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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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난봉꾼
‘이것 봐라?’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박지현의 눈이 실처럼 가늘게 변했다. 두 사내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안세희와 훈훈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이태양의 안색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혀, 형님….”
없던 빈혈이라도 생긴 것인지 하얗게 변한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해쓱하다. 심하게 떨리는 동공은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고 사시처럼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흉포한 강자를 앞에 둔 전형적인 약자의 얼굴이다. 조만간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되리란 걸 짐작한 박지현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안세희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뭔진 몰라도 괜한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세희야, 얘기 다 했으면 가자.”
“자, 잠깐만요. 간다고 인사는 드려야…….”
“이태양, 아주 팔자가 늘어졌구나. 돈 갚을 시간은 없고 여자 후릴 시간은 있는 거냐? 앙?”
멈칫. 박지현에게 끌려가던 안세희의 몸뚱이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박지현은 저 양아치 같은 남자가 안세희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음을 깨닫고는 끄응 속으로 신음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일우 형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분명히 나 찾아오게 만들지 말고 네 발로 찾아오랬지. 돈을 빌려준 건 난데, 왜 마음 고생도 내가 해야 하냔 말이다. 하여간 씨팔, 너 같은 새끼들이 꼭 채권자를 나쁜놈으로 만들지.”
“…….”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린 이태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뻔한 상황이다. 난폭한 채권자가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독촉하며 난리를 피우는 상황. 남일우의 소맷자락에 작게 그려진 문양을 보면 같은 피에스타 소속인 것 같은데, 같은 피에스타 헌터들끼리의 우정이 참으로 돈독해 보였다.
사실, 남일우가 이태양을 지지고 볶든 그거야 남의 클럽 사정이니 관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안세희가 이런 경우를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고아원 시절부터 수많은 동생들을 챙겨왔던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모성애가 깊은 여인이었다. 단순히 신성력이 높다고 해서, 성녀라는 별명이 아무에게나 붙는 것은 아니다.
“저… 무슨 일이죠?”
“넌 또 뭐야?”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안세희.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하는 남일우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뒤에서 같이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문형식과 더불어 인상만으로도 꽤나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의 살벌한 분위기에 잠깐 주춤했던 안세희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는 아이리스의 사제 안세희라고 합니다. 여기 이태양 헌터, 그레이스 헌터가 소속된 부대의 장으로 선임된…….”
“안세희…? 아하, 이제 보니 그 명성 자자한 진홍의 성녀셨구만. 그래서?”
“…두 분 간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태양 헌터는 일주일 뒤에 중요한 출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 사기를 해칠 만한 일은…….”
남일우는 안세희의 정중한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내 돈 받겠다는데, 사기는 무슨 사기? 그리고 참전은 쟤만 하는 줄 알아? 돈 못 받는 내 사기는 어쩔 건데? 내가 뭐 못할 말이라도 했냐? 야, 태양아, 니가 한 번 말해봐라.”
“아, 아닙니다.”
황급히 도리질을 하는 이태양을 보며 만족스런 웃음을 흘린 남일우는 당혹스러워하는 안세희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가씨, 들었겠지? 이건 우리 개인 문제란 말이야.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이 새끼가 내 돈을 얼마나 떼먹었는 줄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 잠자코 구경이나 하란 말이야. 하여튼 요즘 것들은 조금만 띄워주면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아요.”
“이봐, 말이 너무 심하잖아.”
“넌 또 뭐야?”
“너? 그러는 넌 이름이 뭐냐?”
박지현은 남일우의 막말에 사납게 눈매를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안세희를 몰아치는 놈의 태도에 발끈해서 나선 것이었는데, 이제는 인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이쿠, 무서워라. 문양을 보니 아이리스 소속인 것 같은데…… 이거, 타 클럽의 헌터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피에스타 막사 안에서 난동을 피우는 거지? 이래도 되나?”
“난동? 누가 먼저 난동을 피웠는데?”
“언니,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우선 대화로…….”
“쌍으로 지랄을 하는군. 이봐,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좀 꺼져 주시지 그래. 눈에 거슬리니까.”
뒤에서 잡아끄는 안세희에게 못 이기는 척, 물러날 기미를 보이던 박지현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박지현의 성미에 여기까지 참은 것도 용한 일이다.
“…와. 나 참. 야, 지금 일부러 시비 거는 거 맞지?”
“뭐? 이년이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점입가경이 되어가는 장내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안세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박지현의 팔을 붙잡았지만, 이미 성질머리에 불이 붙어버린 박지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년? 터진 입? 환장하겠네. 지금 때려달라고 용 쓰냐? 앙?”
“으하하. 쥐좆만 한 작대기 하나 들고 있으면, 누가 무섭다고 할 줄 알았냐? 때릴 수 있으면 때려봐라. 근본도 없는 것들이 요새 잘 나간다고 나댈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아항, 그게 본심이었구만? 잘 됐네. 어디 근본 있는 것들 실력 좀 보자.”
독을 품은 전갈처럼 눈꼬리를 치켜세운 박지현은 건달패처럼 킬킬거리고 있는 남일우와 문형식을 향해 거칠게 이를 갈아붙였다.
“덤벼, 이 불알도 없는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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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다툼에 관여한 것은 두 명. 피에스타의 남일우 헌터와 아이리스의 박지현 헌터입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노구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뇌부가 앉아 있는 단상 아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 그 중 한 명은 아이리스의 헌터인 박지현이었다. 한쪽 눈 언저리가 팬더처럼 푸르뎅뎅하게 물든 것이 제대로 치고 박고 싸운 듯했다.
가관인 꼴은 상대인 남일우도 만만치 않았다. 입술이 붕어처럼 부어터진데다, 팔뚝에는 임시로 부목까지 대고 있다. 아마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진 모양이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좁은 막사 안이라 서로 무기를 휘두르진 못하고 주먹질을 해댔다고.
그나마 다행인 건 둘 모두 중상은 아니라는 점. 사제의 신성 주문 한 번이면 멀쩡해질 상처들이었으나, 유메르바인의 엄명으로 응급처치를 제외한 어떤 치유도 받지 못하게 한 상태였다.
“이 시국에 같은 편끼리 싸움질이라니, 제정신들이 아니군요.”
군법회의를 주관하는 유메르바인의 표정은 북극의 빙하처럼 냉엄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제 일주일 뒤면 죽음의 군주로 불리는 그림리퍼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결전을 벌여야 하는 판국에 싸움질이라니. 용납될 수 없는 군기문란이었다.
당사자인 박지현과 남일우를 비롯해, 참고인으로서 뒤에 늘어선 안세희, 이태양 등의 인물들이 면목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보낸 유메르바인은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는 헌터들에게 엄한 경고를 날렸다.
“다들 잘 들어두세요. 여기는 클럽 홀도 아니고, 소풍 나온 자리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엄연히 군대의 일원으로서 이번 원정에 참여했어요. 베테랑 헌터들이라면 이 의미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의견충돌이 생기면 당연히 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밖에서의 일입니다. 군부대 내에서 사기를 해치는 일은 용납될 수 없어요. 박지현 헌터, 남일우 헌터, 군기를 어지럽힌 행위에 대해서 할 말 있나요?”
“…없습니다.”
몸 여기저기에 대놓고 싸움의 흔적이 남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확답을 받아낸 유메르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정황을 듣도록 하죠. 두 사람의 변호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참고인들의 말부터 듣도록 하겠어요. 먼저, 안세희 헌터?”
“…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선 안세희는 단상 위를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클럽에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노구덕이나 동료들을 볼 낯이 없는 것이리라.
이어진 안세희의 증언은 앞서 일어난 상황을 대체적으로 잘 묘사한 편이었다. 같이 증인으로 참석한 이태양, 그레이스와 인사를 나누던 와중 남일우와 문형식이 난입했고, 심하게 다그치는 남일우를 말리려다 그의 무례한 언사에 발끈한 박지현이 나서면서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안세희의 증언이 끝나자, 대강의 상황을 짚어낸 노구덕은 코허리를 불쾌하게 씰룩였다. 그녀의 얘기만 듣고 보면 먼저 도발을 한 쪽은 남일우였기 때문이다.
“말이 좀 심했군. 초면에 그런 막말을….”
“큼. 노구덕 위원, 아직 우리쪽의 증언이 나오지 않았잖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
그와 비슷하게 언짢은 얼굴로 말을 받은 인물은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중년인으로, 피에스타의 오너인 바간이었다.
“고마워요. 안세희 헌터. 얘기 잘 들었어요. 그럼 다음으로, 피에스타의 그레이스 헌터.”
안세희 다음으로 나선 것은 이십대 후반의 사제 그레이스. 어쩐지 조금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 나온 그녀의 증언은, 먼젓번 안세희의 얘기와는 사뭇 달랐다.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일우 오빠는 그냥 받아치려다가, 그게 잘못돼서 싸움으로 번진 거고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사람은 남일우의 옆에 꿇어앉아 있는 박지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박지현은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쳤다.
“뭐?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돌아가는 거 뻔히 봐 놓고선! 설마 너 돈 먹었냐?”
“박지현 헌터. 조용히 하세요. 한번만 더 허락 없이 입을 열었다간 강제로 침묵시키겠어요.”
“으우…!”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그레이스를 불 같은 눈초리로 쏘아보던 박지현은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유메르바인의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통이 터질 것 같은 박지현의 표정은 그녀가 얼마나 억울한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안세희도 마찬가지. 유메르바인의 손짓을 받은 그레이스는 그 두 사람이 있는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일우 오빠는 그냥 태양이한테 빌려 준 돈을 받으러 온 것뿐이었어요. 일상적인 일이었죠. 하지만 저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특히 진홍의 성녀와 같이 온 저 사람은 애들 코 묻은 돈이나 뜯으려 한다며 일우 오빠를 매도했죠. 일우 오빠도 그런 말을 참아 넘기는 성격이 아니라 마찰이 일어났던 거고요.”
“…박지현 헌터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군요.”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솔직히,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끼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일우 오빠와 태양이가 친하지 않았더라면 그만한 거금을 선뜻 빌려줬을 리가 없죠.”
“좋아요, 그레이스 헌터. 증언 잘 들었어요.”
서로 상반된 증언에 장내가 시장통처럼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단상 위에 앉아 있는 노구덕의 표정도 딱딱해졌고, 나머지 수뇌부들의 낯빛에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쪽의 잘못이 확실하다면 쉽게 풀릴 일인데, 분명 같은 상황을 목도한 증인들의 말이 상반되게 엇갈린 탓이다.
남은 증인은 두 명. 직접적인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이태양과 피에스타의 여사제 한 명이었다.
“이태양 헌터. 증언하세요.”
유메르바인이 지목한 것은 이태양. 그리고 쭈뼛거리며 나선 이태양은,
“…제가 보기에도… 박지현 헌터가 먼저 도발했던 것 같습니다.”
첫마디부터 박지현과 안세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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