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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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죽음의 군주
136# 죽음의 군주
전사단이 치고 들어오고, 끝없는 물량의 언데드 군세가 출현하면서 전투의 치열함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대부분이 산짐승들의 뼈로 이루어진 언데드 군단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워낙에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하다보니 상대하는 입장에서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조심해! 왼쪽이 빈다!”
정신없이 싸우던 와중, 동료의 고함에 급히 고개를 돌린 전사의 시야에 무섭게 돌진하는 멧돼지가 들어왔다.
-꾸이이익!
그래도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것일까. 소리를 낼 성대도 없는 주제에 용케 돼지 울음을 내며 끽끽거린다. 잘 생각해 보면 꽤나 신기한 모습이었지만, 산만한 덩치를 지닌 멧돼지 앞에 선 전사는 그럴 의문을 품을 겨를도, 관심도 없었다.
“당할 것 같으냐! 허업!”
파칵!
두터운 타워실드에 얻어맞은 멧돼지가 힘없이 비틀거렸다. 고위 언데드도 아니고, 고작 되살아난 멧돼지가 감당하기엔 방패에 실린 위력이 너무도 강력했다.
“킁. 어디서 돼지 새끼 따위가.”
한 차례 거센 콧김을 뿜어낸 전사는 처참하게 으스러진 뼈무더기 속에 파묻힌 타워실드를 빼냈다. 꽤 보기 드문 덩치를 가진 멧돼지였으나, 가디언(Guardian) 클래스가 완숙한 경지에 이른 그에게는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않는 피라미에 불과했다.
“…피라미도 떼로 모이면 굉장히 짜증난단 말이지.”
방패 너머로 끝도 없어 보이는 하얀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을 보니, 저절로 한탄에 가까운 푸념이 흘러나왔다.
전황은 분명 유리했다. 언데드들의 숫자가 많다곤 해도 이쪽 역시 고르고 고른 정예들. 전사단은 굳건히 진형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안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작전이 차질없이 먹혀들고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헌터들도 결국은 인간. 지치지 않는 불사의 마물들과는 달리 스태미너가 무한한 게 아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계속 이렇게 체력을 갉아 먹히다가는 정작 중요한 때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젠장… 우리 마법사단은 대체 뭘 하는 거야? 편하게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서 무슨 준비가 이렇게 오래 걸려? 슬슬 화력지원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격렬한 최전방에서 몸을 혹사하고 있다 보니, 자연히 후방의 마법사들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속에 쌓인 짜증을 애꿎은 마법사에게 풀어대던 전사는 갑자기 걸음을 주춤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윽! 제, 제길…!”
“무슨 일이야?”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방패 아래로 기어들어와 갑옷의 이음매 사이로 날카로운 앞니를 박아 넣은 본랫(Bone rat)이었다.
“쥐! 이런 빌어먹을 쥐새끼가!”
-찍!
분노의 발길질을 당한 본랫은 음울한 단말마와 함께 와지직 짓밟혀 으스러지고 말았다. 전사는 놈을 가루로 만들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납작하게 눌러 붙은 뼛가루를 계속해서 짓밟아 다져놓으며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토해냈다.
“염병! 멧돼지에 쥐새끼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이봐, 화풀이할 시간 없어! 어서 대열을 갖춰!”
“나도 알아!”
짜증스럽게 대꾸한 전사가 다시 대열에 합류했을 때였다. 언데드 군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전사단 사이로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전사단장, 콜트레인의 중후한 음성이었다.
“전군, 제자리에! 대열을 유지하라! 곧 화력지원이 시작된다!”
“어휴, 이제야….”
“늦었잖아. 마법사 놈들. 하여간 굼뜨기만 해서는…….”
드디어 기다리던 불꽃 쇼의 시작이다. 전사단의 헌터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밝은 얼굴로 위치를 고수했다.
헌터들의 히죽거리는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한 것일까? 왠지 모르게 전사단을 덮치는 마물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지만, 전사단 수비대의 철통같은 방어를 뚫기엔 한참이나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방의 하늘에 때 아닌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더불어 등을 후끈하게 만드는 열기가 노도처럼 일어났다. 후방 포진을 완료한 마법사단에서 일제히 포대를 가동한 것이다.
화르륵!
작은 바윗덩이 크기의 화염구부터, 과장 조금 보태 집채만 한 크기의 불덩이까지. 다양한 크기의 불꽃들이 검은색 일색의 하늘을 진홍빛으로 물들였다.
“가라!”
“다 죽여버려!”
환호하는 전사단의 대열을 훌쩍 넘어간 불덩이들은 전투 내내 날카로운 부리로 전사들을 괴롭혔던 본 버드(Bone bird) 무리를 흔적도 없이 잿더미로 만들고도 모자라, 벌떼처럼 몰려 있는 언데드 군단의 중심부에 잔혹한 화염의 비를 선사했다.
작열하는 불꽃은 순식간에 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언데드가 염계 주문에 약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 사나운 불꽃의 폭풍에 휘말린 언데드들은 우왕좌왕 자기들끼리 뒤엉키며 난장판을 연출했다.
‘과연 찌꺼기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마법만한 게 없군.’
전사단 후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여 미터나 떨어진 격전장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열기가 이쪽의 공기까지 후텁지근하게 만들 정도니, 그 위력을 알만했다. 역시 서부의 정예들다운 막강 화력이었다.
게다가, 저런 장면은 그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붉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염의 소나기. 그건 레드레인(Red rain) 임유진의 장기였으니까.
실상, 속성을 따져보자면 그림리퍼를 상대하는데 임유진보다 적격인 사람은 없다. 만약 임유진의 몸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번 대 그림리퍼 전은 그녀를 위한 독무대가 되었을 테고, 아이리스와 임유진의 위상도 비할 데 없이 높아졌을 터.
‘쯧. 미련은 버려야지.’
노구덕은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었다.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둬봤자 무얼 하겠는가. 지금은 현재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삼백여 마법사가 쉬지 않고 교대로 융단폭격을 퍼부은 덕분에, 헤아릴 수 없이 많던 언데드 군단은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다. 흰 물결을 이루던 전장엔 오로지 시커멓게 타다 만 뼈다귀들 뿐. 그나마 멀쩡한 언데드들도 불타는 대지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움츠린 모습들이다.
마법사단의 폭격은 무분별한 난사가 아니었다. 거센 불길로 뒤덮인 대지는 마치 레드카펫이 깔린 길처럼 저 앞쪽의 어둠을 향해 쭈욱 이어져 있었다.
죽음의 근원, 그림리퍼로 향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때를 맞춰, 사제단이 있는 쪽에서 또다시 광역 신성 주문이 발현되었다. 이번엔 적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아군 전사단을 목표로 한 광역 주문이었다.
은은한 빛을 뿌리며 전사단 전원의 몸에 휘감긴 주문의 정체는 레지스트 파이어(Resist fire). 아군의 화염 저항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보호 주문이었다.
쌀이 익어 밥이 되었고, 손에 숟가락까지 쥐어졌다. 이제 윤기가 찰찰 흐르는 밥알을 떠서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면 된다.
서부에서 가장 노련한 헌터인 콜트레인은 이 기회를 놓칠 남자가 아니었다.
전사단의 모든 인원이 축복의 효과를 받은 것을 확인한 전사단장 콜트레인은 자기 키만 한 그레이트소드를 머리 위로 치켜들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전구우우운—–!”
두껍게 덧댄 흉갑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돌겨어어어억—!”
그 목울대에서 천둥이 내리치는 것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오오옷—-!”
기다리고 기다리던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각자의 무기를 힘껏 치켜든 전사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뒤바꾼 뒤, 질풍노도처럼 무서운 기세로 진격을 개시했다.
지금껏 최전방을 담당하던 수비대는 중앙에서부터 좌익(佐翼)과 우익(右翼), 양 갈래로 갈라져 진격로를 확보하고, 여태껏 방어선 안쪽에서 칼을 갈고 있던 공격대가 마침내 전면으로 나서며 그 비수를 꺼내들었다.
새로이 중군(中軍)이 된 전사단 공격대의 대장은 본 크러셔(Bone crusher) 바르트라. 강맹한 회오리바람처럼 휘두르는 쌍 메이스가 일품인 남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 공격대의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 별명을 지닌 인물이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 가자! 저 해골바가지들을 남김없이 작살내버려라!”
“크하하하!”
“내가 먼저다!”
과연 공격대. 전사들 중에서도 야수와 같은 호전성을 지닌 자들만 모아놓은 부대였다. 우리에서 풀려난 공격대의 맹수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앞에서 어기적거리는 언데드들을 순식간에 휩쓸어버렸다. 그 중에는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타다 남은 본 울프의 척추를 뚝 끊어버리며 광포한 포효성을 내지르는 이두식도 섞여 있었다.
“두식이 녀석, 신나 보이는군.”
노구덕도 가만히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 역시 뚫린 길을 따라 미쳐 날뛰는 공격대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죽어라!”
“이 망할 해골 새끼들!”
싸움의 열기에 전염된 헌터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급격히 흥분한 모습들이었다. 사방에서 거친 욕설과 행동이 잇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흐느적거리는 해골들을 아예 빻아서 가루로 만드는 것은 예사였고, 어떤 정신 나간 놈은 개처럼 입에 뼈다귀를 물고 싸우는 놈도 있었다.
그러나 부대의 가장 후미에서 그들을 따르는 노구덕의 표정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어, 주변 열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는 섣불리 이 싸움에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주된 목적은… 말하자면, 관전이었다.
‘레전더리의 콜트레인… 나이가 있다지만 향후 오륙년 정도는 끄떡없을 것 같고… 본 크러셔 바르트라도 인상적이군.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어. 섣불리 장담은 못하겠지만… 최소한 두식이보단 강한 것 같군.’
‘저치가 피에스타의 소드브레이커(Sword breaker). 톱날 칼이라니. 실제로 보니 신기한데.’
‘그리고 저자는… 두억시니의 혈검귀(血劍鬼) 문일봉인가? 북부 출신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싸우는 법이 독특하군. 적으로 만나면 까다롭겠어.’
노구덕의 눈알은 이리저리 영활하게 굴러가며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헌터들의 정보를 수집 중이었다. 처음부터 전장에 나서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다.
이만한 실력자들을 한 자리에 놓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굉장히 드물다. 게다가 지금 시대는 이전처럼 헌터가 카름만을 사냥하는 시대가 아니라, 헌터가 헌터를 사냥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질 수도 있는 시국이다.
이번 대재앙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나면, 또다시 각 세력 간의 각축전이 벌어질 터.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헌터들을 눈여겨 봐두는 건 필수였다.
그러나, 그의 얌체짓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양 사이드로 단단한 벽을 세우고 있는 수비대 쪽에서 난데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으아악! 그림자! 그림자를 조심해!”
“배, 밴시(Banshee)! 자극하지 마라!”
“리치다! 광역기에 대비해!”
저급 언데드 군단이 쓸려나간 자리를 메운 것은 빅리그의 레귤러에서도 한두 마리 구경하기 힘든 고위 언데드들이었다.
대검을 휘두르며 종횡무진 헌터들의 대열을 파고드는 목 없는 기사 듀라한.
망령들을 부리는 사악한 마법사 리치.
치명적인 울음으로 정신을 직접 공격하는 저주의 마물, 밴시.
그밖에도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어둠의 마물 셰이드, 해골 군단을 지휘하는 본 커맨더 등 까다롭기 그지없는 카름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림리퍼는 순순히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재앙급 카름…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깐깐한 녀석이로군.”
이제는 손 놓고 방관할 수 없는 처지가 된 노구덕은 쓰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바야흐로, 제 2차전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군요.. 우울한 날입니다.
이번 일요일은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집안사정 때문에 잠시 아래에 내려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 좋은 일로 가는게 아닌지라, 기분이 좋지 않네요.
그래도.. 이번 주로 그럭저럭 일이 끝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다음주 연재와 연참에는 영향이 없을 것 같을 것 같네요.
연재 주기가 정상적이라면 다음주 내로 그림리퍼 파트 끝나고 3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네요.
왠지 빈대떡을 부쳐먹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