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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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오월동주(吳越同舟)
현실적으로 삼백의 추격대가 궤멸당한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 그만한 병력을 잃은 이상, 솔라리스에서는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만에 하나라도 노구덕 일행의 행적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
숨길 수 없다면 거짓 정보로 교란을 하는 게 최선이다. 브리트라의 환상 주문에 당한 생존자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카름들의 습격으로 부대가 궤멸했다고 보고를 할 테고, 솔라리스의 수뇌부는 혼란에 빠질 터다.
떠돌이 카름에 의한 전멸. 황당한 사실이긴 해도 마흔 명이나 되는 생존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아니… 이런 세상이니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어.’
5년 전의 대재앙을 시작으로, 대륙 각지에서는 이레귤러 현상을 비롯한 카름들의 출현 빈도가 크게 높아졌다. 어느 지역에서는 이를 종말의 전조로 여기고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고 있을 정도니, 급작스런 카름의 습격도 아주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다.
게다가 레그나토르의 인물들은 그냥 환상 주문을 쓴 것에 그치지 않고 뒤처리까지 깔끔했다. 즉,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카름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환부를 길게 갈라놓거나, 사지를 발기발기 찢어 놓았던 것이다.
박승찬과 신소율의 행색이 유독 피에 절어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날이 거친 톱날 칼을 쓰기도 했고.
어찌됐든, 이런 철두철미한 공작 덕분에 솔라리스의 의심이 레그나토르를 향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설마 이만한 지역을 뒤덮는 광역 환상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테니까.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레그나토르의 실력자들을 직접 눈으로 본 님로드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소냐에게 판데모니엄의 후계자를 권했을 때에는 판데모니엄의 저력이 결코 레그나토르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굳건한 자부심이 마구 뒤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건 다 뒤지더라도, 마도왕 티렐의 존재는 그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옥의 유황불을 연상시키듯 살광으로 번들거리는 눈알,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거친 숨결. 그 사내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무시무시한 시선을 상기한 님로드는 돌연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으으으…. 그 눈빛… 너, 너무 무서웠어.’
완드를 쥐고 있는 손아귀가 홍수라도 난 것처럼 흠뻑 젖어들었다.
“저기, 님로드 님 맞죠?”
“헉!”
“어? 왜, 왜 그래요?”
자기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내지른 님로드는 눈앞에서 ‘깜짝이야….’라고 중얼거리는 여인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자기가 꼭 그짝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이른바 헌터로서의 ‘짬’으로 보자면 그녀 쪽이 훨씬 우위였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다보니 말투가 절로 공손해진다.
“아뇨,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보다…….”
“……?”
“우리 소냐랑 사이가 꽤나 좋으신 것 같은데… 안 지 오래되셨나 봐요?”
올 게 왔다.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는 신소율의 어깨 너머로,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소냐의 얼굴이 보인다.
얼른 자세를 바로 한 님로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었으면 숨기고 말 것도 없었다.
“아가씨와는 조금… 오래 되긴 했습니다.”
“음음. 아가씨라니! 역시! 그러니까 우리 소냐가… 마도왕의 제자? 아마도 그 비슷한 거겠죠?”
“그렇…습니다.”
“우와아아!”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어렵사리 답한 님로드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아이리스와 판데모니엄의 관계는 그다지 좋다고 볼 수 없고, 그 때문에 소냐가 주변 이들에게 티렐과의 관계를 숨겨왔다는 것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소냐를 ‘작은 주인’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님로드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료들에게 사실을 숨겨왔다는 건, 관점을 달리하자면 배신행위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까. 소중하게 여겨왔던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다는 건, 소냐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헌데, 정작 사실을 접한 여인의 반응이 무척 의외다. 왜 그동안 우릴 속였냐며 격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탄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짝짝짝 물개박수를 쳐가면서.
“우와, 우와, 우와! 승찬 오빠, 들었어요? 소냐가 마도왕의 제자래요!”
“들었다. 저번에 쓴 주문을 보고 혹시 했는데…… 그게 정말일 줄은 몰랐군.”
“뭐야, 승찬 오빠는 알고 있었어요?”
“그냥 짐작일 뿐이었다. 그것도 그냥 넘겨버렸었고.”
못마땅하게 입술을 내민 신소율의 얼굴이 갑자기 흐릿하게 변했다.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뒤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냐의 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그녀는, 땡그랗게 변한 소냐의 두 눈 사이의 미간에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윽!”
“요 꼬맹이, 이건 괘씸죄다. 대체 이런 경사를 왜 숨긴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정말!”
“경…사인가요?”
발갛게 변한 이마를 감싸 쥔 소냐는 영문을 모르겠단 기색이 역력하다. 괘씸죄까지는 알겠는데, 경사라고 말하는 의미를 모르겠단 표정이다.
“그럼 경사지, 아니야? 있지, 내 고향에서는 명문대 들어가면 온 동네에 플래카드 붙여 놓고 난리부르스를 췄다고! 세상에 마도왕 티렐의 제자라니! 이거 지구로 치면 서울대… 아니, 아니지! MIT나 하버드 수석 합격 수준 아니야? 안 그래요, 승찬 오빠?”
“음, 그보다 더 윗급으로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죠, 그렇죠? 히히힛, 이러면 헨더슨 아저씨만 새 됐네. 꼬맹이 가르쳐보겠다고 그렇게 열을 내더니만. 어쩐지 임자가 있었어. 스승이 마도왕이면 이건 뭐… 게임 끝이네.”
플래카드니, MIT니, 소냐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단어투성이의 나열이었다. 그러나 의미는 몰라도 신소율이 진심으로 기뻐한다는 것만은 알겠다.
왜? 왜 화를 내지 않고 기뻐하는 거지? 나는 저들을 속였는데. 5년이 넘도록…….
“화…나지 않으십니까?”
목울대를 타고 넘어온 의문. 하지만 신소율은 되레 이상한 걸 묻는다는 표정이었다.
“화? 당연히 화나지. 너 그래서 딱밤 맞은 거야. 이해 안 돼?”
“그게… 끝입니까?”
“응? 그게 끝이냐고? 얘 좀 봐, 그러면 뭘 더 해야 돼? 그걸로 부족해? 이따 복귀한 다음에 연병장에서 볼기짝이라도 때려줄까? 이렇게!”
신소율은 소냐의 아담한 엉덩이를 가리키며 손바닥을 휘휘 내저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망울을 깜박이는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소냐는 왠지 모르게 무거웠던 마음이 허탈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휴….”
안도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소냐. 신소율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어쭈, 농담인 줄 아나본데, 정말이야. 너 돌아가면 각오해야 할 걸? 아주 그냥 혼쭐을 내줄 테니까! 찰싹찰싹! 찰지게 때려줄 거야! 이번엔 무표정으로 무게 잡아도 안 통해!”
“그게 아닙…….”
“아아. 소냐 피고인. 뭔 말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변론은 법정에 가서 하도록 하세요.”
아무래도 제대로 들어줄 생각이 없나보다. 멋대로 떠들면서 소냐의 입을 다물게 만든 신소율은 이번엔 님로드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님로드 언니. 아,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저 서른하나인데.”
신소율이 소냐를 쥐고 흔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님로드는 엉겁결에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예? 아, 예. 좋으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우리 소냐랑 말투가 비슷하시네요. 뭔가 세련된 커리어우먼 같아.”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위쪽 얘기가 길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대로 기다리기도 지루하니 옛날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언니도 심심하신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옆에 엉덩이를 걸치며 제안하는 모양새가 무척 능청스럽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의식해서라도 저리 생글생글 웃지는 못할 텐데, 그녀는 후각이 마비된 것처럼 혈향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혹은 피비린내가 질릴 만큼 익숙해진 것일지도.
나이트스토커 신소율은 명백하게 후자였다. 그녀는 달리 노구덕의 암중비수(暗中匕首)라고 불리는 암살자이니까. 크로스게이트 오너를 필두로 한 피의 숙청 당시, 어둠 속에서 움직인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아직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겉으로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친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 눈빛 속, 옅은 핏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님로드의 표정과 동태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언제든지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수 있도록.
‘하지만… 아가씨한테만큼은 진심으로 보였어.’
신소율 같은 냉혈(冷血)의 암살자도 한 식구에게만큼은 진심이라는 것일까. 새삼 소냐가 말했던 ‘가족’이라는 말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응?”
“저희 주인님은… 아이리스와 구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쉽게 넘어가시는 겁니까? 아가씨께선 어떤 처벌을 받으시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엑? 처벌요? 그런 거 없어요. 뭘 또 그런 얘기를……. 그런 시시한 거 말고 꼬맹이 관련 에피소드는 없어요? 마법 배우다가 너무 힘들어서 오줌을 지렸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요? 이왕이면 좀 망가지는 걸로요.”
“제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디,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하는 님로드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신소율은 아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의도대로 되기는커녕 또 진지한 얘기를 하게 생겼으니.
“…솔직히 그 마도왕이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딱히 나와 접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시온에서 깽판을 부렸을 때 아저씨랑 언니들이 위험했던 적도 있었잖아요. 꼬맹이를 납치하려고 했던 전적도 있고. 호불호를 따지자면 싫어하는 쪽이 맞아요.”
“…….”
“그래도 뭐,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고… 우리 소냐한테도 잘 대해준 것 같으니까요. 그러지 않았으면 꼬맹이가 돕겠다고 나섰을 리도 없겠죠. 으응, 딸이라고 하긴 좀 어색하고, 어쨌든 내겐 동생 같은 앤데, 이만큼이나 잘 가르쳐놨으니 마냥 미워할 필요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대답을 듣고도 미적지근한 느낌이 드는 건 여전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자자. 시시껄렁한 얘기는 여기까지. 이제 언니 차례예요.”
신소율이 님로드에게 바통을 넘긴 그때였다. 혼자 쪼그려 앉아, 짧은 막대기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브리트라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먹보, 왜 그래?”
“주인이 내려오고 있다!”
“뭐어? 씨이, 나만 실컷 얘기했네.”
“슬슬 갈 채비를 해야겠군.”
브리트라에 이어 신소율, 박승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님로드 역시 눈치껏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소냐의 뒤쪽으로 호위하듯이 선 그녀는 짧은 풀들이 듬성듬성 뒤덮여 있는 언덕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야트막한 동산 저 위쪽에서, 마도왕 티렐과 노구덕으로 짐작되는 까만 점 두 개가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에피소드 끝났습니다. 하유라와 라키오라는 아마 다음 에피 시작때 잠깐 등장할 것 같네요.
오늘 낮이나 저녁 때쯤에 저널 통합본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리스주요멤버 + 꼬맹이들 저널입니다.
빨리 이 시스템이 작살이 나서 저널이 없어져야 제 고통이 사라질 텐데.. 발레기우스를 응원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P.S 연참은 무리가지 않는 선에서 지속 예정입니다. 걱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