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65)
0565 / 0777 ———————————————-
147# 짓뭉개다
주문이 아니니 안티스펠필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극히 단순한 원리다. 그가 사용한 것은 에버 플래쉬. 레드레인 임유진이 즐겨 쓰는 초가속 능력이었다.
그러나 챈트릭은 노구덕이 레드레인 임유진의 기술을 사용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흠, 듣고 보니 북부의 이형환위와 조금 비슷할 수도 있겠어.”
“커어어…!”
가슴 한복판을 관통했던 팔이 쑤욱 빠져나오자 간신히 지탱되고 있던 육체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챈트릭은 다시 한 번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토해내며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펄떡이는 심장이 통째로 뽑혀버렸으니 이미 죽음은 확정이다. 다만 워낙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던 탓인지 곧바로 숨통이 끊어지진 않았다.
“크륵… 이렇게… 어이없게…….”
준미한 미남형의 얼굴이 진득한 핏물로 뒤덮인다. 엉망이 된 낯짝을 흙바닥에 처박은 챈트릭은 연신 목울대를 그르렁거리며 자신의 피로 검붉게 변한 대지를 필사적으로 움켜잡았다.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생명줄을 놓치기 싫다는 듯이.
“난… 죽지 않는다…… 이렇게는… 절대…….”
“거, 보기와 달리 끈질긴 놈이군. 굉장히 억울한 표정이야.”
챈트릭의 충혈된 눈알이 스르륵 위로 올라갔다. 얄밉게 비꼬는 노구덕의 얼굴이 동공에 담기자, 붉게 변한 눈이 징그럽게 불거져 나왔다.
“끄르르… 사기꾼… 같은 놈…! 내가… 방심하지 않았으면…!”
“있는 대로 똥폼을 잡더니, 마지막엔 구차해지는군. 이해는 한다. 죽기 싫겠지. 당연히 그럴 거야.”
“너…!”
“그렇지만 말이다. 갈 때는 가야지. 생사를 건 싸움에서 방심을 하면 쓰나. 목숨이 여벌로 있는 것도 아니고.”
“끄륵, 너어어……!”
“주제도 모르고 만용을 부렸으면 뒈질 수밖에.”
쿠직!
단말마는 없었다. 노구덕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지르밟듯, 바닥에서 엉기적거리던 챈트릭의 목을 지그시 짓밟아버렸다. 다시 위로 올라간 노구덕의 발밑엔, 경추와 신경, 피륙을 구분하기 힘든 다진 고깃덩이만이 불어터진 육포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털썩.
“채, 채, 챈트릭……! 으아, 으아아…!”
혀를 길게 빼 문 챈트릭의 낯짝에서 시선을 뗀 노구덕은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오성연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아마도 동료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패닉 상태에 빠진 모양이었다. 혹은, 비참한 최후를 예감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도.
솔라리스에서 그녀의 대외적인 서열은 대략 20위 안팎. 남부의 수많은 헌터들에게 ‘태양의 수호자’라 불리며 우러름을 받는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굶주린 늑대의 아가리에 머리를 디민 아둔한 새끼양에 불과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군. 그게 바이퍼 브레이슬릿인가?”
“오, 오지 마!”
고개를 돌린 노구덕이 걸어오는 것을 본 오성연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허기진 야수가 먹잇감의 경고를 들어줄 리가 없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노구덕의 그림자가 서서히 가까워지자,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던 오성연은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마구 주문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솔라스피어! 선 블래스트! 에센스 스트라이크(Essence strike)!”
“…….”
“저리 가! 가라고! 흐아아아! 오지 마아아아–!”
콰앙! 콰콰쾅!
수십여 발에 이르는 빛의 창이 천신의 심판처럼 작열하는가 하면, 반경 수십 미터를 범위로 하는 광휘의 폭발이 대지를 울부짖게 만들었다. 그도 모자라, 바이퍼 브레이슬릿을 매개로 한 진녹빛 광선이 그렇잖아도 엉망이 된 대지를 휩쓸며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따로 주문을 외우지 않고도 이 정도 위력이다. 하유라나 유메르바인 같은 십존급에는 미치지 못해도, 남부에서 손꼽히는 강자, 선키퍼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신위였다.
문제는 이 활약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공세가 아니라, 그저 열세를 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최후의 발악에 불과하다는 것.
아무리 파괴적이고 무서운 주문을 쓴다 해도, 상대가 맞아주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다. 그나마 조력자를 잃었으면 정신을 집중해서 주문의 정확도를 높이거나 상대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속박 주문을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오성연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사실, 그녀가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노구덕의 걸음을 잡아둘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카학…!”
앞이 캄캄해진다 싶은 순간, 거대한 해머가 아랫배에 틀어박힌 듯 숨이 턱 막혀왔다. 삼 미터가 넘는 거리를 붕 떠서 날아간 오성연은 세게 얻어맞은 복부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헉! 헉! 우욱…! 끼악!”
구역질을 하며 역류하는 쓴물을 토해내던 오성연의 머리가 높이 쳐들렸다. 어느새 코앞에 당도한 노구덕이 그녀의 긴 머리채를 붙잡아 위로 끌어올린 탓이다.
기이한 열기를 띠고 있는 맹수의 눈빛과 마주한 오성연은 그대로 돌이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손 하나라도 잘못 까딱하는 순간, 앞서 처참하게 죽어나간 챈트릭과 같은 꼴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죽는다. 잘못 처신하면 끔찍하게 죽고야 만다. 목이 날아가고, 분홍색깔 내장을 치렁치렁하게 내보인 채 도축장에 내걸린 생고기처럼 전시되리라. 눈앞의 이 폭군이라면 능히 그럴 인간이었다.
명예도 뭣도 없는 최악의 개죽음. 그런 꼴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극도의 두려움에 사고가 정지해버린 오성연은 애처로운 얼굴에 눈물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뭐든지 다 한다고?”
“네, 네! 솔라리스의 정보, 정보도 드릴 수 있고요! 레그나토르에 들어가라면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제발…!”
“그럼 벗어라.”
“힉…!”
노구덕이 불쑥 커다란 손을 내밀자, 지레 겁을 집어먹은 오성연은 본능적으로 봉긋한 앙가슴을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말로는 정말로 다 줄 것처럼 굴더니, 막상 대담한 요구를 받자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오, 옷 말인가요? 여기서 하시려고요…?”
“정신머리 없는 년이군. 네 팔찌를 벗으란 말이다.”
“아, 아아… 네, 네! 알겠습니다…….”
엉뚱한 오해를 한 오성연의 얼굴이 단풍이 든 것처럼 붉어졌다. 민망함에 고개를 숙인 그녀는 노구덕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팔찌를 벗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독니를 사납게 드러낸 뱀머리가 양각되어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바이퍼 브레이슬릿을 대충 살핀 노구덕은 천연덕스럽게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신기가 그의 호주머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오성연의 눈매가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목숨값 대신이라고 하면 싸게 먹힌 편이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바이퍼 브레이슬릿. 에센스 드레인, 에센스 배리어, 에센스 스트라이크 등 세 종류의 주문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모르는 다른 기능이 있나?”
“어… 없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생각대로 그리 대단치는 않는 물건이군.”
“…….”
오성연은 그럴 거면 왜 가져갔냐고 앙칼지게 따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사실 노구덕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거창하게 신기라 불린다곤 하지만 바이퍼 브레이슬릿은 그중에서도 최약체라 할 수 있었다. 사용자와 일체형도 아니고, 따로 복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성능 좋은 보조 장비에 불과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두식의 슬로터보다 조금 윗줄에 있는 장비라 할 수 있었다.
“솔라리스 놈들은 이런 걸 가지고도 신기니, 뭐니 하면서 쓸데없이 선전을 한단 말이지. 하여간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어.”
“그, 그래요. 정말 한심하지요….”
오성연은 얼른 그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살기 위해서라면 솔라리스가 아니라 부모를 헐뜯어도 맞장구를 쳐야만 했다.
그러나 노구덕은 그녀의 필사적인 태도에도 별달리 감흥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바이퍼 브레이슬릿을 받아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오성연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오성연의 눈에는 그것이 꼭 이걸 죽일까? 살릴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급격히 초조해진 그녀는 정신 사납게 동공을 굴리며 노구덕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하체 가운데에 유난히 도드라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사타구니 사이에 불룩한 윤곽으로 튀어나와 있는 그것을 본 오성연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바, 발기했잖아?’
무릎을 꿇어앉은 터라, 마침 눈높이도 그 부근을 잘 살필 수 있는 위치다. 힘겨워 보일 정도로 뻣뻣하게 팽창한 사타구니… 처녀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그녀가 저 징후를 모를 리 없다.
방금 전에 사람을 처참하게 죽여 놓고도 아랫도리를 발기시키다니. 겉보기보다 더욱 짐승 같은 인간이었다.
‘하, 하지만… 이건 기회야.’
경멸스럽고, 마주 보기조차 두려웠지만… 어쨌거나 이 와중에 물건을 세웠다는 건, 저 인간도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단 소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만 구슬리면 살 방도가 열릴 것도 같았다.
다만 걱정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냥 하기엔 사이즈가… 너무 클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전희를 해 주는 타입도 아닌 것 같고. 찢어지는 건 아니겠지…? 아, 아냐! 정신 차리자. 지금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잖아! 하다보면 의외로 괜찮을 지도 몰라.’
오성연은 꿀꺽 목울대를 움직이며 결심을 확고히 했다. 이 사지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데, 그깟 구멍이 찢어지는 게 대수랴.
각오를 굳힌 오성연은 몇 번 눈을 깜박여 최대한 눈을 촉촉하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살짝 눈썹을 내리깐 채, 한껏 유혹적인 음색을 흘려내며 노구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저, 저… 원하신다면… 몸이라도 바칠 수 있어요…….”
“…흠.”
먹힌다. 먹히고 있다. 갈등하는 기미가 역력한 목소리를 들은 오성연은 더욱 애절하게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여…열심히 할게요. 네? 군주님만 괜찮으시면 전 여, 여기서도 할 수 있어요…!”
“아깝군.”
“…네? 케엑!”
무슨 말이지? 무의식 중에 고개를 쳐든 오성연의 눈앞이 깜깜하게 변했다. 무쇠처럼 우악스런 손아귀가 그녀의 여린 목줄을 삽시간에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끅! 끄극!”
기도가 꽉 막혀버린 오성연의 얼굴은 한순간에 검붉게 달아올라, 콕 찌르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설프게 노구덕을 유혹하려다 목을 잡혀버린 오성연은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여전히 이해를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이 남자는 여자를 원하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건 뭐지? 뭔가 실수를 한 것일까?
“크르륵… 왜… 왜…?”
“인물이 아쉽긴 하지만… 시기와 장소가 좋지 않아. 그냥 죽어줘야겠다.”
뚜둑.
뜻 모를 말을 내뱉은 노구덕은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손아귀에 힘을 줘, 오성연의 가냘픈 목을 무자비하게 꺾어버렸다.
“…이거 정말… 죽겠군….”
갑자기 피로라도 몰려온 것일까.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길게 늘어진 목을 볼썽사납게 덜렁거리는 오성연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노구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코멘을 보니 저널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많으신데요! 저널은 이번 에피소드가 끝나고 통합본 형식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저널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그렇다고 에피소드 중간에 올려서 맥을 끊어놓을 순 없으니까요.
구더기 발기씬(?)은 의미없이 집어 넣은 게 아닙니다. 물론 구더기가 네크로필리아도 아니고요.
뭐라고 해야 할 지. 차후 3부의 사건이 진행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복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2부에서도 같은 종류의 떡밥이 던져지기도 했고요.
길게 시간 끌진 않겠습니다. 요 복선의 의미는 바로 다음화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즐거운 불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