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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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물밑
지나치게 담담하다. 노구덕은, 팔콘 가주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아가레스트의 태도에 소태를 씹은 것처럼 낯을 찡그렸다.
“그가 몇 년째 병석에 누워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결국 그렇게 되었군. 그런데… 너무 남 일처럼 말하는 것 아닌가?”
트랑키아 가문의 가주. 팔콘 왕국의 왕. 그는 아가레스트의 친부다. 울면서 애도하지는 못해도, 저렇게 남 일처럼 담담하게 얘기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새삼스럽게 놀랄 일인가요? 가문과는 이미 연을 끊었어요.”
“그런가?”
“그래요. 어쨌든… 지금 팔콘에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어요. 당신이 그 아이들을 팔콘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싶다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아요. 플랑기스가 팔콘을 치기 전에 말이죠.”
구 라만 왕국을 집어삼키고, 라만의 왕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륙해버린 플랑기스다. 팔콘이 그의 손에 넘어간다면, 트랑키아의 혈족들 역시 참혹하게 떼죽음을 당할 터. 지지기반이 되어야 할 팔콘의 트랑키아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린다면, 쌍둥이를 내세워 팔콘을 날로 집어삼키려는 노구덕의 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팔콘도 아주 허수아비는 아니야. 아무리 플랑기스가 있다지만, 투르의 오합지졸들에게 단시간에 무너지진 않을 테지. 그랬다면 무너져도 진즉에 무너졌을 거다. 병력을 모을 시간도 필요할 테고.”
“과연 그럴까요?”
“으음?”
“내통자가 있다고 한다면요?”
“내통자?”
느긋하던 노구덕의 표정이 작게 일변했다. 팔콘 내부에 플랑기스와 내통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라만 왕국이 무너졌던 것처럼, 팔콘도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었다.
“리에고르 팔콘 트랑키아. 제 사촌이고, 팔콘 가주가 죽은 지금 가장 유력한 차기 가주 후보이기도 하죠.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얼마 전 그가 플랑기스의 측근과 은밀하게 회동을 가졌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흐음. 포착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그런 걸 알아냈군.”
포착하기 쉬운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문의 요주의 인물들을 모니터링하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내기 힘든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가문에 대한 연을 단칼에 잘라내기란 쉽지 않았던 것일까.
“…계약이니까요. 팔콘이 플랑기스의 손에 들어가면, 당신과의 약속을 이행할 수 없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더 이상 찔러봤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든 노구덕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팔콘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제 당신의 재량에 달렸죠.”
“내 재량이라… 달갑잖은 책임전가군. 음, 말이 나와서 그런데 말이야.”
“……?”
“이 시점에서 굳이 팔콘을 얻으려 애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지금만 해도, 모고르를 유지, 재건하느라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거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번 멸망했던 모고르를 재건하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엇보다 모고르는 레그나토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 아니다. 게다가 남부의 솔라리스까지 모고르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니… 이번에 티렐과 엮인 일로 한동안 놈들의 주의를 다른 곳에 돌려두긴 했지만, 언제 다시 야욕을 드러낼지 모를 일이었다.
팔콘도 모고르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곳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심했다. 남부는 솔라리스 하나만 신경쓰면 그만이지만, 동부는 김정인의 리베르타, 플랑기스의 투르, 반군의 정예 세력이 박터지는 신경전을 벌이는 곳이다. 사실 그만한 세력들이 서로 첨예한 눈치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면, 최약체인 팔콘은 어딘가에 먹혀도 진작 먹혔을 것이다.
모고르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덕분에, 지금의 노구덕에게 있어 팔콘은 먹기엔 좀 그렇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 문제고 있고. 마누라들도 겨우 정을 붙인 눈치고, 이제 와서 형제들이랑 떨어뜨리자니 그건 또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어.”
“…성인군자인 척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닌가요?”
“날 모르는군. 이래봬도 난 내 핏줄들에겐 끔찍한 사람이야.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지.”
노구덕이 누구를 지칭하며 말하는 것인지 모를 아가레스트가 아니다. 자극을 받은 것일까? 그녀의 휘황한 금발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아이들을 낳고, 따스한 손길 한 번 준 적 없는 무정한 어미다. 하지만 노구덕은 그녀의 행동이 의식적인 배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리지만 영리한 아이들이야. 마누라들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따르지만,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 다른 애들이랑 있을 때 그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거든. 그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얌전해지지.”
“…어쩔 수 없잖아요? 그게 그 아이들의 운명이니까.”
“이봐….”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습게 느껴지네요. 애초에 그 아이들을 이용해서 팔콘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죠? 이제는 팔콘도 모자라, 그 아이들을 빌미로 절 옭아맬 셈인가요?”
“분명 처음엔 그랬지. 하지만 이젠 됐어.”
“당신은 됐을지 몰라도, 전 그렇지 않아요.”
머릿결의 잔떨림이 멎었다. 아가레스트의 대답은 차가운 쇠붙이처럼 단호했다.
“평생을 절 위해 헌신하던 이오의 처참한 죽음을 잊으라고요? 이 몸이 밑바닥의 시궁창에서 굴러먹던 게, 가문이 나락으로 떨어진 게 전부 누구 때문인데요? 모두를 지옥에 빠트린 그놈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어요. 하!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그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겠죠.”
반개한 눈꺼풀 아래에서 형형한 안광이 새어나왔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아가레스트를 앞에 둔 노구덕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
흥분감으로 고조되었던 숨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후우, 작게 숨을 내쉰 아가레스트는 재차 흘러내린 금발을 차분하게 쓸어올렸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저는 지독히도 나쁜 어미겠죠. 하지만 서로 어중간하게 정을 주느니, 차라리 이편이 나아요. 이런 냄새나는 몸뚱이와 가까이 했다간 피 냄새가 밸 테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아가레스트의 의아한 눈초리가 노구덕을 향한다. 그러나 노구덕은 금방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말이 헛나왔군. 그보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노구덕은 잠시 티렐에게 들었던 내용을 정리했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수색의 단초. 위원회 직할의 정보부를 총괄하고 있었던 아가레스트라면 어쩌면 그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신의 조각이란 걸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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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합 리베르타의 주요 기관은 크게 행정부, 감찰부, 군무부, 대의회의 네 곳으로 나뉜다.
이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기관을 꼽는다면, 검왕 김정인이 있는 대의회를 꼽을 수 있다. 리베르타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 정책들이 이 대의회에서 결정되며, 각 기관의 예산 심사 및 주요 간부들의 내정도 대의회의 의결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행정부나 감찰부, 군무부에 주어진 권한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리베르타의 주요 내정을 담당하는 행정부나, 병력과 치안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군무부, 대의회 산하 다른 기관들을 감시하는 감찰부 수장들의 권한 역시 결코 적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 만큼, 각 기관의 장(長)은 리베르타 내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 자만이 임명된다.
현 리베르타 행정부의 수반은 전 라이오넬의 단장이었던 하태경이었다.
하태경. 그의 헌터로서의 능력은 많이 쳐봐야 일류 수준이지만, 집단의 내부를 다스리고 키워내는 데에는 동부에서 따를 자가 없는 전문가다. 특히 외교 방면에 뛰어나, 동부의 클럽 오너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가 라이오넬의 오너인 줄 알고 있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전임자였던 소피아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 그 능력이 어느 수준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명석하고 뛰어난 두뇌,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일처리, 부하들로부터의 무한한 신망.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행정가가 하태경이란 인간이었다.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하태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산더미 같은 서류가 빼곡한 테이블의 귀퉁이, 겨우 비어 있는 부분에 조심스레 찻잔을 가져다 놓는 하얀 손길이 보인다.
그 위쪽엔 섬세한 붓으로 그린 듯 맑고 투명한 여인의 얼굴이 비쳐졌다. 감찰부의 참모를 맡고 있는 윤희지다.
“무슨 말입니까?”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태경 씨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시시하군요.”
피식 입매를 터뜨린 하태경은 윤희지가 가져다 놓은 찻잔에 살며시 입을 댔다. 크게 흔들리는 찻잔 속에서 피어난 뿌연 수증기가 앞을 가린다.
“그렇잖아요? 솔직히 태경 씨를 처음 봤을 땐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람인 줄 알았단 말이죠. 정인 씨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 줄 줄은 몰랐어요. 아, 어디까지나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니 너무 언짢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그랬던 시절도 있었죠. 철없던 때의 얘깁니다.”
뜨끈뜨끈한 찻물을 목구멍 깊숙하게 들이켠 하태경은 눈을 감으며 깊이 우러난 그 맛을 음미했다.
“차 맛이 좋군요.”
“그렇지요? 예전에 출산하고 나서 몸조리할 때 틈틈이 배워둔 걸 이렇게 써 먹네요.”
사심없이 투명한 웃음을 머금으며 활짝 얼굴을 펴는 윤희지. 왕년의 톱클래스 배우 출신답게, 백송이의 장미가 화사하게 만발하는 것처럼 아찔한 미소다. 누가 이런 여인을 ‘감찰부의 독전갈’이라고 생각할까?
“…변한 건 저만이 아닐 테지요. 희지 씨도 많이 변했습니다.”
“어머, 그래요? 아줌마가 다 됐다고 놀리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먹물이 들어찬 듯 캄캄한 눈동자에 윤희지의 새하얀 얼굴이 담긴다. 그녀는 하태경 자신과는 달라서 행정가로서도, 헌터로서도 크게 성공했다.
단지, 따로 있는 마법사로서의 별명보다도 라이오넬의 사갈(蛇蝎)이라는 악명이 더 유명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금이야 아이를 낳고 많이 유해지긴 했지만, 이전의 윤희지는 김정인의 앞길에 방해되는 자라면 단칼에 끊어냈을 정도로 무자비한 여자였다.
“그런데… 감찰부의 참모께서 행정부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흐응, 용건이 없으면 올 수 없나요? 우리 사인데?”
“…….”
“으음, 음. 농담이에요. 그렇게 보실 건 없잖아요?”
말을 꺼냈던 윤희지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확실히 이렇게 어쭙잖은 장난도 치는 걸 보면 그녀의 성격이 많이 죽었다는 게 실감이 됐다.
“…아직 검왕의 칼에 찔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후우. 정인 씨가 이 정도로 질투하는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면 저도 평범하게 내숭이나 떨면서 살았을 텐데 말이죠. 그 애들도 그런 고생은 안했을 테고…….”
무심하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아이를 낳은 뒤에도 김정인의 일상은 오로지 수련, 수련, 수련뿐이었으니까. 그는 정말로 검에 미친 사람 같았다.
“희지 씨.”
“알았어요. 무심한 남편 타령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최근, 투르에서 수상쩍은 동향이 보이던데… 눈치 채지 못하셨나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제 담당은 내정쪽인지라.”
“그래요?”
윤희지의 시원한 이마에 옅은 주름이 잡히며, 그 고운 눈이 샐쭉하게 찢어졌다.
“…아무래도 투르에서 군사를 일으키려는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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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제 본격적인 통수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플랑기스의 투르, 김정인의 리베르타, 그 사이에 낀 팔콘, 주인공까지 끼어들면 사파전이 되겠군요.
가급적이면 빠르게 진행하려고 하나, 전쟁 특성상 조금 늘어질 수도 있습니다. 연참력으로 커버가 되어야 할 텐데.. 일단 내일은 두편 올리고.. 오늘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ㅠㅠ
궁금하신 점 있으면 리플 달아주세요! 담편 올릴때 답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