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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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꿍꿍이
“그만들 합시다. 슬슬 움직여야 할 땝니다. 내분으로 말아먹은 동부의 사례를 잊은 겁니까?”
“뭐,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만.”
입아귀를 실쭉하게 일그러뜨린 시먼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신소율을 지나치며 픽 입매를 터뜨렸다. 경력도 일천한 하룻강아지가 으르렁거리는게 퍽 재미있다는 태도다.
“…칫.”
그 의미를 모를 신소율이 아니었지만, 여기서는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눈치 없이 실랑이를 계속 하다간 김철환이나 울레인에게 크게 꾸중을 들을 테니까.
그녀가 속한 곳은 유격대의 작전을 총괄하는 지휘조. 4인 1조로 편성된 지휘조의 막내였다. 참고로, 이번 그림리퍼 전에 참전한 유격대는 총 10개 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저 인간의 조에 걸릴 게 뭐람.’
애써 분기를 가라앉힌 신소율은 전황을 주시하는 시먼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쩐지 첫 대면부터 심상찮은 말들을 하더라니. 저 인간은 아이리스에 지독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소율? 오호라, 그 아이리스의?’
‘네… 그런데요?’
‘결정했다. 너는 지휘조다.’
‘에엑?’
…그때는 마냥 좋았었지. 당시를 상기한 신소율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지휘조에 들어갔을 때에는 나름대로 뭔가 중요하고 멋진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부푼 적도 있었다. ‘지휘조’라는 어감, 어쩐지 멋있고 중요해 보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시먼이란 인간의 실체를 모를 때의 이야기였다. 막상 지휘조에서 그녀가 배정받은 역할은 조장이자 지휘관인 시먼의 심부름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잡무를 보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다. 어느 집단에서든 막내의 역할이란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고, 하물며 군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틈만 나면 갈구고 시비를 터는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다.
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어 뒷조사를 해보니, 알고 보니 그는 노구덕과 사소한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아이리스를 대놓고 싫어하는 인간이라, 사석에서도 그 흉을 본다나, 어쩐다나.
그제야 그가 첫 대면에서 했던 말들의 의미를 알아차린 신소율은 더는 참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확 바꿔서, 시먼이 시비를 걸면 똑같이 빈정대는 식으로 응수했다. 그녀의 성질머리로 삼 일 간이나 참은 것도 꽤나 오래 참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후 시먼의 반응은 그녀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격하게 받아치면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작게 구시렁거리는 선에서 넘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막내인 신소율이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경질을 내는데도 지나가는 투로 위협적인 몇 마디만을 던질 뿐, 그 이상의 리액션은 없었다. 평소 알고 있는 그의 성격대로라면 믿지 못할 만큼 온화한 반응이었다.
이제는 신소율도 정말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별 생각 없이 두고두고 괴롭히는 건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에휴. 그래도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야.’
다행이라면 안세희의 경우와는 달리, 다른 조원들은 그녀에게 꽤나 호의적이었다. 물론 이쪽 계통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특성상, 괴팍하고 칙칙한데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김철환이나 울레인이나 근본적으로 질이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야, 꼬맹이. 작전 설명하는데 뭐하는 거냐. 집중해라.”
“…웃.”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앞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시먼의 낯짝이 보였다. 그밖에 김철환과 울레인의 빤한 시선을 느낀 신소율은 창피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래서 애송이는… 쯧쯧.”
얄미운 목소리가 속을 울컥 뒤집히게 만들었지만, 딴 생각 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여튼, 저길 봐라.”
끝까지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시먼이다. 부글부글 타는 속내를 가까스로 눌러 앉힌 신소율은, 겨우겨우 무표정을 가장한 채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가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뜰 수밖에 없었다.
“저건…!”
그녀가 잡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전황은 빠르게 급변하는 중이었다.
2차 성역화의 여파로 그림리퍼의 암흑지대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고, 오백여 전사단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열린 길을 따라 놈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거대한 방패를 앞세운 전사단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가는 가운데, 앞서 분투한 선봉대가 그들의 비호 아래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그중에는 잔뜩 굳어진 얼굴의 박지현도 보였다.
그때까지도 이 태풍의 눈이라 할 수 있는 그림리퍼의 본체는 보이지 않았다. 2차 성역화로 약 5, 6할에 달하는 영역을 빼앗기는 했지만, 여전히 죽음의 땅 최심부는 건재했다. 거의 고위사제 백 명 분에 달하는 신성력을 정통으로 맞고도 이만큼이나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놈이 최흉(最凶)의 카름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놈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한 것은 진군을 시작한 전사단이 비좁아진 죽음의 땅 경계에 다다랐을 때였다.
먹구름이 들어찬 하늘에서, 그리고 새카맣게 먹물이 진 땅 속에서.
명계의 문을 열고, 어둠의 존재들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암흑 속을 새하얀 빛을 뿌리는 뼈무더기들이었다.
-까악! 까악!
요망하게 지저귀는 까마귀 무리가 벌떼처럼 나타나 검은 하늘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까마귀… 아니, 죽기 이전에는 필시 까마귀라 불렸을 그 존재들은 허옇게 뼈만 남은 골조(骨鳥) 무리였다.
불길한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인 수천 마리 골조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를 따라 무른 흙바닥을 뚫고 앙상한 뼈마디들이 불쑥불쑥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곰, 호랑이, 늑대, 토끼, 그리고… 인간. 각양각색의 골격을 갖춘 해골 군단은 그 수만도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언데드 중 가장 약한 스켈레톤들이라 할지라도, 저만한 숫자가 길을 막고 있다면 그 자체로 거대한 장벽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텅 빈 눈구멍에서 으슬으슬한 인광을 뿜어내고 있는 해골들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멀리서 보자니, 하얀 해골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꼭 드넓은 평야에 두텁게 눈이 쌓인 것 같다. 신소율은 그 압도적인 숫자에 기가 질린 나머지 헛!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뭐가 저리 많아…….”
“사전 훈련 때 들었던 건 개나 줬나 보군. 저건 ‘해방(解放)’이다. 다수를 상대할 때 보이는 놈의 주요 패턴 중 하나지. 지금까지 수확한 생명을 한 번에 풀어 머릿수를 급격하게 늘리는 거다.”
“윽. 망령군대를 소환하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고요.”
“그럼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지. 그림리퍼의 망령군대가 무서운 건 그 무지막지한 숫자도 숫자지만, 갈수록 강력한 개체가 출현한다는 거다. 기록에 의하면 리치와 데스나이트를 부린 적도 있다고 하더군. 저 영역 안에서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니까 나도 안다고 했잖아요….”
투정부리듯 얼버무려 봤지만, 이미 탄로난 무식을 감출 순 없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짙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린 시먼은 해골군대와 맞붙기 시작한 전사단 쪽을 향해 작게 턱을 들어보였다.
“저 녀석들은 미끼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주연을 돋보이게 해 줄 훌륭한 조연들이지.”
“대장, 뭘 하려는 겁니까?”
“말했잖아. 이왕 할 거라면 주인공이 되는 편이 좋다고.”
거창한 서두와 통 큰 포부. 얼핏 듣기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괜스레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터. 그러나 시먼은 나머지 조원들의 영 미덥지 못한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생각한 바를 역설했다.
“방금 전, 유메르바인이 직접 나선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 파멸의 현자가… 벌써요?”
“그 녀석은 원래 그래. 쓸데없는 희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은근히 고리타분한 성직자 같은 면이 있으니까.”
뭔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듯, 작게 눈가를 찡그린 시먼은 평소처럼 거들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성격상, 참전하자마자 큰 거 몇 방을 날리겠지. 저길 보라고. 표적들이 나 죽여줍쇼하고 떼거지로 몰려 있잖아. 사람인 이상 분명히 그럴 거야.”
벌레떼처럼 우글거리는 해골군단을 본 세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여졌다. 은근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벌레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 곳 한복판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저건 말 그대로 더미. 떼로 처치한다 한들 금방금방 되살아나 다시 앞길을 가로막을 거다. 유메르바인도 무한정 마법을 난사할 순 없을 테고… 기회는 잘해야 한두 번 뿐이다.”
“흠. 길이 열렸을 때… 단번에 그림리퍼에게 파고 들자는 겁니까?”
“그래도 똑똑한 녀석이 있구만.”
가장 먼저 시먼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은 김철환. 그러나 그는 이어진 칭찬에도 그리 기분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시먼이 야심차게 내놓은 계획이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무립니다. 겨우 유격대의 전력만으로 그림리퍼를 상대하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멍청한 소리. 오히려 그때가 적기다.”
“무슨…?”
“그림리퍼가 ‘해방’에 주력하고 있을 때. 그때가 놈의 내구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시점이다. 비축해 두었던 생기를 외부로 돌리고 있으니, 당연한 거지.”
“그게… 정말입니까? 어제까지는 전혀 그런 얘기가 없었잖습니까.”
조원들은 하나 같이 미심쩍은 눈빛들이었다. 당연했다. 시먼이 말한 그림리퍼의 약점. 그건 회의 중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었으니까. 그는 왜 그런 중요한 정보를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시먼 정도 되는 인물이 조원들의 시선에 어린 의혹을 모를 리 없다. 의미심장하게 어깨를 으쓱한 그의 어조가 훈풍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나 역시 힘들게 알아낸 정보니까.”
말인즉, 왜 어렵게 알아낸 정보를 남과 공유해야 하냐는 소리다.
“하지만….”
“이봐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령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심지어, 내가 이걸 알아낸 것도 사령부의 어느 분께서 친절히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뭐, 이런 정보를 애써 숨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말도 안 돼. 사령부가 일부러 정보를 통제했다고요?”
“애송이, 호들갑 떨지 마. 멋대로 속단하지도 말고. 이해 못할 바도 아니잖아?”
“뭐라고요?”
“약점을 알려주면? 그 뒤엔 어떻게 할 건데?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눈에 불을 켜고 그림리퍼의 핵을 노리고 있어. 언제 어떤 변수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야. 당연한 거지. 재앙급 카름의 핵이라는 건 인생을 역전하고도 남을 보물이니까. 어느 정도의 정보 통제는 필수란 거다.”
“……!”
“하물며 놈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방도를 여기저기 퍼트렸다고 치자.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영웅 심리에 물든 미친놈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그런 놈이 나타나는 순간 애써 짜놓은 부대고, 진형이고 다 개털이 되는 거야. 그럴 바에야 원래 그러기로 예정되어 있는 우리가 주연을 하는 게 낫잖아? 중요한 건…….”
의기양양하게 말한 시먼의 목소리가 별안간 모기 날갯짓 소리처럼 작아졌다.
“나는 공을 세울 방법을 알고 있고, 그 공을 너희들과 나눌 용의가 있다는 거지.”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일단 올리고, 나중에 집에 가서 리리플 달도록 하겠습니다. 주무시는 분들은 꿀잠 되시고, 깨어있는 분들도 좋은 하루 되시길!
항상 감사합니다!
ppuya12 / 코멘 감사합니다!
왜이리들다재밌지 / 구경만 할 수 없죠 ㅎㅎ
은신설야 / 넵 항상 감사합니다~!
가식적썩소 / 구더기 출동
유수월향 / 물론 그쪽 방면의 얘기시겠죠?
asd메이지 / 주는 것 없이 미운놈인가요 ㅋㅋ
북치네 / 감사합니다. 추천 덥석!
호야[虎夜] / 가만히 있을리가요 ㅎㅎ;
카론느 / 괜히 달았네요 .. 사족 ㅠ
코끼리손 / 큼큼… 무릴로 ..도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겠죠?
모그퐁 / 감사합니다!
모욕감 / 넵 좋은 하루 되시길!
꼼아꼼아 / 구더기가 참 많이 성장했네요 그러고보면 ㅎㅎ;
리눅 / 재미지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수[神手] / 나름대로 수가 있겠죠?
무꾸914 / 지금 보기엔 영 아닌데 말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