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9)
0049 / 0777 ———————————————-
12# 티라녹의 마굴(魔窟)
“차아아앗!”
예리하게 번뜩인 섬광이 광신도의 단단한 두개골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뇌 속까지 얼어버린 광신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통이 끊어졌다.
“키아아악!”
동료가 맥없이 죽어 나자빠지자 분노한 광신도 하나가 사마귀처럼 낫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이시클을 회수하느라 생긴 빈틈을 노린 공격이었지만, 신소율은 당황하지 않고 왼손에 든 글래시어를 비틀어 광신도의 낫을 비스듬히 흘려보냈다.
“어엇!”
반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러운 흘리기. 관성을 이기지 못한 광신도의 몸이 앞으로 미끄러지자, 은색의 검광이 여지없이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후욱, 후욱!”
신소율은 절단면에 하얗게 서리가 낀 광신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전황은 여전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전방과 후방의 전투가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서 광신도 서넛을 한번에 찍어 누르는 김정인과 일행의 후미에서 붉은 색의 마력줄기를 사방으로 뻗어내어 광신도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임유진의 활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뒈져라! 좀!”
“큰형님! 돕겠습니다!”
“아냐!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후방은 임유진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노구덕은 전방에서 간혹 하나씩 흘러 들어오는 놈들을 상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다만, 광신도 하나를 상대하는데도 보기 위태로울 만큼 치열하다는 게 문제였다. 보다 못한 이두식이 지원을 하려 했지만 노구덕은 팔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이두식은 만일을 위한 히든카드였다.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언제 라이칸스로프의 피가 깨어날지 몰랐다. 이처럼 정신없는 와중에 이두식이 폭주라도 하면 그건 전멸의 지름길이었다.
“……프로즌 실드(Frozen shield)!”
“덜떨어진 오크 가죽아, 단단한 나무껍질이 되어라! 나무 피부(Wooden skin)!”
“우왁! 이, 이거 뭐야? 피부에 나무껍질이 돋고 있잖아!”
“일시적인 거니까 닥치고 받아들여! 동조술 때처럼 정신을 집중해!”
그나마 노구덕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광신도들을 상대로 연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시기적절하게 이어지고 있는 윤희지와 데모나의 전투지원 덕분이었다.
전방은 김정인, 후방은 임유진이 광범위하게 틀어막고, 그 사이로 빠져 나오는 녀석들은 노구덕이 쳐낸다. 그리고 중앙의 윤희지와 데모나는 마법과 주술로 전투지원을 맡았다. 신소율은 그 기동력을 살려 간간이 보이는 빈틈을 메우는 프리롤 역할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두식은 최악을 대비한 조커. 이것이 현재 아이리스의 진형이었다.
마굴에 첫발을 딛었을 때만 하더라도 멤버들은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 산산조각이 난 건, 마굴에 들어온 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 냄새라도 맡은 것일까? 일행은 얼마 걷지도 않아 사방에서 미친개처럼 몰려드는 광신도들과 마주해야 했다. 팔다리가 터져나가도, 동료가 죽어도 몸을 사리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광신도들의 행태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마굴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광신도들의 파상공세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마굴에 있는 놈들은 모조리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돌보지 않는 전투방식이 조금 까다로울 뿐, 하나하나 놓고 보자면 그다지 강한 놈들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요!”
후방을 커버하던 임유진은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일행 중 가장 광범위한 지역을 도맡고 있는데다, 그녀의 전투스타일상 마력 소모가 상당했다. 이대로라면 ‘교구장 티라녹’과 마주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압력을 실은 검을 휘둘러 광신도의 머리통을 형체도 없이 짓뭉개버린 김정인은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소리쳤다.
“데모나! 나무로 쉘터(Shelter)를 만들 수 있겠어?”
“시간이 필요해!”
“어느 정도?”
잠시 고민하던 데모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십오 분. 그 정도면 될 거야.”
“좋아. 지금부터 간격을 좁힙니다! 데모나를 중심으로 원진을 유지하세요! 희지 씨! 당분간 후방 위주로 지원합니다!”
“알았어요!”
임유진의 부담을 덜어주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윤희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왼손으로는 지팡이를 세우고, 오른손으로는 마치 책장을 넘기는 듯한 시늉을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녀는 바쁘게 책장을 넘기는 중이었다.
심층 세계에 만들어 놓은 마법사의 서고(Wizard’s library)에서 마침내 바라던 주문을 찾아낸 윤희지의 눈이 서슬 퍼런 빛으로 물들었다.
‘찾았다!’
“어스 월(Earth wall)!”
시동어와 함께, 바삐 움직이던 손가락이 재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쿠콰콰콰콰!
지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며 그 속에 자리하던 암반이 지상으로 융기했다.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어진 울타리는 임유진과 광신도 무리 사이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놓았다.
“크캬캬아악!”
이지를 상실한 광신도들은 무턱대고 달려들다 갈라진 지면에 몸이 끼어 처참히 으스러지는가 하면, 솟아오르는 바위에 대고 정통으로 박치기를 해서 나자빠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고마워!”
윤희지 덕분에 한숨을 돌린 임유진이 한결 기운찬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하자, 윤희지 또한 스태프를 흔들어 화답해 보였다.
“좋았어.”
체내에서 여유로이 휘도는 마력을 확인한 윤희지는 차오르는 자신감에 스태프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주스트 당시의 그녀라면, ‘어스 월’ 한번이면 맥을 못추고 탈진했을 터였다. 하지만 윤희지는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해 있었다. 여타 마법사들보다 수배에 달하는 마법을 머릿속 서고에 저장할 수 있는 ‘주문 사서’는 책장의 마법을 기억해 내는 방식으로 보다 빠르게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클래스였다. 대신 그 위력은 정식의 80%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즉발에 가까운 마법시전’은 그 정도 단점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메리트였다.
시간이 지나자 데모나의 주문도 완성되었다. 그녀는 히드라에게 저주를 걸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팔목을 그어 피를 내었다. 상당히 많은 피가 빠져나간 탓인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어둠 속에서 요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숲 속의 안식처!”
그늘진 눈의 데모나가 피처럼 붉은 입술을 힘겹게 달싹이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어스 월이 시전되었을 때처럼 땅이 과자처럼 부서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거대한 나무뿌리가 그 속을 파고든 때문이었다.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순식간에 그 키를 쑥쑥 늘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의 주위를 둥글게 둘러쌌다. 마치 우화에 등장하는 마법의 콩나무 같았다.
“크에에엑!”
“끼기기기기긱!”
나무에 가로막힌 광신도들은 미친 듯이 발광하며 날카로운 쇠붙이들로 나무껍질을 두들겼지만, 비쩍 마른 고목들은 보기보다 매우 단단했다. 낫으로 베거나 도끼로 찍어도 겨우 작은 생채기가 생기는 수준이었으니, 안식처에 남아 있던 적들마저 정리한 멤버들은 겨우 안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휴! 저놈들 저거, 틈 사이로 손 내미는 것 좀 봐. 무슨 좀비영화가 따로 없네. 유진아, 빨리 앉아서 쉬어.”
“후우……. 네.”
전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임유진은 바로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조금이나마 소모한 마력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쉬지도 못하고 치열한 전투를 지속한 멤버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지쳐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아예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이두식과 큰 주문의 사용이 없었던 윤희지뿐이었다.
“데모나 언니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고마워요, 언니.”
핏기 없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 쉬고 있던 데모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신소율을 쳐다보곤 힘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말 시키지 마. 어지러우니까.”
“헤헤. 미안해요, 언니.”
말끝마다 야무지게 언니언니 붙이는 것이 평소의 신소율 그대로였다.
“아직까지 특별히 길이라 할 만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가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길만 봐서는…… 현재 있는 곳은 집회를 위한 거대한 회장 같습니다.”
“마굴 전체가 공동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랬다면 마굴을 돌아다니는 ‘교구장 티라녹’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김정인, 윤희지 등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는 이들은 쉬는 와중에도 마굴 공략을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일행의 제일목표는 ‘교구장 티라녹’을 처치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60% 이상의 달성률을 보장받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놈들, 머릿수만 많지 죄다 허수아비들이야. 아직까지 강한 놈들은 나오지 않았어. 정인아, 마굴에 대한 자료를 조사할 때 봤던 내용 기억하냐?”
“헌터 하우스의 자료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 그거 말고. 도서관 자료 말이야. 이놈들 무슨 교단이라고 했지?”
“벌레교단(the Insect brotherhood)이요. 특이한 이름이라서 기억하고 있어요. 거기서도 별 도움 되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대답은 윤희지에게서 나왔다.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놈들은 벌레를 숭배하는 미친놈들이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제 생각난 건데, 티라녹이라는 놈이 교구장이라며. 교구장이라는 건 한 교구를 담당하는 우두머리거든. 그러면 그 아래로 그놈을 보좌하는 주교라든지, 신부 같은 것들도 있을 거란 말이지. 이놈들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그게 더 말이 되지 않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아니, 종교 단체를 이루고 있다면 그게 당연했다. 노구덕의 말을 들은 윤희지는 크게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티라녹의 정보를 얻어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등한시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맞아요……. 휴우, 역사책을 좀 더 찾아볼 걸 그랬어요. 그러면 당시 마굴에 있었던 인명록이라도 어쩌면 알 수 있었을 텐데요.”
“그거 알아서 도움될 거 하나도 없다. 역사책에 이놈은 이런저런 능력을 쓰니 조심하시오. 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조심…….”
투콰아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력한 충격이 고목들로 이루어진 쉘터를 강타했다. 어지간히 받은 충격이 큰 듯, 고목들은 가지가 부서질 듯 위태로이 출렁였다.
우수수 흔들리는 고목들을 본 노구덕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끝맺었다.
“…해야 될 것 같다. 지금 이거, 티라녹일까?”
“나가보면 알겠지요. 다들 준비하십시오.”
십 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휴식이었다. 김정인을 필두로 일행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데, 한쪽에서 가벼운 현기증이 이는지, 머리를 짚고 비틀비틀 일어선 데모나가 쉘터의 중앙에 섰다.
“잠깐 기다려. 저놈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안겨줄 테니.”
쿠우웅!
두 번째 충격이 전해졌다. 갈라진 나무기둥 사이로 들개처럼 바글거리는 광신도들이 보였다. 멤버들은 모두 긴장하여 무기를 들고 처음과 같은 대열을 갖추었다.
그 중앙에서, 데모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손을 짚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서로 단단하게 얽혀있던 고목들이 마치 사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물에 빠진 다리를 들어 올리듯, 땅속 깊숙이 박혀 있던 뿌리가 뽑혀져 나오고, 옆나무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가지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데모나는 일행들을 둘러싸고 있던 고목들이 모두 뽑혀져 나온 것을 확인하자, 머리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얕은 뿌리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던 고목들이 일제히 바깥쪽으로 무거운 몸을 눕혔다.
쿵! 쿵! 쿵! 쿵!
“캬아아아악!”
그것은 밖에서 호시탐탐 안으로 진입할 기회만을 엿보던 광신도들에게는 거대한 재앙이었다. 고목 하나가 쓰러질 때마다 적게는 열, 많게는 수십의 광신도들이 그 아래에 깔려 죽어나갔다. 압사를 피하려다 저들끼리 뒤엉켜 그대로 피곤죽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적들도 가만히 깔려 죽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이놈드을–!”
천둥 같은 고함과 함께, 막 광신도들 위를 덮치려던 고목이 장작개비처럼 절반으로 쪼개졌다.
반으로 갈라진 나무줄기로 사이로 육중한 거구의 사나이가 드러났다. 그는 눈구멍만 뚫려 있는 투박한 강철투구를 뒤집어쓰고 자기 몸집만한 자이언트 액스(Giant axe) 둘러메고 있었다. 고목을 찍어낸 것은 바로 저 무지막지한 무기인 듯 했다. 굳이 저 비대하리만치 큰 몸집이 아니더라도, 저런 흉물을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역을 침범한 더러운 이단자 놈들! 이 우타마가 모조리 머리를 찍어주겠다!”
도끼를 든 사내가 광포한 포효를 내질렀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표지를 바꿨습니다. 작품설정란에서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윤희지의 클래스가 신화구현자에서 주문사서로 바뀌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생각한 이전 클래스는 스펙이 너무 사기같아서요..
장마와방 / 고기방패도 맷집이 되어야…
티렌 / 넵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오는비 /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