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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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따돌림
경멸로 덩어리진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회반죽이 발린 것처럼 핏기가 사라진 안세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노구덕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가, 덜컥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를 향한 노구덕의 눈빛. 거기서 엿보이는 것은 명백한 실망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얼마 전 물의를 빚은 지 겨우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에 휘말려 소환까지 되었으니.
안세희는 아득해진 이성의 끈을 겨우 부여잡았다. 강하게 붙들고 있는 양 옆의 헌터들이 아니었다면, 지칠대로 지친 그녀의 몸뚱이는 벌써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안세희 헌터? 해명하세요.”
재촉하는 유메르바인의 음성이 삭풍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노구덕과 함께 봤을 땐 마냥 갈대처럼 부드럽고, 단아한 여인인 줄 알았는데, 심장부를 후벼 파는 기운은 칼날을 형상화한 듯 예리하기 짝이 없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혐의를 부인하는 건가요?”
혐의? 안세희의 어금니가 서로 맞닿아 강하게 짓눌렸다. 약에 취한 듯 정신이 없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겠다.
그녀는, 또 다시 배신당했다. 방금 재생된 영상이 바로 그 증거. 이태양의 접근은 처음부터 노림수였던 것이다.
이어, 그녀의 목울대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전의 어눌한 말투보다 훨신 뚜렷한 어조였다.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이건… 모함입니다.”
“허, 뻔뻔하기도 하군. 증거가 버젓이 잇는 마당에 모함이라고?”
“피에스타 오너. 아직 혐의가 확정된 건 아닙니다.”
“아니, 물증이 확실한 마당에 확정이 아니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때다 싶어 나서는 바간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바간이 동의를 구하자, 상당수의 머리가 끄덕여지는 것이 보인다. 그들 대부분은 멸시에 찬 눈으로 안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 클럽의 헌터를 빼가기 위해 은밀하게 접촉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는 행위다. 더군다나 상호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 시국이라면 더욱 그렇다. 안세희의 혐의가 사실이라면, 그녀의 행위는 엄중한 군법으로 다스려야 할 중대 사안이었다. 그 의도와 부대에 미치는 악영향을 따졌을 때, 그녀가 범한 죄는 남일우와 박지현이 다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중죄였다.
“판단은 제가 합니다. 그리고 아직 본인의 말을 듣지 못했어요.”
“허 참… 답답하시구랴. 부사령관, 혹시 노구덕 위원과 친분이 있다고 감싸고 도는 거요?”
“피에스타 오너. 지금 제 공정성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월권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광포하게 일어난 무형의 기세가 살갗을 저미듯 스며들자, 바간은 자칫 암사자의 코털을 건드릴 뻔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물론, 옹졸한 몇 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끙. 알겠소. 한번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어나 봅시다.”
함부로 나서서 비아냥거리는 바간을 자중시킨 유메르바인은 질의를 계속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보세요. 변론할 기회를 드리죠.”
그즈음, 안세희는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직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뒤집힐 것만 같은 속을 억지로 짓누르며 머리를 식혔다. 우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부사령관님. 방금 전의 영상은 이태양 헌터가 제출한 건가요?”
“특정인과 증거의 출처를 연관지어 말해 줄 순 없어요. 고발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이니, 이해해주리라 믿어요.”
“…네. 그럼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그러세요.”
“제 목소리의 진위를 분석하셨다면,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죠. 아시겠지만, 영상 속 상대는 피에스타의 사제 이태양 헌터입니다…. 혹시 그를 이곳에 불러주실 수 있나요?”
“불가합니다. 대질 여부는 변론을 듣고 결정하겠어요.”
안세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양을 왜 그랬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지금 처지로선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남은 건, 최선을 다해 무죄를 주장하는 것뿐.
그녀는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한 음성으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던 박지현과 남일우의 충돌,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던 그레이스 패거리의 따돌림, 지쳐버린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이태양…….
이야기가 지속되는 동안, 애써 차분함을 가장했던 안세희의 말에 심한 떨림이 스며들었다. 그녀로선,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부끄럽지만 저는… 부대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부고발을 하겠다는 이태양 헌터의 제안을 받아들였고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당시엔 그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맺은 안세희의 표정은 말미에 어린 울음기처럼 어둡게 침잠해 있었다. 지난 며칠 간, 지옥 같았던 하루를 차근차근 되새기는 건 고문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제출된 증거 영상은 이태양 헌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도중에 찍힌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안세희 헌터의 말은, 먼저 접근한 쪽은 이태양 헌터였고, 먼저 아이리스로의 이적을 제안한 쪽도 이태양 헌터라는 소리군요?”
“예….”
“잘 알겠어요. 더 할 말은요?”
“…없습니다…….”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안세희는 면목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처럼 체념한 듯한 모습.
그녀의 변론이 끝나자, 전후사정을 알게 된 수뇌부는 안세희의 처벌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기 시작했다.
“…흠, 그런 사정이었나. 확실히… 영상이 부자연스럽긴 하더군.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기도 하고.”
“레전더리 오너! 그 무슨 가당찮은 소리요! 우리 헌터를 빼가려고 했다는 정황이 이토록 명백한데!”
“아니,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소? 애초에 영상이 중간부터 녹음됐다는 것 자체도 석연찮고…….”
“뭐요! 이 사람이!”
수뇌부의 의견은 크게 두 개로 엇갈렸다. 영상의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하며 안세희의 말에 무게를 실어주는 쪽과, 여전히 안세희의 유죄를 주장하며 그녀의 처벌을 바라는 쪽이었다. 비율로 치자면 3 대 7 정도로 후자의 의견이 우세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헌터를 빼가려고 한 건 잘못이지.”
“암, 금기가 괜히 금기던가? 어정쩡한 선례를 만들면 기강이 뿌리부터 무너질 가능성이 있어. 이런 건 엄히 본보기를 보여야…….”
원탁에서 이런 말이 들려올 때마다, 그렇잖아도 힘없이 늘어진 머리가 더욱 아래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안세희의 작은 몸이 땅 속 밑으로 파묻힐 판이다.
‘골치 아프게 됐어.’
분위기가 흘러가는 꼴을 지켜보던 유메르바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안세희의 잘못을 빌미로, 그간 잠재되어 있던 아이리스에 대한 질시와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 말하자면, 잘 나가는 신진이었던 안세희가 사소한 꼬투리를 잡혀 왕따를 당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엔 그 대상이 안세희가 아니라 아이리스로 확대되었을 뿐.
피에스타 오너, 바간의 말에 동조하는 자들은 대개 전통을 자랑하는 서부 명문 클럽의 오너들이었다. 그들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본 없는’ 신흥 세력인 아이리스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고깝게 여기던 차에, 마침 좋은 건수가 걸린 상황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유메르바인은 지금쯤 가장 애가 타고 있을 당사자인 노구덕이 있는 곳을 힐끗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당사자가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노구덕 위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별로. 여기서 내가 말해봐야 분란조장밖에 더 될까. 지금은 부사령관의 현명한 판단에 맡기겠소.”
남 일을 대하듯 시큰둥한 대답. 그의 말을 들었는지, 안세희의 움츠린 어깨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래요?”
유메르바인은 잘못 들었나 싶어 노구덕의 얼굴을 살폈지만, 노구덕의 무미건조한 표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곱게 미간을 찌푸린 유메르바인은 으응…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작은 탄식과 함께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순 없죠. 내일 군법회의를 열겠어요.”
“부사령관! 무엇하러 굳이… 주야장천 훈련만 하는데도 시간이 촉박하지 않소?”
“촉박하니까 내일 여는 거죠. 암만 그래도, 최소한의 진상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넘길 생각은 없어요. 이번 건은 내일 군법회의에 회부합니다.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그게 옳아요.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최대한 내사를 끝내고, 내일 있을 회의를 준비토록하세요.”
빠르게 지시를 내린 유메르바인은 다른 반론이 나오기 전에 자리를 파했다.
“이만, 해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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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희는 그 길로 자기 막사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말이 근신이지, 그녀의 막사 앞에는 사령부 직속의 헌터들이 번갈아가며 번을 서고 있어, 사실상 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잠깐 얼굴 보는 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근신이라면서요?”
“안세희 헌터는 지금 면회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우리 세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신소율 헌터, 이만 돌아갑시다. 여기서 떼를 써봐야 클럽에나, 안세희 헌터에게나 도움 될 게 하등 없어요.”
“와… 진짜 어떡해… 도일 오빠, 우리 세희 불쌍해서 어떡해요?”
자박자박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세희는 끌어당긴 양 무릎에 얼굴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그녀는 심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호의로 대했던 사람들에게 연달아 뒤통수를 맞다 보니, 이제는 뭐가 옳고 뭐가 그른 것인지 스스로도 모를 지경이었다.
설마, 이태양이 그때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뭔가 억지로 대화를 짜 맞추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당시엔 그의 절박한 분위기에 휩쓸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 실수가 끈질긴 올가미가 되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안세희라고 무턱대고 그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이태양이 돌아간 뒤, 안세희는 곧장 소피아에게 연락해 이태양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 서부 주류 세력들의 구성원 명단을 줄줄이 꿰고 있는 소피아라면 이태양에 대한 정보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확인 결과, 이태양이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노모를 모시며 이복형제들을 홀로 부양하고 있다는 것, 평소 남일우, 문형식 패거리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 모두가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처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를 믿었다. 간곡히 부탁해오던 그의 절절한 눈빛은 도저히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해 보였다.
‘그 사람… 정말 거짓이었을까?’
아직도 안세희의 머리에 맴도는 의문이었다. 사람의 감정변화에 특히나 민감한 그녀의 눈에 비친 이태양의 얼굴은 분명 짙은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간절한 그의 얼굴을 상기한 안세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진심이야 어쨌든, 이제 와선 상관없는 고민이었다.
그때였다.
우웅. 익숙한 진동음이 그녀의 청각을 자극했다. 느릿하게 머리를 든 그녀는, 이내 진동의 근원을 찾아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미세한 진동음은 침대 아래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건…?”
침대 아래를 살핀 안세희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파묻힐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미약한 빛을 뿌리고 있는 작은 수정. 그것은 그녀가 이태양과 연락을 주고받는 용도로 사용했던 통신 수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간상 다음 화는 12시 전후로 해서 올라올 것 같네요.
달아주신 코멘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우선, 전개가 억지스럽게 느껴지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_ _ 제 역량이 부족한 탓입니다.
흔히 군대에서는 이등병으로 들어오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어리버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요.
세희의 경우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는 입장에선 전지적으로 상황이 들여다보이니 뻔해 보일 수 있지만, 작중 캐릭터는 주어진 상황만 놓고 판단해야 되니까요.
잘못이 있다면 스토리라인을 좀 더 면밀하게 짜지 못한 제 잘못이겠지요.
못난 작가를 둔 세희에게 미안하다~!!
흠흠.. 이제 상황을 풀 만큼 풀었으니, 다음화부터는 이야기를 좀 더 빠르게 전개시킬 생각입니다. 맞을 만큼 맞았으니, 이제 때려줘야겠지요.
좋은 저녁 되시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