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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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꿍꿍이
135# 꿍꿍이
선봉대가 그림리퍼의 영역에 첫발을 내딛은 그 시각, 노구덕을 포함한 사령부 본진은 로렐라이의 성벽에서 전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포진을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림리퍼가 몰고 온 어둠의 장막은 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간 선봉대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다. 당장 안에서는 그림리퍼가 만들어낸 어둠의 피조물들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밖에서 보이는 것은 그저 시커먼 암흑뿐이었다.
이래서야 선봉대의 동태는커녕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지, 당황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계획대로다. 그림리퍼를 격멸하기 위한 밑작업은 지금 이순간에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먼저 출진한 유격대와 선봉대를 제외한 전사단, 마법사단, 사제단이 사전에 약속했던 진형을 유지하며 그림리퍼에게 접근 중이었다.
선두는 전사단이었다. 방어 전문가와 맷집 좋은 중전사들을 앞세운 수비대가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한 채 전면으로 나섰고, 그 뒤로는 광전사, 라이칸스로프 등 공격적인 성향의 전사들이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도록 칼을 갈고 있었다.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뒤편에는 역시 수백에 이르는 마법사단이 오와 열을 맞추어 부대별로 진을 이루었다. 각 부대의 대형은 가로로 길게 늘어선 횡진으로, 하나의 횡진이 하나의 포대(砲隊)였다. 한순간에 화력을 퍼붓는 게 아니라, 번갈아 돌아가면서 화력 지원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법사단의 우측에는 순백의 사제복으로 의상을 통일한 사제단이 자리했다. 마법사단과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선 횡진을 이룬 그들은 벌써부터 휘황찬란한 광휘를 번쩍이며 주문의 영창에 들어간 상태였다.
“사제단 쪽은 미리 준비에 들어간 듯하군요. 음, 부대이동과 주문 준비를 동시에… 조금 무리가 아닙니까?”
“아니요. 제가 보기엔 오히려 적기 같네요. 그림리퍼의 기운이 생각보다 훨씬 강해요. 카산드라 단장 역시 그점을 인지한 것이겠죠. 노련한 사람이에요.”
유메르바인의 입에서 연합사제단의 수장, 대신관 카산드라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자, 그녀가 속해 있는 클럽 그믐달의 오너가 만족스럽게 웃는 것이 보였다.
“하하. 괜히 아벨의 대신관이 아니지요. 그녀는 자기 역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긴… 일단 저 어둠을 걷어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서둘러야 합니다.”
이번 대 그림리퍼 전, 그 초전(初戰)의 성패는 사제단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지는 사제단의 신성 주문이 그림리퍼를 둘러싼 저 죽음의 기운을 얼마나 약화시킬 수 있느냐였으니까.
사제단의 준비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만큼 선봉대의 희생도 적어진다. 그 점에서 본다면 약간의 무리를 감수하고 미리 주문을 준비시킨 카산드라의 판단은 매우 현명했다.
“부사령관님! 사제단의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좋아요. 성역화(聖域化)를 시작하세요.”
“예!”
마침내 본격적인 개전을 알리는 명령이 떨어졌다.
잠시 후, 이백여 명의 병력이 운집한 사제단 쪽에서 장엄한 빛의 파도가 일어났다. 사제단 예하 제 1부대의 신성력을 한 데 결집한 막강한 힘이었다.
성난 신의 분노일까. 성스러운 빛의 입자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용솟음친 빛무리는 이내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림리퍼의 암흑지대를 향해 밀어닥쳤다.
넘실거리는 빛의 물결에 휘말린 암흑지대는 마치 소금을 뿌린 달팽이처럼 오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만연하던 짙은 어둠이 서서히 옅어지면서 꽁꽁 감춰져 있었던 내부의 풍광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중에는 외곽을 돌며 충실히 작전을 수행하는 선봉대의 모습도 있었다.
“오! 오오!”
“효과가 있습니다!”
“저기 선봉대! 선봉대는 무사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오십여 명의 인원으로 출진한 선봉대의 수는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지금 보이는 숫자는 대략 마흔 남짓. 그 짧은 시간에 열이 넘는 인원이 낙오한 것이다.
“…사령관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림리퍼도 보이지 않는군.”
유메르바인의 말을 노구덕이 받았다. 두 사람의 말대로, 일차적으로 펼쳐진 사제단의 신성 주문은 그림리퍼가 몰고 온 먹구름을 거둬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최심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마 가장 먼저 돌입한 무릴로는 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놈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터.
신성 주문이 제대로 듣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그를 지원하는 게 급선무였다.
“각 부대에 명령을 하달하세요. 사제단 2부대는 다음 성역화를 준비하고, 전사단은 두 번째 성역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전장으로 돌입합니다. 마법사단 역시 전사단이 진입하면 바로 화력 지원을 하라 이르세요.”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메르바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활동하기 편한 전투용 로브를 몸에 걸쳤다. 나비처럼 크게 날갯짓을 하며 가냘픈 몸에 덧씌워진 남청색의 배틀로브. 개미처럼 잘록한 허리 위쪽에는 ‘파멸의 현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주색 육망성(六芒星)이 그려져 있었다.
완연한 전투마법사의 위상을 갖춘 유메르바인은 흑단 같은 머릿결을 뒤로 쓸어 넘기며 부사령관의 직인을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레전더리 오너, 미리 지휘권을 인계하겠어요.”
“벌써 참전하시려는 건가?”
“이 싸움, 길게 끌 필요는 없으니까요.”
“음. 고맙군. 건투를 빌겠소.”
레전더리 오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올려놓은 인장을 집어 들었다. 파멸의 현자 유메르바인이 조기에 참전한다면 그만큼 헌터들의 희생도 줄일 수 있을 터. 여러 식구들이 참전한 그의 입장에선 당연히 반길만한 결정이었다.
지휘권을 인계한 유메르바인은 그대로 사령부를 나설 듯하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는 그 고아한 낯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머문 곳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노구덕이었다.
“노구덕 위원은 계속 앉아있을 생각인가요? 사랑스런 부하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 마당에 말이죠.”
“끙.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그렇게 말하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나.”
최근 그에게 여러 가지로 해묵은 감정이 많다보니, 한마디 한마디가 날이 선 것처럼 날카롭다. 쓴웃음을 지은 노구덕은 결국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뗄 수밖에 없었다.
유메르바인은 이 자리에서 그가 늑대왕 가리발디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 그를 끌어들이려는 얕은 수작이 훤히 보였지만, 그녀에게 지은 죄가 있는 노구덕은 이번만큼은 그 소심한 복수에 기꺼이 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그녀가 재촉하지 않아도 따로 전장에 나설 생각이었으니.
“노구덕 위원, 직접 나설 생각이오?”
“위험할 텐데…….”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속사정을 모른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의외라는 시선이 쏟아졌다. 노구덕이 대외적으로 실력을 내보인 것은 칼립스 리그에서 활동할 때가 전부. 그 정도 실력으로는 이 전장에 휘말린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몇몇 이들이 심려 섞인 말을 건넸다. 반면, 저 옆에서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 피에스타 라인의 오너들은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은근히 반기는 듯한 눈치였다. 십중팔구 노구덕이 이 전장 어딘가에서 콱 죽어주기를 바라는 심보가 뻔히 보였다.
“이런 늙다리지만,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을 거요. 나름대로 믿는 수도 있고…….”
“수뇌부가 전장에 나가면 지휘계통에 혼선이 오지 않겠소?”
노구덕은 힐끔 유메르바인을 쳐다봤다. 네가 말을 꺼냈으니, 챙기는 것도 네가 알아서 하란 의미다. 영리한 유메르바인은 곧장 그 눈빛에 응답했다.
“노구덕 위원은 단독으로 행동하면서 전장 수습을 맡아주세요. 난전이 벌어지면 낙오자나 부상자들을 챙길 여력도 없어질 테니까요.”
말인즉, 전장을 오가면서 이탈자들을 챙기란 소리다. 따로 명령권도 없고, 실상 말하자면 잡무를 떠넘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다른 수뇌부들을 납득시키기에도 충분한 명분이다.
그러나 제안을 한 유메르바인이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결코 그 정도가 아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고, 노구덕도 알고 있었다. 저 말은 그를 전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저 구색일 뿐.
“그 정도가 좋겠군. 나도 굳이 거추장스런 지휘권을 넘겨받고 싶진 않았으니까.”
“잘 생각하셨어요.”
“사족은 됐고, 이만 가도록 합시다.”
싱긋 웃어 보이는 유메르바인에게 허허로운 너털웃음으로 답한 노구덕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힘껏 기지개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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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개전(開戰)에 돌입한 것은 무릴로가 이끄는 선봉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선봉대는 가장 먼저 ‘작전’을 시작한 부대는 아니었다. 여기, 진즉에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작전에 들어간 부대가 있었으니까.
바로, 인비지블 시먼이 이끄는 유격대다.
암살자, 저격수, 레인저 등 특수한 클래스를 가진 헌터들로 구성된 유격대의 역할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명목상은 교란 및 암격(暗擊)이지만, 때에 따라서 불리한 아군을 지원할 수도, 그 기동력을 살려 전장 수습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근데 말이야, 이왕 할 거라면 그런 뒤처리보다는 주인공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언뜻 보면 혼자서 지껄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 난쟁이처럼 왜소한 체격을 지닌 그는 대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종족, 하플링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체구를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코가 베일 수도 있었다. 그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암살자인데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덤불 속에서 혼자 중얼중얼 얘기하던 그는 문득 불만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은신은 풀어도 되니까, 대답 정도는 해 달라고. 이러면 내가 꼭 미친놈처럼 보이잖아.”
“흥. 철저하게 은신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예요?”
그의 푸념에 곧장 반응하며 허공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 여인은 다름 아닌 신소율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핀잔을 들어먹은 시먼은 그녀의 몸을 가린 투명한 망토자락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투명망토. 언제 봐도 참 멋진 장비란 말이야.”
“왜, 부러워요?”
“부럽기는. 다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지.”
“이익!”
신소율의 가지런한 아미가 상큼하게 위로 치솟았다. 빠득 잇소리를 낸 그녀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다른 덤불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율아, 그만해라.”
“대장도 문젭니다. 지금 시시콜콜 말싸움할 땝니까?”
앞서 묵직한 음성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음험한 인상의 중년인은 두억시니의 김철환이고, 등 뒤에 자기 몸뚱이보다 긴 대궁을 달고 있는 청년은 크로스게이트의 울레인이었다. 둘 모두 이쪽 방면에는 저명한 실력자들로서, 시먼의 유격대에 속해 있는 이들이었다.
“흐, 그래, 그래. 자중하도록 하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사시일? 진짜 한번 해보자는 거예요?”
“꼬맹아,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실력으로 까부는 게 아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새겨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만하라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이다. 김철환과 울레인은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진혼의 시먼과 아이리스의 신소율은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렇게 사이가 나쁘면 차라리 서로 다른 조에 배치되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으련만, 오히려 시먼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신소율을 자기 조에 배치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선이다.
그러니 같은 조원인 나머지 두 사람으로서는 죽을 맛일 수밖에. 일견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전을 앞두고 분위기를 망치는 건 암만 봐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코멘 달아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일일이 댓글은 못 드렸지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보답으로 다음 편은 .. 12시까지는 좀 무리일 것 같고, 새벽녘에 하나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축분 보니까 가능할 것 같네요. 리리플은 해당화에 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아이리스 애들이 각자가 속한 부대에 있는 강자들을 보고 나름대로 정신적으로, 실력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챕터입니다.
덧) 유메르바인의 제안에는 그저 심증으로만 있는 ‘초월적 존재’를 끌어내기 위한 계산도 깔려 있습니다. 유메르바인이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는 저번에 살짝 묘사가 되었었죠.
이해를 위해 약간의 사족을 덧붙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저녁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