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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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아픈 뒤에 성숙해진다
133# 아픈 뒤에 성숙해진다
한 헌터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시작된 작은 모의가, 서부연합군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태풍을 몰고 왔다.
사건이 일어난지 하루가 훌쩍 지났으나, ‘안세희 왕따 사건’의 여파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도 주둔지 이곳저곳에선 어제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긴, 그만한 사건이 쉽게 잊힐 리 만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병장에 남일우, 그 새끼 박혀 있는 것 봤어? 치료도 대충 한 것 같던데.”
“응. 적당히 응급처치 정도만 한 것 같더라. 나머지 놈들도 그렇고… 하여튼, 진홍의 성녀만 불쌍하게 됐지. 뭐.”
“그래. 하필이면 그런 미친개한테 물려서…….”
남일우와 피에스타의 위신이 나락으로 추락하자, 그간 그들의 권세에 짓눌려 있던 남일우, 문형식 패거리의 추악한 과거 또한 속속들이 드러났다. 남일우란 인간이 본인의 지위와 배경을 이용하여 난봉질을 일삼던 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나마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던 약간의 여론조차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난봉꾼 남일우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지면 안 좋아질수록, 그 반대급부로 안세희에 대한 동정론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여론이 뒤바뀌었다고 해서 도화지처럼 깨끗하던 그 명성을 얼룩지게 만든 오명이 씻겨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욕하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태도를 뒤집어버린 반면, 당사자인 안세희는 아직도 악몽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야, 세희야. 죽이라도 좀 먹어.”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요….”
“아휴! 입맛이 없더라도 먹어야지! 내가 원래 잔소리 같은 거 진짜 하기 싫은데, 너 어제부터 한 끼도 안 먹었잖아!”
침대에 쭈그리고 앉은 안세희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골처럼 퀭하게 들어간 눈구멍은 활기라곤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두고 가시면 나중에 먹을게요….”
“얘가 진짜 쇠고집이네. 나, 너 먹을 때까지 안 갈 거야.”
답답함을 참지 못한 신소율은 가지고 온 죽그릇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더니, 그대로 안세희의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눌러앉았다.
“지현 언니가 많이 걱정하고 있더라. 방금 전에도 근신 명령 어기고 뛰쳐나오려고 하는 걸 말리느라 혼났어. 하여간 그 언니는 멧돼지처럼 힘만 세서…….”
“…….”
안세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괜히 어색해진 신소율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녀의 얇은 옷깃을 슬며시 잡아 끌었다.
“그만 기운 차려. 지현 언니만 걱정하고 있는 게 아냐. 두식 오빠랑 도일 오빠도 걱정하고 있다고. 아니면… 클럽으로 복귀할래? 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겠는데.”
“…아니요. 전… 여기 남을 거예요.”
“…진짜.”
푹푹 한숨만 나왔다. 사실, 안세희가 당할 뻔한 일은 신소율에게도 남 일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과거에 비슷한 전례가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안세희가 더욱 안쓰럽게만 보이는 그녀였다.
“너, 씻지도 못했네? 옷도 어제 그대로고…. 기분전환 겸 같이 샤워나 할까? 내가 등 밀어줄게.”
“아뇨. 정화 주문을 쓰면….”
“에헤이, 팍팍하게 굴지 말고. 주문 쓰는 거랑 더운 물에 몸 담그는 거랑 같나? 자자, 얼른 일어나. 이 꼬질꼬질한 옷은 벗어버리고. 아, 여기 옆에 샤워실 구비되어 있지?”
“어, 언니. 잠깐만….”
“빼기는. 에잇!”
득달같이 달려든 신소율은 안세희의 헐렁한 사제복을 훌렁 벗겨냈다. 화들짝 놀란 안세희가 몸을 틀며 반항했지만, 고양이보다 재빠른 신소율의 손놀림을 피해갈 순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를 무장해제시킨 신소율은 날름 윗입술을 핥더니, 어느새 안세희의 등허리로 손을 뻗어 안에 꼭꼭 덧대고 있는 얇은 가죽조끼의 이음매마저 풀어버렸다. 그러자 힘없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죽조끼의 위로 드러나는 희디흰 살결.
겁먹은 것처럼 움츠린 앙가슴 사이로, 깊은 골을 만들어내며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두 개의 몽실몽실한 덩어리를 목격한 신소율은 망연자실,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어… 너… 이렇게 컸었나?”
“네, 네…?”
“…몇 컵이야? A는 절대 아니고… 꽉 찬 B? 아니면 C? 그 이상인가? 숙이고 있어서 잘 안 보이잖아.”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안세희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신소율의 눈에서 활활 불꽃이 튀는 듯했기 때문이다.
“저, 저도 잘은 몰라요. 따로 잰 적은 없는데…….”
“호오, 그래? 요즘 애들은 차암~ 발육이 좋네. 지금까지 이런 흉기를 잘도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하긴, 펑퍼짐한 사제복을 벗겨냈는데 요런 발칙한 살덩이가 튀어나오면 그게 또 반전매력이란 거겠지! 그걸 노린 거야? 응?”
“무, 무슨…….”
지금까지 그녀를 따스하게 걱정해주던 신소율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갑자기 돌변하여 화산 같은 적대감을 분출하는 그녀의 태도에, 울상이 된 안세희는 목 언저리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도리질을 했다.
그때였다.
“…고작 다섯 살 차이나는 주제에, 요즘 애들은 무슨 요즘 애들?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냐?”
잔뜩 겁에 질린 안세희와, 그런 그녀를 덮치기라도 할 듯이 슬금슬금 다가가던 신소율의 움직임이 일시 정지했다.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두 여인은 이내 천천히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살짝 열린 막사 문 틈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민 노구덕이 쯔쯔 혀를 차고 있었다.
…정적은 짧았다. 상황을 인지한 안세희와 신소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낯빛이 급변했다.
“오, 오너… 꺄아아아아-!”
“뭐, 뭘 빤히 보고 있어요! 머리 안 치워요? 이 변태! 치한! 구더기!”
“아니… 밖에서 계속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아! 몰라요! 어서 나가요! 나가!”
얼굴 한 번 잘못 내밀었다가 된통 쓴소리를 얻어먹은 노구덕. 그가 다시 안세희의 막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대략 십오 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민망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신소율과, 방울 토마토처럼 벌겋게 익은 얼굴을 감싸 쥐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안세희를 번갈아 쳐다본 노구덕은 여전히 지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체 둘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건 그냥 넘어가죠? 아저씨,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큼, 알겠다.”
시퍼렇게 도끼눈을 뜨고 있는 신소율을 보아하니 그리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앞서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종합해보면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닌지라, 노구덕은 이쯤에서 장난기를 거두기로 했다. 여인네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캐내는 재미도 재미지만, 너무 파고 들면 피를 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기도 했고.
“세희야, 몸은 어떠냐?”
“괘, 괜찮습니다….”
허술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던 안세희는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근래 들어 고개를 숙이는 게 아예 습관처럼 굳어진 그녀다.
“이번 일,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인 안세희는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제의 군법회의에서 노구덕이 어떤 발언을 했는지, 그리고 무슨 난동을 부렸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탓이다. 게다가 신소율을 통해 노구덕이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니, 그를 똑바로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율아, 잠깐 나가 있어라. 세희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응? 아, 알았어요….”
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신소율은 두말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세희를 향해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던 신소율이 나가고, 낯을 들지 못하는 안세희를 말없이 바라보길 오 분 여. 노구덕은 점차 떨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어깨를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번엔 네게 실망했다.”
“…….”
움찔! 여린 어깨에 어린 떨림이 점차 심해지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그녀는 죄인처럼 목을 늘어뜨린 채였다.
“네 마음은 안다. 나나 동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테고, 어떻게든 네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겠지. 넌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아이니까. 내 말이 틀렸니?”
“아, 아니요….”
“세희야, 넌 지금까지 잘 해줬다. 동생인 세영이와는 달리 그 흔한 실수 한 번 없었고, 소피아의 보좌역으로서 크고 작은 일들을 빈틈없이 처리해왔지. 개인적으로는… 너와 세영이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리스가 힘든 시기를 헤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안세희의 머리가 더더욱 아래로 향했다. 그의 무덤덤한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인생의 은인인 노구덕을 실망시킨 것도 모자라, 클럽의 명성에 큰 누를 끼쳤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번 원정에서, 네게 작지만 부대 하나를 맡긴 것은 네 안계(眼界)를 넓혀주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서류를 만지는 것보다 훨씬 어렵거든. 경험해 보니 어떻더냐? 아이리스와는 많이 달랐지?”
“네….”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처음부터 어렵지 않게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아이리스와는 달리, 가지각색의 소속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제 7부대는 너무 험난한 무대였다. 안세희는 그들과 지내면서, 인간관계라는 것이 마냥 호의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원들이 통제를 벗어났을 때, 너는 내게 알리지 않았다. 그때도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애를 썼지. 만약 네가 조기에 나나 사령부에 알렸더라면, 일이 이처럼 크게 번지진 않았을 거다.”
“…죄송…….”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따지고 보면 너를 질책할 자격은 없다. 너도 군법회의에서 내가 공개한 영상을 보았겠지?”
작게 끄덕여지는 머리를 일별한 노구덕은 옅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네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하지만 따로 조치를 취하진 않았지. 그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네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자 방관했다. 더하자면 역으로 놈들을 함정에 빠트려 이득을 취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마. 나는 널 이용했다.”
안세희는 처음으로, 살짝 고개를 들었다. 먹빛으로 물든 그녀의 시야에,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노구덕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나를 원망하니?”
“아, 아니요… 제 잘못인걸요. 오히려…….”
“오히려?”
“전… 오너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제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닫게 해 주셨으니까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안세희의 표정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파르스름한 독기가 엿보인다. 여태까지의 그녀가 물렁물렁한 순두부 같았다면, 지금의 그녀는 거기에 한층 더 단단한 질감이 더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벌레교단의 사제로서 발탁된 안세희에게 지금까지 부족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모질고 독한 면모였다. 착하고 순한 성격이야 나쁠 게 없지만, 그 무른 성격이 본인이나 클럽의 걸림돌이 된다면 조기에 바로잡는 것이 좋았다.
‘더군다나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자면… 신고식은 빠른 게 좋겠지.’
노구덕은 그가 의도한대로 담금질된 안세희를 보며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맛이 썼다.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의도적으로 안세희를 이용한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과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미안하다. 아이리스가 좀 더 강한 클럽이었다면… 네게 이런 경험을 시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니에요.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된 걸요. 혼자 고민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야말로…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그리고… 감사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저 때문에 오너가….”
“그 일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근신은 진즉에 풀렸으니까.”
큰 일을 겪었지만, 변함없이 고운 마음씀씀이다. 그녀가 절로 대견해진 노구덕은 무심결에 손을 뻗어 안세희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이번 고난을 계기로 한층 더 성장한 안세희가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지. 그녀의 미래를 지켜보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안세희 파트, ‘일단’은 끝났습니다. 구더기가 안세희를 일부러 고생길에 내몬 주된 이유는 차후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죠.
예전 아가레스트를 이용하자고 소피아가 의견을 냈을 때, 안세희가 반대를 했었죠? 그때 노구덕은 심정적으로 소피아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일부러 안세희의 시선을 의식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었죠. 소피아와 안세희의 사이가 벌어지면 안되니까요.
차후 그런 일로 클럽 운영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멘탈수련을 시켰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착한 건 좋지만, 너무 착한 건 또 독이 되거든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