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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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한밤의 조우
“제…자…?”
어처구니없이 입을 벌린 노구덕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이야 옥이야 키워온 수양딸이 반군의 수괴 중 하나와 내통한 것도 모자라, 그의 제자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일순 머릿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밝히기로 작심한 소냐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틀어막혔던 노구덕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얼른 정신을 수습한 노구덕은 다시 한 번 질문을 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소냐가 말이 헛나온 것은 아닌지.
“얘야, 마도왕 티렐은 남부 반군의 수괴다. 그건 알고 있겠지?”
“네.”
“티렐은 발레기우스와 뜻을 같이 하던 인물이지. 그리고 발레기우스는, 내게 있어 철천지원수인 놈이다. 이 역시 모르진 않을 테지?”
어찌 모를 수가 있으랴. 발레기우스와, 그가 이끄는 벌레교단은 실렌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흑막. 노구덕의 가족들 중, 그가 발레기우스에게 사무치도록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똑똑한 소냐가 그런 내막을 모를 리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는… 내 앞에서 티렐의 제자를 자처하는구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허어, 이 경우엔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노구덕의 장탄식이 소냐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예상 했던 반응이다. 이래서 줄곧 숨겨왔던 것이다.
“…티렐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른 수괴들과 함께 북왕 형님을 비열하게 습격한 자다. 그 전투에서 네 언니가 쓰고 있는 신기 샤프슈터… 그 선대였던 클라리스가 목숨을 잃었지.”
“…….”
“요행이 따르지 않았다면 나와 유진이, 데모나도 위험했을 거다. 그놈들은 우릴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했었어.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놈들과 연을 맺다니. 그것도 제자라니. 허허허허…….”
그의 웃음에서 쓰디쓴 자조와 실망, 서운함이 그득하게 묻어나왔다. 그것을 느낀 소냐는 면목 없이 목을 늘어뜨렸다. 차마 노구덕과 계속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와, 크게 한숨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힘을 손에 넣길 원했을 뿐이다.
소냐는 이미 여러 차례 ‘통제불능의 상황’이 초래하는 공포를 맛보았다. 오라비의 납치, 광기어린 어미의 학대, 오키도에서 일어난 대참사,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서다 무력하게 쓰러져가는 사람들…….
이 연속된 상황 속에서 그녀는 한없이 무력했다. 그저 고통에 겨워하며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소냐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단 하나 깊은 갈망이 생겼다.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강력한 힘. 자길 둘러싼 주변 상황을 의지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강력한 힘에 대한 갈망. 예컨대, 대륙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십존급… 아니, 그 이상의 경지를 이룬다면 더는 무력하게 휘둘리지 않아도 될 터.
‘대부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요.’
소냐는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는 없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설령 노구덕이 실망하고, 자신을 내친다 하더라도 그건 그녀의 선택에서 기인한 결과다. ‘통제불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가 아니다.
티렐은 약속을 지켰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나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노구덕은 모른다. 지금 그녀가 어느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는지. 노구덕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저널 정보뿐, 그는 이 작은 육체에 어떤 초월적인 신이 깃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나,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그렇게 자위는 하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가족이자 은인인 노구덕을 속이고, 적이라 할 수 있는 티렐과 내통한 것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잘못이었다. 재차 말하지만 ‘실수’가 아닌 ‘잘못’이다.
눈을 둘 곳이 없어진 소냐는 이 와중에도 열렬히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마음껏 장작을 불사르며 열기를 발산하는 불꽃이 투명한 망막에 아롱아롱 맺힌다. 바쁘게 춤을 추는 불꽃의 모습이 흡사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 꼭 황금으로 빛나는 무대 위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붉은 머리카락의 무희(舞姬)를 보는 것 같다.
“불을 피우길 잘했구나.”
이건 무슨 소리일까. 한순간, 춤추는 불꽃에 시선을 빼앗겼던 소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아른거리는 불길 때문에 노랗게 보이는 노구덕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말이다…. 어린애들이 놀러 가면 꼭 간밤에 캠프파이어란 걸 하곤 했지. 음,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옳지, 크게 피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서 하는 간담회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추억에 잠겨, 잔잔한 어조로 입을 여는 노구덕. 좀 전의 노여움은 애써 가라앉힌 것인지, 평온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간담회… 입니까?”
“그래. 그렇다고 너도 나도 떠드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었고… 사회자 한 명이 분위기를 잡으면, 다들 촛불 같은 걸 들고서 조용히 명상을 하는 식이었단다. 이렇게 잔잔하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반성을 하는 거지. 나 자신에게는 충실했는지, 부모님께는 잘 하고 있는지……. 그러다 보면, 몇몇이 꼭 훌쩍이곤 했지. 흐흐, 그때는 다들 어렸으니까.”
“…그렇군요….”
“요런 작은 불은 말이다, 참 요물이야. 가만히 보다보면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거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지. 그리고는 많은 생각을 하게 돼. 소냐, 네가 생각에 잠겼던 것처럼 말이다.”
“…….”
“무슨 생각을 했니?”
소냐의 눈빛이 일렁이는 불길을 따라 위태롭게 흔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냐는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노구덕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거나, 야단을 치지 않고, 별말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불을 보면서 생각을 좀 했단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했지.”
“…….”
“방금은 꽤 화가 났었다. 솔직히, 네게 서운하기도 했고…. 하지만 소냐, 너는 영리한 아이다. 합리적인 면만 보자면 레그나토르의 그 누구도 너보다 낫다고 할 순 없을 거다. 그런 네가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겠지. 난 우선 그걸 들어보고 싶구나.”
“대부님….”
“잘잘못은 그 뒤에 가려도 늦지 않아. 그러니… 얘야, 괜찮겠지?”
소냐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이 된다. 이미 아까 전부터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만큼,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소냐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비로소 물꼬가 트인 그녀의 이야기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녀는 오 년이 넘도록 이어진 티렐과의 사제 관계에 대해서 최대한 살을 붙이지 않고 사실만을 전달하려 애썼다.
티렐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티렐이 무슨 제의를 했는지, 그와의 접선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연락책은 누구였고, 접선 장소는 어디였는지.
노구덕 또한 소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담담한 태도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굳이 이번 탐사를 ‘염왕의 안식처’로 정한 것도?”
“네. 스승님과 접선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흐으으음.”
마침내 길게 이어지던 소냐의 고백이 끝났다. 그리고 덩달아 노구덕의 표정도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결과적으로, 소냐는 이번 사단의 원흉이 되었던 연락책의 정보 누출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건 소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탄 연락책의 독단적인 행동일 공산이 높았다. 물론 소냐가 거짓을 고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솔직담백한 태도로 미루어보아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줄곧 잠잠했던 그 첩자놈이 갑자기 돌변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고…….’
지금까지 연락책이라는 자기 역할에만 충실했던 첩자가, 소냐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갑자기 돌변하여 레그나토르 내부를 정탐했던 것도 티렐의 어려운 처지와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농후했다.
알다시피 티렐이 이끄는 남부 반군은 동부에서 발호한 원(原) 반군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다. 그것도 말이 좋아 갈라져 나왔다는 거지, 실은 축출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일찍부터 남부의 패자로 떠오른 솔라리스에게 지속적인 견제를 당하면서 그 세력도 심하게 쪼그라든 상태라, 그 지도자인 티렐의 입지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은밀히 전해진 정보에 따르면, 그 남부 반군 내부에서도 온건파인 티렐과 강경파인 하유라의 세력으로 나뉘어 암투가 한창이라던가.
티렐의 형편이 그러하니, 첩자의 극단적인 행동도 제 주인의 위기를 보다 못한 과잉 충성의 발로였다고 생각하면 아귀가 들어맞았다. 막말로 레그나토르 내부에서 대어급의 정보라도 건진다면 어려운 처지의 티렐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어찌 됐든, 그런 잔챙이의 행동원리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소냐였다.
최근 소냐는 티렐에게서 급보를 전해 받았다.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직접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몇 년 간 은밀히 가르침을 전해주면서도 좀처럼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던 티렐답지 않은 급전이었다. 그만큼 그의 처지가 어렵다는 방증이었다.
고심하던 소냐는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티렐의 요구에 응했다. 상호 이해가 맞아떨어져 성사된 사제관계지만, 제자는 제자. 스승의 위험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 ‘첫 탐사’라는 좋은 구실도 있었다.
소냐는 티렐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염왕의 안식처를 탐사지역으로 정했다. 그래도 같은 남부에 속한 도시인 모고르 근처의 레귤러라면, 운신에 제약이 있는 티렐과도 접촉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우선 노구덕이 그녀의 비밀을 알아차린 데다, 뜻밖의 방해자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를 쫓던 놈들, 솔라리스의 유격대라고 하더구나. 그렇다는 건 솔라리스 놈들이 티렐이 이곳에 오는 걸 사전에 알아챘다는 건데… 짚이는 것이라도 있니?”
“…잘 모르겠습니다.”
제자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티렐과 동떨어져 지냈던 소냐니, 남부의 내부사정에 정통할 리 없었다. 예상했던 답변을 들은 노구덕은 고개를 주억이며 저쪽 구석에 쓰러진 사내를 가리켰다.
“흐음. 그럼 저자는 누구지?”
“저 사람은….”
소냐의 앙증맞은 입술이 달싹이는 그때,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사내가 느닷없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행동이 워낙 갑작스러운 탓에, 그 근처에서 육포를 꼭꼭 씹어 삼키고 있던 브리트라가 살짝 경기를 일으켰을 정도였다.
“저, 저는 코드란입니다…! 미욱한 몸이 철혈의 군주를 뵙습니다…….”
억지로 일어난 사내는 낑낑거리며 다가와선 노구덕의 앞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사내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듣고,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노구덕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코드란? 처음 듣는 이름인데.”
“예에… 그러실 테지요. 저는 첫 번째 별, 달트라만 님의 심복입니다….”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한 사내는 갑작스레 이마를 쿵! 땅에 찧으며 소리쳤다.
“부,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일단 오늘 가까스로 2연참에 성공했습니다!
사실, 전개가 늘어진다는 것은 심히 공감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게 또 제 나름의 욕심인지라.. 포기할 수가 없네요 ㅠㅠ
공들인 캐릭터가 무색무취 공기로 변하는 건 정말 싫다보니, 여기저기 분량을 할애하다보면 자연히 스토리가 늘어질 수밖에 없어서요..
그래도 혼신을 다한 연참으로 그걸 극복(?)해왔는데, 요즘엔 일이 바쁘다보니 하루에 한편 정도 올리는게 전부였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빨리 연참 모드로 다시 되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초심을 잃으면 안되니까요.
내일도 연참을 약속드립니다.
조만간 애꾸 하유라가 등장하겠군요.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