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50)
0550 / 0777 ———————————————-
144# 새내기들
144# 새내기들
어느덧 녹음이 우거진 계절이 되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후텁지근한 공기가 식도를 콱 막아버리는 느낌입니다.
어허험, 그러고 보니 벌써 5년이 지났군요. 제가 이곳에 온 것 말입니다.
아, 제가 누구냐고요? 실례, 실례. 소개를 깜박했군요.
제 이름은 문석현입니다. 원래는 헌터였지만, 지금은 사무직으로 전환했죠. 음… 가끔은 윗선의 지시에 따라 대장일에, 목수일도 합니다만. 어쨌든 주된 업무는 사무직입니다.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죠.
저는 바로 그 ‘레그나토르’의 인사담당관입니다. 헌터들의 징병에서부터 사무 보조까지 아이리스의 모든 인력 채용에 관여하죠. 그리고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 채용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습니다. 물론 최종 결재는 오너… 아니, 아니… 의장께서 하십니다만. 어흠! 절대 제 자랑은 아닙니다.
…응? 레그나토르를 모르신다고요? 허참, 어디 산속에 처박혀 있기라도 하신 겁니까? 세상물정에 이토록 무지해서야… 쯔쯧….
할 수 없죠.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명 ‘철의 동맹’이라 불리는 레그나토르는 서부에서 가장 강대한 세 곳의 단일 세력 중 하나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현재 서부는 과거 군다르 왕국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도미니온과, 구 클럽 레전더리가 주도하여 결성한 서부연맹, 그리고 클럽 아이리스와 그 동맹 세력이 결집한 레그나토르로 쪼개진 상태지요.
그 팽팽한 세력 구도를 전력의 비율로 따지자면 1강 2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강은 말할 것도 없이 군다르의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여러 유수의 클럽들을 끌어안은 도미니온이고, 각기 레전더리, 아이리스를 중심으로 뭉친 서부연맹과 레그나토르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2중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도미니온이 멋대로 독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 상황은 1강 2약이 아니라, 1강 2중이니까요. 절대적인 병력의 숫자는 도미니온이 단연 앞서지만, 실상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정예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서로가 상당히 팽팽합니다.
도미니온에는 유메르바인, 시먼, 심준호, 글라우버 등의 강자가 있고, 서부연맹에도 콜트레인, 바르트라, 이세미, 문일봉 같은 저력 있는 인물들이 있죠. 이쪽 역시도 의장님과 안주인님을 비롯해서 많은 강자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뭐,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력 비교를 하는 게 무의미하긴 했습니다. 이 세 세력들이 서로 원수를 진 것도 아니고, 이해득실 때문에 따로따로 뭉치긴 했지만 적어도 적대 관계는 아니었거든요. 도미니온의 체스터 님과 저희 레그나토르의 노구덕 의장님의 긴밀한 공조 관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요. 또, 파멸의 현자 유메르바인 님과 의장님 내외분은 사적으로도 여러 번 만남을 가질 만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그것도 올해 되어서는 옛말이 되었지요.
최근, 도미니온과 서부연맹 사이에 급격한 냉기류가 흐른다는 소문입니다. 도미니온이 서부연맹의 정예 헌터들을 상대로 은밀히 로비 활동을 벌였다가 발각됐다나요. 핵심 전력을 빼 가려고 한 것 때문에 서부연맹에서 굉장히 언짢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요.
그렇잖아도 요새 도미니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얼마 전 칼립스 일간지에 도미니온의 패권주의 행보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고요. 어쩌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레그나토르는 어떻게 되는…….
“문석현 담당관, 혼자 뭘 그렇게 중얼중얼하고 있으신지?”
“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농땡이 피우는 모습을 들켜버린 문석현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여기 행정부에서 그가 머리를 숙일 만한 사람이라면 행정부의 수반인 소피아밖에 없다.
“이번에 새로 들어올 신입들에 대한 보고서는요?”
“거의 작성이 끝났습니다. 약간의 말미만 주신다면 금방…….”
“그럴 시간은 없네요. 거의 작성이 끝났다면 지금 봐도 되겠죠?”
“무, 물론입니다.”
오늘따라 그녀의 말투가 유난히 까칠했다. 평소의 유들유들한 소피아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익히 알고 있는 문석현은 조용히 목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는 문석현의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냉큼 집어들었다. 곱게 땋아 내린 흰 머리칼이 세차게 휘날릴 정도로 격한 몸짓이었다.
“…총 헌터 78명. 각 부서별 사무 인원은 129명… 이번에는 헌터들의 수가 많이 줄었네요?”
“그게, 아시다시피 최근 기류가 심상치 않잖습니까. 중립지대에 있는 헌터들은 슬슬 간을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죠. 그들로선 목숨이 걸릴 일이니 딱히 탓할 일도 아니네요.”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몸을 사리는 이들은 이쪽으로서도 별로 달갑지 않다. 소피아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차린 문석현은 나직하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 뽑은 인원들은 레그나토르의 충실한 수족이 될 겁니다. 인성 확실한 재원들로 뽑았으니까요.”
“…하긴, 문석현 담당관의 ‘안목’이라면 믿을 만하죠.”
“하하핫…. 감사합니다.”
뜻밖의 칭찬을 들은 문석현은 머쓱하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이제 완전히 만개한 문석현의 ‘안목’은 레그나토르와 아이리스가 지닌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였다. 상당히 추상적이긴 했지만, 그는 클럽의 장래에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을 구체적으로 분별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적의(敵意)를 지닌 스파이를 골라낼 수도 있었다.
그가 Unique 등급의 재능,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철저한 극비. 겉으로는 조금 얍삽한 인상의 허술한 아저씨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문석현은 어엿한 행정부의 핵심 인력이었다.
“문석현 담당관. 200명이 넘는 인원들을 일일이 체크하느라고 고생 많았어요. 내일은 쉬도록 하세요.”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어차피 집에 가도 할 일도 없는데요.”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다. 문석현, 그는 아직까지 의지할 데 없는 솔로였다.
소피아는 예민하게 샐그러뜨렸던 눈매를 다시 나른히 풀어 내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후후… 그러니까 매일 방에만 있지 말고 바깥 공기 좀 쐬란 말이지요. 레그나토르의 인사담당관이라면 어디 가서 꿀리는 직책은 아니잖아요? 아, 그렇다고 어디 사는 어떤 음란커플처럼 예고도 없이 사고치란 소리는 아니에요.”
“제,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3년 전,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쭉쭉 진도를 빼는 바람에 동시에 육아휴직을 냈던 김진솔, 안세영 커플을 겨냥하는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 문석현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부서의 주요 인원이 두 명이나 한꺼번에 빠지는 바람에 어찌나 일에 치였던지.
그때였다. 무안해하는 문석현을 은은히 미소 짓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소피아는 돌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구리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아요.”
“…너구리들이 말입니까?”
문석현의 목소리 또한 그에 반응하여 덩달아 낮아졌다. 아이리스 행정부 5년차의 베테랑, 문석현. 이제는 뜬금없이 무거운 화제를 꺼내 드는 소피아의 방식에도 제대로 익숙해진 모습이다. …아니면, 제대로 찌들었다고 해야 할지.
“도미니온에서 두 명, 서부연맹에서 한 명. 담당관도 잘 알고 있는 핵심 연락책들이죠.”
“누군지 알 것 같군요. 제가 따로 대처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알려드리는 거예요. 주인님께서도 일단은 두고 보자고 하셨고요.”
“너구리들이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씀이시군요.”
너구리. 레그나토르 내부에 침투한 첩자들을 이르는 은어다.
앞서 말했듯, 문석현은 ‘안목’이란 재능을 통해 첩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당연히 외부에서 침투한 스파이들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고, 아이리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역으로 적을 교란하기 위한 포석인 셈이다. 일부러 첩자들을 풀어놓고 관리하는 가두리양식.
“그래요. 애초에 그러려고 끌어들인 자들이니, 이번에 제대로 써먹어야죠. 도미니온이든, 서부연맹이든… 섣부른 수작질로는 감히 레그나토르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돼요.”
보석과도 같은 붉은 눈동자에서 베일 것 같은 살의가 흩날렸다. 아담하고 작은 체구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가히 태산과도 같았다. 이것이 서부연맹의 대정령사 이세미와 함께 서부최강으로 꼽히는 혼돈의 정령사 소피아의 진면목이다.
‘이런 분이 의장님과 조카딸만 엮였다하면 못 말리는 푼수가 되어버리시니…… 험험.’
뒤돌아 나가는 소피아의 엉덩이 부근을 향해 은근슬쩍 쏠리는 시선을 겨우겨우 원위치로 되돌린 문석현은 가까스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로인 것도 서러운데 괜히 이곳 행정부에서 일하면서 눈만 높아졌다. 소피아를 비롯해 안세영, 안세희 등 초창기를 함께 했던 여인들이 모두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들이니 눈높이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가 있나.
5년 전, 이십대 중후반이었던 소피아도 어느덧 서른셋의 완숙한 나이가 되었다. 본래도 철두철미한 일처리를 자랑했던 그녀는 다년간의 노련미와 경험들이 더해져 실로 단점을 찾아볼 수 없는 행정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풋풋한 십대처럼 보이는 동안은 여전한지라, 날이 갈수록 번져만 가는 주름살 걱정에 한숨이 늘고 있는 문석현에게 있어 소피아의 어리고 아름다운 외모는 연구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저 불가사의한 동안과 대비되는 고혹적인 색기까지 두르고 있으니, 솔직히 의식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순수함의 대명사인 엘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기묘한 색기는 아마도 다년간 지속된 숱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녀를 독점하고 있는 남자를 익히 알고 있는 문석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탄했다.
‘크윽! 의장님, 같은 남자로서 정말 부럽습니다.’
…어쩌면 평생 결혼은 물 건너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애타는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도한 걸음으로 문을 열어젖히던 소피아는 문득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 문석현 담당관?”
“예, 예?”
“소율이에게 온 연락은 없었나요?”
“신소율 헌터의 파티라면… 어제 연락이 마지막입니다만. 아마 지금쯤 레귤러 안에 있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난이도의 레귤러도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분도 계시고요.”
“그렇겠지요? 그래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아요. 휘유우우… 유난스런 모습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연락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문석현은 다시 뒤돌아 나가는 소피아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눈길을 건넸다.
조카딸의 첫 실전 탐사인 만큼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더욱 심해진 느낌이다. 아마도 그녀 자신의 불임(不姙)이 거의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딸이나 다름없는 소냐에게 더욱 애정을 쏟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 어려운 수준의 레귤러도 아니다라… 이것 참, 다른 헌터들이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르겠군. 첫 탐사에 빅리그 수준의 레귤러를 대놓고 점찍다니. 소피아 님 쪽 혈통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지? 아니, 혈통으로 따지면 임유진 님이나 데모나 님도 만만치 않군. 어찌된 게 범상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얼마 전, 극비리에 탐사를 떠난 소냐 일행을 떠올린 문석현의 시선이 행정부 벽에 내걸린 대륙전도에 머물렀다.
소냐 일행이 목표로 잡고 떠난 곳 그곳은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레귤러, 염왕(焰王)의 안식처였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요즘입니다.. 몸조심하세요… 그러지 않으시면 저처럼 됩니다..
ㅠㅠ 건강들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