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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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마왕과 소녀
나날이 커져만 가는 연심을 숨기며 바지런히 교육과 훈련에 임하던 어느 날, 안세희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크래들타운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정인과 윤희지의 전격 이적. 그 대상 클럽은 대륙의 정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라이오넬이었다.
탈 없이 아이리스를 이끌어 오던 김정인이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온갖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노구덕, 신소율, 임유진 등 아이리스 헌터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하나 같이 무섭도록 심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떠나기 직전의 김정인과 윤희지, 노구덕의 사이는 노골적으로 찬바람이 쌩쌩 휘날릴 정도였던지라, 일개 군식구인 그녀가 끼어들 계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여하튼, 김정인이 그렇게 떠나면서 소녀의 가슴 아픈 첫사랑은 피어 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애초에 그의 곁에는 윤희지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으니, 용기를 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힘겨운 이야기를 마친 안세희는 목이 말랐던지 탁자에 놓여 있는 물컵에 손을 가져갔다.
“…흔한 얘기지? 이제는 나도… 마음은 접었지만, 한 사람의 헌터로서는 정말 존경하고 있어.”
소냐는 아련한 홍조가 떠올라 있는 안세희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말로는 정을 뗐다고 하지만, 진한 여운이 감도는 그녀의 표정에선 과거의 애끓는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인 걸까?’
이성을 사랑한다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얼핏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어쨌든, 안세희를 위해서라도 나중에 소피아에게 김정인이 아이리스를 떠난 이유를 넌지시 물어보기로 작심한 소냐는,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 검술 재능이 Lv6이라고 들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응? 아, 그런 말이 나오긴 했어. 아무래도 워낙 압도적이다보니까…. 하지만 직접 저널을 보지 않으면 그런 건 알 수가 없잖아?”
“언니 생각은요?”
헌터들에게 있어 Lv6이란 재능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미지의 영역이라 평가받고 있다. 스퀘어 역사에 있어 Lv6의 재능을 가졌을 것이라 추측되는 이들은 모두 그 시대에 한 획을 그은 최강의 헌터들이었다.
김정인의 재능을 그 역사적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안세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Lv6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내린 재능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일 거야. 순수하게 검술로만 경지에 오른 사람이니까.”
“…그렇군요.”
“대답이 됐니? 궁금한 거 있으면… 후아아암…?”
상냥하게 되묻던 안세희는 갑자기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했다. 다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지만, 찔끔 새어 나온 눈물마저 감출 순 없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으음… 이상한데…….”
“과다출혈인 것 같습니다. 피로하시면 좀 쉬도록 하세요.”
“그럴 리가… 아, 안되는데… 으으응…….”
자꾸만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로 치뜨며 저항하던 안세희는, 끝내 수마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맥없이 침대 귀퉁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 와중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다소곳하게 엎드린 그녀에게서 이내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소냐는 곁에 마련되어 있는 담요를 안세희의 등에 가지런하게 덮어주었다.
“…죄송합니다.”
-예의가 바른 아이구나.
“쓸데없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메아리처럼 웅웅거리며 들려온 사내의 음성. 그러나 소냐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냉랭하게 코웃음을 지으며 목소리의 잡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그녀의 반응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소냐의 지난 행동거지에 일일이 점수를 매기며 평가를 했다. 꼭 마음에 드는 상품을 품평하는 것처럼 거슬리는 내용들이었다.
-진홍의 성녀였던가? 좋은 판단이었다. 항마력이 높은 상대에겐 어쭙잖은 주문보다는 수면제가 더 잘 먹히겠지. 일부러 상대를 당황시켜서 수면제를 탄 것도 괜찮은 전략이었고. 너 같은 어린아이가 저런 수면제를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소냐는 보기 좋게 통통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안세희를 당황시킬 만한 질문들을 연달아 던져 틈을 만들고, 그 사이 그녀가 마실 만한 물속에 약성 강한 수면제를 섞어 넣었다. 짐작대로 장광설을 늘어놓은 안세희는 컵에 입을 댔고, 예상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분명 그녀가 의도하고 계획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목소리’에게 일일이 평가를 들으니 매우 신경이 거슬렸다.
“…당신과는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후후. 꽤 까칠하군. 내 짐작이 맞다면 검왕에 대한 질문… 단순히 진홍의 성녀를 방심시키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를 의식하고 있는 건가?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흠. 상관없겠지. 따라갈 목표가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소냐의 초승달 같은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의문의 목소리가 그녀의 속내를 정확히 짚어낸 탓이다.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는 극에 이른 마도(魔道)의 힘으로 오롯이 대륙을 오시하는 것. 스스로의 비정상적인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냐에게 있어, 동류(同流)로 여겨지는 김정인이 세운 업적과 행적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당신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호오?
“마도왕 티렐. 궁극의 힘을 추구하는 마법사들을 모아놓은 클럽 판데모니엄의 오너 겸 리더로, 약 20년 간 십존의 자리에서 군림했다지요. 현존하는 거의 모든 갈래의 주문에 능통하며, 즐겨 사용하는 마법은 보랏빛의 파괴광선인 데스레이. 현재는 흡혈왕 발레기우스가 주축이 된 육마의 일인으로서 반군을 이끌고 있고요.”
-누구나 알고 있는 개략적인 정보로군.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목소리. 그러나 소냐의 입을 통해 밝혀진 목소리의 정체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도왕 티렐. 두 개체의 꼭두각시를 부려, 소냐의 납치를 주도했던 원흉이 버젓이 아이리스의 심장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실체가 아닌 미약한 염체(念體)의 형태라 할지라도, 아이리스의 철통 보안에 구멍이 뚫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정황을 보면 그를 불러들인 것은 다름 아닌 소냐, 본인인 듯했으니… 노구덕이나 소피아가 이 사실을 안다면 크게 경을 칠 일이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예의 무표정으로 무장한 소냐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야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하지만 흡혈왕에게 동조해 반란에 가담했고, 다른 육마와는 달리 전장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 반군 내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주요 임무를 맡고 있거나… 그 안에서 도태되었다는 말이겠죠.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맹랑하군. 내가 야심이 없다고? 그리고 도태되었다라?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반군에 합류하기 전까지 십존 중에서도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주던 당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변해버렸으니까요. 제 사건에서도 그렇습니다. 일부러 느슨하게 한 느낌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소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아마도 그건… 흡혈왕의 감시겠죠. 그리고… 야심이 없다고 생각한 건, 단순히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후후, 후후후… 으하하핫!
티렐의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골을 울리자, 소냐는 살며시 콧잔등을 찡그렸다. 염체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뇌리에 직접 전달되기 때문에, 아무리 크게 웃는다 한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잠시 후, 한참을 웃어젖히던 티렐의 웃음소리가 지나가버린 소낙비처럼 뚝 멎었다.
-재미있군. 정말로 재미있어. 지금까지 내게 이처럼 멋대로 지껄인 사람은 없었다. 아홉 살 꼬맹이치고는 너무 겁이 없구나.
“…….”
소냐는 말을 아꼈다. 더 이상 티렐을 자극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 낌새를 읽은 것일까? 금방이라도 노성을 터뜨릴 것처럼 달아올랐던 티렐의 음성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지. 꼬맹이를 상대로 억지를 부려서야 꼴불견에 불과할 테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네 말은 사실이다. 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난 발레기우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때문에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지.
“…생각보다 형편없는 결속력이군요.”
-그럴지도. 이쪽도 위원회만큼이나 모래알 같은 느낌이지. 발레기우스가 감시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놈은 가리발디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놈에게 있어 우린 단순히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티렐은 소냐가 생각지도 못한 중요한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물론,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깊숙한 내심을 털어놓았을 리 없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왜 그에게 협력하는 겁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그편이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군의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티렐 본인에게 도움이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티렐은 더 이상 내부의 속사정을 유출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꼬마야, 네 말마따나, 대화를 길게 끌 필요는 없겠지. 네가 날 불러냈다는 건, 내 제자가 되라는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소냐는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감고, 머릿속에 난립한 생각을 천천히 정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티렐이 마련한 무대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다.
티렐은 충분히 그녀를 납치할 여력이 있었음에도 일부러 그녀를 놓아주었다. 울펜을 죽이지 않은 것, 길포드와 장하나를 죽기직전까지 몰고 가서 살려둔 것, 신전의 사람들이 무사했던 것… 모두가 그의 노림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갖가지 상황을 만들어 소냐의 능력을 평가했다. 마치 그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만들어 그 역량을 재는 느낌이었다.
소냐는 그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스스로가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겐, 기꺼이 그녀를 위해주는 사람들조차 지킬 힘이 없었다. 티렐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더라면 신전 일대는 순식간에 시산혈해로 변했을 터.
기실, 어린아이가 보호받아 마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소냐의 성숙한 정신연령은 그런 나약한 작태를 용납하지 못했다.
…이 모두가 티렐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냐는 티렐을 불러냈다.
왜냐하면, 그의 힘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소피아, 데모나, 헨더슨, 박승찬… 아이리스의 명망 높은 마법사들을 모두 세워놔도, 아니, 전 대륙을 통틀어 본다 한들 티렐만한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막바지에 시간을 끄는군. 무엇이냐?
끌끌 혀를 차는 티렐의 어투에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소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의 마법은… 최고라 자부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다.
일순간의 머뭇거림도 없는, 자부심에 가득한 음성.
-최강은 아닐지라도, 내 마도는 대륙 최고이다. 그나마 견줄 수 있는 자라면… 너와는 동문(同門)이라고 할 수 있는 유메르바인. 그 녀석 정도겠지.
“유메르바인…….”
소냐는 나직하게 파멸의 현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동문이라고 한다면, 그녀 역시 티렐에게서 지도를 받았다는 뜻일 터.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파멸의 현자가 판데모니엄에 몸담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더 할 말은 없나?
“…하나 더. 당신과의 사제 관계는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겠지. 나도 네 의사에 반해서 일을 진행시킬 생각은 없으니. 꼬맹이… 너는 내 최후의 역작이 될 테니까.
두 노소(老少)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비로소 마음을 정한 소냐는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티렐을 향해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후후후…. 네가 날 넘어설 날이 기대되는구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크흐흐흐! 좋은 마음가짐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라! 내 너에게 마도의 끝을 보여줄 테니!
대륙 마법의 최고봉에 서 있는 마인과, 역사상 최고의 마법 재능을 지닌 소녀의 만남. 훗날 이 인연이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는, 오직 하늘 아래에서 굽어보는 신만이 알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녁에 심하게 바빠질 것 같아 우선 일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리리플은 나중에 달도록 할게요!
티렐의 목적에 대해서는 . . . 중간중간 둘이 엮이는 에피소드가 나오면서 천천히 언급될 예정입니다.
부족한 작품 항상 사랑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한국이 이겼으면 좋겠네요 ㅠ
최신식 / 코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은둔기사 / 그렇습니다… 십존에 빨래판은 없습니다…
컨디션레드 / 아닙니다. 꽤 볼륨이 있는 편이죠.
북치네 / 허흠.. 여성 헌터들과는 달리, 남성들 중에는 대물이 아닌 이도 있습니다. 오히려 대물이 더 적을걸요… 물론 십존들 얘깁니다. 하하..
가식적썩소 / 1승만 거둔게 아닐듯 싶네요..
Velos / 세희는 그런 걸 모르니까요 ㅠㅠ
모욕감 /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아스라히i / 항상 감사드려요~ 굿모닝입니다!
xusaku / 그게 그렇게 또 이득이 되는 건가요 ㅋㅋㅋ
은신설야 / ㄱㅅㅎㄴㄷ!
asd메이지 / 아직까지 그 인상이 남아 있는 듯싶네요!
그눈건 / 백마와 영웅의 사랑인가요 .. 흠흠..
감자껍질 / 허허.. 진정하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요!
호야[虎夜] / 으아… 역시나 오타가… ㅠㅠ 어서 수정해야 겠습니다.
굴러다녀 / 사실 그런 식으로 지은 이름들이 꽤 되지요 ㅋㅋ
무꾸914 / 은근히 나이스바디입니다. 그 누님도..
모그퐁 / 감사합니다! 사랑하진 않습니다!
Astraya / 십존 치고.. 아니, 헌터치고 추녀는 없다는 설정이니까요. ㅎㅎ;
가을호랭이 / 에이 설마 소냐가 김가놈에게 가겠습니까? 작가를.. 음.. 믿어주세요..
평범하게살고파 / 이것도 행운 5 보정?
니오그타 / 그것도 꼭 유전되는 것만은 아닙디다…
사소허 / 진정시켜야드려야겠네요. 코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