 붉은 벼락이 꼭두각시의 심장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꼭두각시가 미처 반응할 틈을 주지 않은 신속한 일격이었다.
술자가 원거리에서 조종하는 골렘, 꼭두각시들은 반드시 마력을 전달받는 핵이나 전송장치가 필요하게 마련. 놀랍게도 티렐의 꼭두각시를 기습한 벼락은 꼭두각시의 핵을 정확하게 관통하여 마력의 맥을 끊어버렸다.
그 바람에 꼭두각시의 손에 매달려 있던 소냐는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윽!”
한 차례 바닥을 구른 소냐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찾아온 탈출의 기회를 가만히 흘려보내는 바보가 아니었다.
소냐가 그 작은 발을 놀려 도망치자, 금세 기운을 회복한 꼭두각시의 후드 속에서 섬뜩한 안광이 일어났다. 바람의 마력을 일으킨 꼭두각시는 무서운 외침을 토해내며 그녀의 뒤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어딜…!”
그러나 티렐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의 꼭두각시를 고꾸라뜨린 골렘이 쿵쿵거리며 달려와 그대로 바람의 꼭두각시를 들이 받아버린 것이다. 그 압도적인 괴력에 휩쓸린 꼭두각시는 실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 신전 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학! 학!”
그 틈에 꼭두각시로부터 멀찍이 달아난 소냐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대를 둘러싼 티렐의 결계를 벗어날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마도왕 티렐이 펼친 결계가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 아케인센스를 총동원해 탈출구를 물색하던 소냐는 끝내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결계 어딘가 진의 근원을 이루는 중심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야만 해. 아까 전의 충격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합!”
생각에 골몰하던 소냐는 별안간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들썩거렸다. 갑자기 차가운 손길이 떡하니 그녀의 어깨에 올려진 때문이다.
“얘야.”
“……!”
제 이모인 소피아와 똑 닮은 토끼눈을 한 소냐는 작은 입술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녀보다 약간 높은 키를 가진 북슬북슬한 털복숭이였다. 지저분하게 돋아 있는 수염 안쪽에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짓무른 시선과 눈을 마주친 소냐는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흐끕!”
“너무 놀라지 말거라. 난 널 도우려는 사람이다.”
“누, 누구십니까?”
나이에 비해 의젓한 소냐가 한순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털복숭이… 아니, 노인의 행색은 기괴했다. 지나치게 길러 지저분하게 뭉친 머리카락과 수염은 물론이고, 구릿빛 얼굴에는 번데기보다 많은 주름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 언뜻 보기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낙타처럼 등이 굽은 꼽추였다.
당장 거리를 나가 돌아다닌다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두가 피해 다닐 것 같은 괴이한 몰골.
그러나 소냐는 진물에 가득 잠긴 노인의 누릿한 눈에서 어렴풋한 선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노인은 티렐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낸 의문의 조력자가 분명했다.
“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내 골렘으로 놈의 꼭두각시들을 잠깐 무력화시켜놓긴 했지만, 오래가진 못할 게다. 그 전에 이곳에서 탈출을 하든지, 외부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나 혼자서는 저놈들을 이길 수 없어.”
노인의 말에 새삼 자신의 급박한 처지를 자각한 소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시시콜콜 따져 물을 시간은 없었다.
아마도 티렐의 꼭두각시들은 마법에 강한 대신, 물리적 충격에는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것 같았다. 장하나와 그녀의 주문은 어렵지 않게 투과시킨 것에 비해, 노인이 다루는 골렘에는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다만, 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골렘으로서도 꼭두각시들의 완전한 제압은 어려운 것 같았다.
“결계의 중심… 아까처럼 그 중심을 흔들 수 없을까요? 결계가 흐트러진다면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겁니다.”
“연락수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나도 처음에 결계를 부수려고 했지만, 내 능력으로는 무리였다. 계속 두들겨 댔으면 모를까… 저놈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 …음!”
노인은 짧게 침음했다. 저 멀리서 골렘에 의해 땅에 처박혔던 두 꼭두각시가 스멀스멀 일어나 다가오는 게 보인 탓이다. 그가 조종하던 골렘은 조금 전 두 꼭두각시처럼 바닥에 파묻혀 있었다.
“…이 결계의 중심은 신전의 앞마당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근방에서 마력이 모여들고 있어.”
“그럼 어떻게…….”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내가 어떻게든 저 두 놈을 막아볼 테니, 결계 쪽을 부탁하마. 할 수 있겠니?”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거의 모든 마력을 잃어버린 지금 상태로는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냐는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못 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노인도 그녀의 상태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단번에 티렐이 펼친 결계의 중심을 알아차릴 정도로 안력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처럼 궁지에 몰린 처지에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천천히 하도록 해라. 무리하지 말고.”
막 달음박질을 하려던 소냐는 갑자기 가슴 한쪽이 울컥거리는 것을 느꼈다. 장하나나 길포드도 그렇고, 이 수수께끼의 노인도 그렇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오로지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었다.
어떤 계산이나 이해타산적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다. 오직 순수한 선의와 염려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아이리스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철저히 손익을 따져 타인을 대했던 소냐로서는 이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소냐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작은 심장을 따스하게 적시는 한 줄기 온기를.
그래서 분했다. 이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도망쳐야 하는 현실이, 스스로의 무력함이 전에 없이 사무치도록 분하게 느껴졌다.
소냐가 들끓는 마음을 끌어안고 신전 앞마당으로 달려가는 동안, 털복숭이 노인은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두 꼭두각시의 앞을 홀로 막아섰다.
그의 뒤로 열심히 뛰어가는 소냐의 뒷모습을 일별한 티렐은 태연히 눈길을 거두었다. 소냐의 상태를 뻔히 알고 있는 그였으니, 소냐가 결계의 중심으로 간다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수법은 조금… 낯이 익군. 너는 발레기우스와 무슨 관계지?”
“그 더러운 배교자와 티끌만 한 관계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진작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배교자? 영문 모를 소리군. 어쨌든 발레기우스와는 별 관계가 아니란 말이겠지.”
“그렇다.”
두 꼭두각시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끄덕 움직였다. 이전에 발레기우스에게서 노구덕을 눈독들이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그다. 혹시나 이 괴상한 노인이 발레기우스가 심어둔 끄나풀이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기우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별 문제는 없겠군. 하지만 그 전에, 네 이름을 알고 싶다.”
“내 이름은 울펜이다.”
“울펜.”
티렐은 그의 이름을 기억 속에 되새겼다. 생전 처음 보는 특수한 아이언 골렘을 조종하고, 한순간이지만 그의 눈을 피해 숨어 있다가 허를 찌른 실력. 그래봐야 꼭두각시 두 개체를 겨우 감당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눈요깃감은 되었으니, 이름을 알아둘 가치는 충분했다.
“울펜. 널 죽이고 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받아가겠다.”
“흘흘.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울펜의 주름진 눈언저리는 미미한 잔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미 앞서 골렘을 조종하느라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했다는 뜻이리라.
그 허세를 간파한 티렐의 안광이 흡사 비웃는 것처럼 짧게 깜박였다. 그 뒤, 몸에 각기 불과 바람을 휘감은 두 꼭두각시는 울펜을 향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잊혀졌던 그분.. 등장.. 노구덕이 최초에 울펜을 만났던 것이 딕툼 근처의 레귤러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시면, 지금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겠죠? 이 노인네가 그동안 뭘하고 지냈을까요?
티렐과 소냐, 아가레스트가 엮인 이번 에피소드는 다음 한두화 이내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제가 저녁에 약속이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는데.. 만약 12시 즈음 한편이 더 올라간다면 약속이 없는 것이고, 감감 무소식이라면 저녁 약속이 생겨 술을 먹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 이번화에 저번화 리리플이 달리겠지요..
아무튼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_ _ 작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