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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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그림자의 방문
“……!”
줄곧 냉담했던 포커페이스에 금이 가면서, 세찬 파랑이 일었다.
노구덕의 시선과 손가락은 옷 위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치솟아있는 사내의 상징을 가리키고 있다. 노구덕의 이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아가레스트는 아둔한 여인이 아니다.
“빨…라고요?”
“뭘 망설이지? 내게 몸을 팔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럼 제대로 해야지.”
“당신…!”
반개한 아가레스트의 눈꺼풀이 크게 치떠지며, 휘황찬란한 동공에 첨예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윽고, 격노한 아가레스트의 주위에서 찬연한 금빛 기운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일어나려는 찰나.
“그만두지. 이 근방에는 에테르윙과 룬메이커가 있어. 거기에 나도 있고. 복수를 끝마치기도 전에 뒈지고 싶은 건가? 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도 마음대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곤란해.”
“…큭!”
금방이라도 분노를 폭발시킬 것만 같던 아가레스트는 바득 이를 악물며 기운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노구덕의 말마따나 가리발디를 이긴 강자와 싸우는 사이, 룬메이커 도일이나 에테르 윙 박승찬, 혹은 아이리스의 다른 강자들이 끼어든다면 여지없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강해졌다고 해도 한꺼번에 그만한 전력들과 싸우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아가레스트는 꿈에도 몰랐다. 노구덕의 이 담담한 협박이 실은 허장성세라는 것을. 그녀는 노구덕이 가리발디를 단독으로 잡았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지, 그 힘에 제한이 걸려있다는 비밀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네요.”
“뭐가?”
“기껏 협약을 맺은 상황에 이럴 필요가 있나요? 분명 전 당신의 아이로 가문의 대를 잇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노예를 자처한 건 아니에요.”
노구덕은 아가레스트의 씹어뱉는 듯한 항변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건 무슨 말장난이지?”
“말장난…이라고요?”
“결국 내 씨받이가 되겠단 소리 아닌가? 그런 마당에 당장 대달라는 것도 아니고, 한번 빨아주는 게 뭐 어때서? 세상물정 모르는 숫처녀도 아니고 말이야.”
“다, 당신…!”
치미는 굴욕감을 견디지 못한 아가레스트의 낯빛이 수의처럼 하얗게 일변했다. 하지만 상대는 핏기가 가신 그녀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지독한 폭언을 일삼았다.
“솔직히 나는 아가레스트, 네 제안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대륙 전역에 상당한 정보망을 구축해 놓고 있고, 나름대로 음지에서의 활동도 활발한 편이지. 구태여 위험을 짊어지면서까지 널 영입할 필요가 없어. 상황이 그런데, 이 정도 콩고물조차 없으면 내 마음이 움직이겠나?”
어느새 ‘당신’에서 ‘너’로 바뀐 호칭. 피눈물이라도 흘릴 듯, 눈매를 벌겋게 물들인 아가레스트는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구덕을 노려보고 있었다.
“트랑키아 가문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위원회 9가문 가운데 가장 처지는 빈껍데기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베푼 은혜에 대해선 싹 입을 닫아버리고 거래를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저보고 당신의 성노예가 되라는 건가요?”
격동하는 심중을 여실히 보여주듯, 덜덜 떨려 나오는 목소리. 포로로 잡혔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 그녀가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상대는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남자다.
허나 노구덕의 세 치 혀는 그녀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과거의 그 지옥 같은 나날들을 무자비하게 들춰내고 있었다.
“이왕 몸을 팔 거라면 태도를 확실히 하란 말이다. 어미이길 저버리고, 씨받이를 자처하면서 좆 한번 빠는 건 못 하겠다? 어설퍼도 너무 어설퍼. 그런 꼴을 겪고도 아직도 뭉개질 자존심이 남아 있는 모양이야.”
“…….”
“뭐? 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허! 그런 어중간한 각오로 계약을 잘도 이행하겠군. 마지막에 뒤통수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빨이 깊숙하게 박혀든 아랫입술에서 끝내 붉은 선혈이 송진처럼 배어나와, 미려한 턱선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가혹하게 구는 노구덕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그의 일갈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게 그녀의 각오를 시험하는 노구덕의 유도신문이었다면, 아가레스트는 꼼짝없이 그 덫에 걸려들고 만 셈이다. 결과는 불합격. 그녀는 노구덕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하겠…어요.”
어느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철철 피를 흘리는 입술 사이로, 처절하리만치 앓는 소리가 언어의 형태를 빌어 새어나온다. 방금, 그녀는 마지막 한 가닥 남아 있던 자존심을 스스로의 손으로 뚝,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래, 이미 무수히 더럽혀진 몸이다. 똥밭에서 뒹구나, 진창에서 뒹구나… 이제는 별반 차이도 없을 텐데. 이제 와서 무엇을 가릴까.
“하겠다고?”
“…네. 빨라면 빨고, 몸을 달라면 드리겠어요. 대신, 약속한 지원은 확실히 해주시길. 화대(花代)는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
이제는 아예 스스로를 창녀 취급하는 그녀다. 왕녀로서의, 십존으로서의 자존감을 완전히 짓뭉개버렸다는 방증이었다.
“됐다. 흥이 깨졌어.”
“…네?”
이건 또 무슨 청개구리 같은 태도일까. 막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던 아가레스트의 두 눈이 망연자실, 하염없이 커졌다. 크게 치떠져 동그스름한 금안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저 하늘의 별 무리를 빼다 박은 듯 아름다웠다.
놀랍도록 작은 얼굴. 저 작은 바탕에 어떻게 저리 섬세한 이목구비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걸까. 작은 눈 깜박임 하나에도 귀티가 묻어나는 그녀의 외모는 짐승들의 성 노리개가 되는 고초를 겪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잠깐 아가레스트의 미모에 눈길을 준 노구덕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뒤로 하며 입을 열었다.
“급조한 각오는 깨지기도 쉬운 법이지.”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하루의 말미를 주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와라. 오지 않아도 좋고.”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아가레스트는 침착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살짝 쳐들었다.
하루의 말미. 짧지만 긴 시간이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고 각오를 굳히라는 배려일까? 아니면, 달리 무슨 준비를 하겠다는 의미일까.
노구덕은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만일 네가 내일 이 자리에 온다면, 네게 목줄을 걸어놓을 생각이니. 손잡이 같은 거지. 멋대로 휘둘러진 칼날에 다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알겠어요.”
깊은 한숨과 함께 답한 아가레스트는 천천히 무릎 꿇었던 몸을 일으켰다. 넓게 퍼진 머리를 한 데 말아 올려, 다시 후드를 깊게 올려 쓴 그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앉아 있는 노구덕 쪽을 힐끔 곁눈질 하더니, 등장했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블링크인지, 워프의 일종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대단한 솜씨였다.
“후우우…….”
-내일 뵙겠어요.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낮게 숨을 내쉬던 노구덕은, 기다렸다는듯 머릿속을 울리는 가느다란 음성에 흠칫 표정을 굳혔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방심할 수 없는 여자로군.”
서부의 거대 세력인 아이리스의 클럽 홀을 자기 안마당처럼 드나드는 실력과 배포, 그리고 뛰어난 지모까지. 십존이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여자였다. 한편으로는, 저만한 여인을 수월하게 사로잡은 발레기우스의 끝 모를 능력이 새삼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한 것만큼 아주 싸이코는 아니었어.”
물불 가리지 않는 복수귀(復讎鬼)일 줄 알았는데, 막상 대면한 아가레스트는 상당히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방금 전의 도발은, 말하자면 간단한 테스트였다. 그리고 그 테스트의 결과로, 그는 아가레스트에게 어느 정도의 인간성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주저 없이 그의 물건을 입에 물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난감했을 터.
복수심 말고도 그녀를 지탱하는 다른 감정들이 있다. 그것이 자존심인지, 혹은 가족들이나 퀸젤 같은 지인들을 향한 애정인지, 유산한 아이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인지는 모른다. 허나 그 자체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그것만 알아내면 어느 정도 컨트롤하기도 쉬워질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일단 울펜 영감에게 가봐야겠어.’
내일 아가레스트에게 세례를 하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막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노구덕은 아직도 팽팽하게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아, 열차 떠났다. 이만 고개 숙여라.”
어기적거리며 집무실을 나선 노구덕은 잠깐 걸음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어색한 헛기침을 터뜨리며 발길을 돌렸다. 그 방향은 울펜이 머무는 방이 아닌, 신소율과 소피아의 방이 있는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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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가레스트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 날, 정확히 제 시간에 노구덕을 찾아온 그녀는 그 자리에서 벌레교단의 세례를 받았다. 그녀가 받은 세례는 추기경이나 주교에게 행하는 보통의 세례가 아닌, 영적인 지배력을 극대화하는 ‘복종의 세례’였다.
영혼 깊숙이 복종의 세례가 새겨진 이상, 아가레스트는 절대 본인의 의지로 노구덕을 거역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노구덕에게서 복종의 세례를 받은 인물은 오직 모고르의 통치자인 자하드 하나뿐이다. 하지만 자하드의 전투능력은 아이리스의 다른 헌터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 심령차력술의 효과를 기대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가레스트는 달랐다. 노구덕은 아가레스트와 영통(靈通)을 이루면서, 그녀에게 천리안이라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연히도 울펜이 쓰는 교단의 주술과 같은 이름을 가진 그 능력은 말 그대로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울펜의 주술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가레스트의 천리안은 미래 예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항상 눈꺼풀을 반만 뜨고 있는 것도 이 천리안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아가레스트 본인의 힘이 아닌, 신기 프레이야의 심장에 기반하여 발현되는 발할라의 ‘전능의 탑’은 쓸 수 없었지만, 천리안을 비롯한 아가레스트의 주문 능력은 노구덕에게 있어 아주 매력적인 카드였다.
그러나 페널티도 있었다. 아가레스트라는 하수인이 워낙 무지막지한 힘을 보유한 탓인지, 세례의 반동으로 인한 부하가 극심했다. 자하드를 첫 하수인으로 받아들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부담이었다.
그나마 평소에는 그럭저럭 견딜만했지만, 문제는 그 능력을 발현할 때였다. 한번은 무리하게 천리안을 쓰려다가 안구가 터져버린 적도 있었다. 2천에 달하는 신도들에게서 긁어모은 영력도, 아가레스트의 초월적인 능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멀쩡한 눈알을 날려먹은 데다, 울펜에게서 뛰지도 못하는 게 벌써부터 날갯짓을 하려고 하냐는 핀잔까지 얻어먹은 노구덕은 영력을 지금의 배로 키우는 그날까지 당분간 아가레스트의 능력을 봉인하기로 마음먹었다. 확실히, 지금은 무작정 황새를 따라하기보다 뱁새의 걸음걸이부터 익히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노구덕이 나날이 수련에 힘쓰고, 아이리스가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는 동안, 시간은 강물처럼 하염없이 흘러, 어느새 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하하.. 상남자의 펠라치오를 기대하셨던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족쇄도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들이댈 수는 없죠. 호감도 문제도 있고, 그러다가는 소시지가 무참히 물어뜯기도 말 테니까요. 뭐.. 노구덕이라면 별 타격이 없을듯(?) 하지만요.
그러고보니 아이리스에 모인 여인들 치고 사연이 없는 여인들이 없네요. 재활치료사 구더기..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500화가 슬슬 다가오는데, 마침 2부 끝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3부에선 지겨울 정도로 치고박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작가는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