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67)
0567 / 0777 ———————————————-
148# 오월동주(吳越同舟)
이건 부탁이라기보다 숫제 협박에 가깝다. 고리눈을 부릅뜬 노구덕은 티렐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범인이라면 숨통을 옥죄는 그 박력에 있는 대로 기가 질렸을 테지만, 상대는 마도왕 티렐. 이런 겁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모른다. 나는 그 증상을 없앨 방도를 알지 못해.”
“뭐라고?”
노구덕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티렐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만한 수라면 하나 알고 있지. 시스템을 없애버리는 거다.”
격노하여 들썩이던 노구덕의 안면이 다시 경직되었다. 티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노구덕은 무심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냐? 시스템은 이미 붕괴된 게 아니었나?”
“바보 같은 소릴 하는군. 물론 큰 줄기는 무너졌다고 볼 수 있지. 그렇지만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잔재는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까. 모르진 않을 텐데?”
노구덕은 그제야 티렐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시스템의 잔재. 멀리 갈 것도 없이, 저널의 존재만으로도 시스템이 아직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본래 우리의 목적은 시스템을 철저히 말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멜롯을 파괴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과는 거두었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느냐 한다면, 그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실패라고 봐도 무방해.”
“카멜롯이 파괴당하기 전, 위원회는 시스템의 주요 기능을 대륙 각지로 분산시켰다. 그걸 누가 가지고 있는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
티렐을 바라보는 노구덕의 눈빛에 옅은 의혹이 어렸다.
“그게 내 몸의 증상과 무슨 상관이지? 허튼 수작을 부리려거든…….”
“내가 널 이용한다고 생각하나? 하긴… 시스템을 파괴하는 건 내 바람이기도 했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틀렸다. 난 이제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는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더 수상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네 자유다. 정 미덥잖으면 조력에 대한 대가라 여겨도 될 터.”
“…계속해라.”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티렐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일단 들어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네가 겪고 있는 부작용은 분명 시스템의 붕괴로 인한 부작용이다. 정확히 말해서, 시스템의 힘이 애매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이지.”
“애매하게 남아 있다?”
“내가 말했을 텐데. 뭐든지 애매하면 골치가 아프다고. 내 관점으로 보자면, 네 상태는 일종의 주문, 혹은 저주에 걸린 상태와 흡사하다. 마도의 틀을 한참이나 벗어난 형식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원리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마법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의 힘이 작용했을 뿐이지.”
어쩐지 이야기가 빙빙 겉도는 듯한 느낌을 받은 노구덕은 슬며시 인상을 썼다. 도대체 왜 마법사란 족속들은 하나 같이 쉽게 말하질 못하는 것일까?
“…이해가 안 되는군.”
“쉬운 예를 들어주지.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마녀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고위 저주 중에는 피시술자를 아예 다른 종으로 바꿔버리는 주문도 존재한다.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분명 마도로 행할 수 있는 이적이지.”
“그러니까, 내 상태가 그런 저주에 걸린 것과 비슷하다는…….”
“끝까지 들어라. 그런 저주는 행하기도 까다로운 만큼, 해주(解呪) 역시 거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하지만 단 하나, 간단하게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지.”
“…….”
“저주의 근원. 바로 저주를 건 시술자를 없애는 거다.”
여기까지 들으니, 티렐의 의도가 대충 감이 잡혔다. 한마디로 그가 겪고 있는 부작용은 일종의 저주이고, 그 피시술자는 노구덕 자신이며, 시술자는 시스템이니, 시스템의 잔재를 처리하면 부작용이 사라질 것이란 이야기였다.
‘망할 놈,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면 될 것을….’
장광설에 조금 짜증이 나긴 했찌만, 듣고 보니 상당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시스템의 힘이 주문과 흡사하다는 말은 살짝 허무맹랑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마도왕 티렐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법에 관해선 대륙 최고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티렐의 보증이니 그 신뢰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티렐 이놈, 과묵하게 생겨먹어서는 말발이 사이비 약장수 저리 가라군. 소냐도 이런 감언이설로 꾀어낸 거겠지. 하지만….’
티렐의 이론은 그럴듯했지만, 허점이 있었다. 노구덕은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듣기엔 괜찮아 보이지만, 결국은 어정쩡한 추론을 줄줄이 나열한 것뿐이군.”
“그런가?”
“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뿐이야. 시스템을 없앤다. 그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저주가 풀린다고? 어떤 형식으로? 인간이 되는 건가? 오크로 남는 건가? 그도 아니면, 그나마 현 상태를 유지해주는 잔재마저 없어져서 둘로 갈라지게 되나? 혹은 죽어버리는 건가?”
“…….”
“대답을 못하는군. 그렇겠지.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으니까. 시스템의 잔재를 찾아 없애라고? 웃기는 소리. 나는 오히려 그걸 막아야 할 입장이다. 당장 뒷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목숨을 건 도박을 하란 말이지?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나?”
“…보증이 있다고 한다면?”
“뭣?”
노구덕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기함하며 눈을 부릅떴다. 보증이라니? 이 도박에서 그에게 확신을 심어줄 보증이 있단 말인가?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말을 이어가는 티렐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담담함과는 다르게 묘한 흥분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네 상태가 저주와 비슷하다고 한 것은 단순한 비유의 차원이 아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실제로 그런 원리로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지. 그렇다면 가능하다. 네게 걸린 부작용을 도식화하여 저주와 비슷한 방식으로 변조한다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깨끗하게 해제할 수 있을 거다.”
한순간 기대를 잔뜩 머금었던 노구덕의 표정이 다시 어이없게 변했다. 티렐의 말은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그가 듣더라도 현실성이라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는, 터무니없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걸어놓은 ‘기적’을 마법 도식화하여 저주와 비슷한 방식으로 변조시킨다? 시스템을 완전히 없애자는 말은 둘째 치고, 이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조금 전에 말했던 티렐의 말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내용이지 않은가.
티렐은 시스템의 힘이 마도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완벽히 그 상위 차원의 힘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고차원의 힘을 저차원의 방식으로 뒤바꾼다는 것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제기랄, 방금 전에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모르는 건가? 그게 가능할 리가…….”
“물론 나로선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아이라면 가능해.”
“그 아이라면….”
“네게는 있지 않은가? 신의 실수로 태어난 것 같은 최고의 마법사가. 신의 영역에 도달한 그 재능이라면, 신의 힘을 부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
신에게 닿는 재능. 누굴 말하는 건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소냐…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
“…믿기지 않는군.”
노구덕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소냐의 재능이 대단한 건 인정한다. Lv6의 마법 재능. 헌터들 중에서는 독보적인 클래스겠지. 그러나 대륙 전체를 통괄하는 시스템에 맞설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Lv6의 재능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10년 차가 넘어가는 김정인은 이미 동부를 통일했어야 정상 아닐까?
그 미덥지 못한 기색을 눈치 챈 티렐의 안광이 실처럼 가늘게 변했다.
“내 말을 곡해했군. 시스템 전체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그 아이는 신이 내린 재능을 지녔지만, 신과 정면대결해서는 이길 수 없어. 허나 그 일부라면 승산이 있다.”
“…일부?”
“조금 전에 말했을 거다. 위원회는 시스템의 기능을 대륙 전역으로 분산시켰다고. 현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은 하나가 아니다. 그중에는 미약하게 남은 힘으로 너의 현 상태를 유지해주고 있는 ‘존재’도 있을 테지.”
존재. 노구덕은 이 단어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보통, 그런 말은 실존하거나 특정 지을 수 있는 대상을 지칭하는 말 아니던가? 이를 테면, 사람 같은.
그 의문을 풀어내기도 전, 티렐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그의 의식을 강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신의 조각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
레그나토르와 판데모니엄, 두 세력의 수장이 동산 위에서 밀담을 주고받는 동안, 중턱에서는 전장 정리를 끝낸 일행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털썩.
주변 정리를 끝낸 신소율은 평평한 바위 위에 품위없이 엉덩이를 걸치며 힘껏 기지개를 켰다.
“아~! 힘들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고작 서른이 넘은 꼬맹이가 나이 운운하니 기가 찰 노릇이구나.”
“나잇값 못하는 먹보는 좀 조용히 해 줄래? 승찬 오빠, 이만하면 되겠죠?”
“아마도.”
“그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들키면 어떡하나 몰라.”
“그럴 확률은 적다. 적어도 이쪽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일은 없을 거다.”
“당연하죠. 누가 솜씨를 부렸는데요?”
군데군데 적갈색으로 말라붙은 핏물을 묻힌 채,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 그들을 새삼스런 눈길로 응시하는 이가 있었으니, 소냐를 근처에서 보필하고 있는 님로드였다.
‘레그나토르…… 이 정도였다니.’
삼백에 달하는 솔라리스의 추격대가 다섯도 되지 않는 소수 인원에 의해 궤멸되었다. 그 중심에는 노구덕이 데리고 온 레그나토르의 정예가 있었다.
에테르 윙 박승찬과 나이트스토커 신소율,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백금발의 소녀.
박승찬이야 훨씬 예전부터 프라임리그에서 명성을 떨치던 전통의 강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새로이 급부상한 신소율의 실력은 님로드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어둠과 어둠 사이를 순간 이동하듯 오가며 우왕좌왕하는 추격대를 싸리비처럼 쓸어대니, 그녀가 가는 곳마다 잘게 깨진 핏방울과 내장 조각들이 비산하며 짙은 피보라가 일었다.
아니, 그래도 신소율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무명이었던 헌터가 뜬금없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림리퍼 토벌전에서 큰 공로를 세운 신소율의 비상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전개였으니까.
그런데 저기서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소녀는 대륙의 유망한 헌터들을 거의 모두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님로드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설령 실력이 변변찮다 하더라도 저만한 미모, 특히 저 신비로운 머리색이라면 분명 화제가 되었을 텐데, 푸른빛이 감도는 백금발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미소녀. 겉으로 보이는 말투나 태도로는 상당히 맹하게 느껴지는 소녀였다. 허나, 막상 전장에서 드러난 그녀의 실력은 고위 마법사인 님로드를 가벼운 패닉에 빠트릴 정도였으니.
이 언덕 일대, 광범위한 지역을 통째로 아우르는 대규모 환상 주문은 그녀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그것도 모자라, 일행 개개인에게 노구덕에게 건 것과 똑같은 주문을 걸어주었다.
강력한 마력으로 발현된 이중 환상. 덕분에, 신소율과 박승찬의 기습에 당한 추격대는 우왕좌왕하며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외진 숲속에서 강력한 카름들이 출현한 셈이었으니까.
애초에 추격대의 진형은 밀집대형이 아니라 얇은 고리형의 포위진이었다. 포위진은 내부에 갇힌 적들의 섬멸에는 용이하지만 외부의 타격에는 극히 취약하다. 그런 진의 외부에서부터 강력한 적들이 들이쳤으니,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더욱이 진형이 무너진 틈을 타, 님로드가 지휘하는 판데모니엄의 잔당들과 소냐가 합세하니, 그렇잖아도 열세에 처해 있던 추격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삼백의 추격대는 가까스로 도망친 생존자 마흔 명 정도만 남기고 모조리 전멸했다. 노구덕의 공언과는 다르게 상당수의 적들을 살려 보낸 셈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솔라리스의 수뇌부를 교란하기 위해 일부러 살려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어제는 제가 저녁 약속이 생겨서.. 연참이 어려웠습니다 ㅠㅠ 이해해주세요..
오늘도 시간상 연참은 힘들것 같습니다만, 내일부터 다시 2연발로 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제 비천하류가님 연참기원 쿠폰까지 주셨는데 연참 못해서 정말 죄송하네요 ㅠㅠ 코멘 뒤늦게 확인했습니다. 다른 분들도요..
내일 다시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도록 힘낼 테니 노여움을 거둬주시길.. 근데… 연참으로 달리는게 정상인가요 원래??
크흠! 각설하고, 저는 다시 일하러 가야겠네요..
즐거운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