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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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물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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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가 패터슨을 따라갔다고?”
“응, 뭐, 자기 말로는 형부의 어려움을 모른 체 할 수 없다나.”
“그래…….”
레이나의 소식을 전한 임가희는 슬그머니 아비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친한 친구의 일이다보니, 혹시라도 노구덕이 화를 내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노구덕에게 직접 연락하여 허락을 받는 대신, 그의 딸이며 절친한 사이이기도 한 임가희를 통해 대신 소식을 전하는 우회적인 방식을 택했다. 만에 하나 노구덕이 복귀 명령이라도 내린다면 언니와 형부를 내버려두고 그냥 떠나야만 할 테니, 차라리 나중에 꾸중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차선책이 낫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제법 꾀를 부렸다만, 그래봐야 애송이의 콩알만 한 머리에서 나온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닳고 닳은 노구덕이 레이나의 수작에 넘어갈 리 없지 않은가
“…쯧. 얕은 수를 썼구나.”
“우음, 그게….”
“이 녀석. 공범 주제에 변명을 하려고 해?”
“윽.”
‘걸렸어!’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이마를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한 번 일을 벌이고 나면 꼭 세게 쥐어 박히곤 했기 때문이다. 장난이라곤 해도, 노구덕의 꿀밤은 한 번 맞으면 이마가 떨어져나갈 만큼 아팠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꿀밤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구덕이 팔을 들어올리려는 기미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화… 안 내요?”
“이미 벌어진 일이고, 내가 말렸다고 해도 그 녀석 성격상 틀림없이 제 언니를 따라 나섰겠지. 왜, 때려주랴?”
노구덕이 무지막지한 왕주먹을 들어 올리자, 기겁한 임가희는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렇죠? 아, 아~ 왜 패터슨 오빠는 그런 귀찮은 일에 직접 나서나 몰라. 부하들도 많으면서.”
임가희의 습관중 하나는 꼭 자기가 불리할 때만 존댓말을 쓴다는 거다. 면피용이라고 할까. 애꿎은 패터슨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 그런 딸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노구덕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리더도 여러 유형이 있는 거란다.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직접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사람도 있지. 패터슨은 명백히 후자다. 그 녀석이 몸을 사리는 체질이었다면, 절대로 칸다무어의 무법지대를 통일하지 못했을 거다.”
“헤에,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물론 솔선수범형 리더라도 모든 일에 앞장설 수는 없어. 이번 일은… 그만큼 녀석 나름대로 사안이 중요하다고 느낀 거겠지.”
노구덕은 얼마 전, 패터슨에게서 거울의 숲에 대한 일을 보고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상하긴 하군. 연이은 실종이라니……. 카름이라도 나타난 건가?’
뭔가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단정 짓기에는 드러난 정황이 애매했다. 한 달 동안 다섯 명의 실종자… 많다면 많은 수라고 볼 수 있지만, 크게 부각되는 숫자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이 경우엔, 실종자들이 숲을 떠돌아다니는 카름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보는 게 훨씬 이치에 맞는다.
‘이건 패터슨이 복귀한 이후에도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워낙 신중하고 철저한 녀석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마리안과 레이나도 같이 갔으니까.’
노구덕은 거울의 숲에 관한 일을 잠깐 덮어두기로 했다. 패터슨의 병력들과 레이나, 마리안이라면 어지간한 카름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이다. 거울의 숲에서 덜컥 십존급 괴물이라도 튀어나오지 않는 한, 딱히 신변에 문제는 없을 터다.
‘그런 괴물들이 어디 부지기수로 널린 것도 아니고…….’
걱정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지금 노구덕에겐 그것 말고도 산재한 문젯거리가 아득히 쌓여 있었다.
“으응? 가희 아니니? 여기 어쩐 일이야?”
“작은 엄마.”
집무실에 들어온 이는 소피아였다. 그 뒤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임유진의 얼굴도 보였다. 아이리스에서 레그나토르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핵심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두 여인이다.
“가희는 이만 나가 있어라.”
“에엣….”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인 임가희는 노구덕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는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놀아주지 않는다고 떼를 쓸 나이는 지났다. 그렇다고 실무진 사이에 껴서 목소리를 낼 입장도 아니었으니, 조용히 자리를 비울 수밖에.
“이따 봐요, 엄마, 작은 엄마.”
“응, 그래.”
탁.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방을 나선 임가희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낯으로 딸아이를 배웅한 임유진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가희가 웬일로 이 시간에 온 건가요?”
“별 일 아니야. 그건 그렇고, 벌써 회의 때가 됐나?”
“네. 십오 분 정도 남았네요. 슬슬 가셔야 해요. 다들 기다리고 계셔요.”
오랜만에 딸아이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벽시계를 확인한 노구덕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철을 집으며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바로 가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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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과 소피아를 대동한 노구덕이 향한 곳은 예전 칼립스의 헌터하우스 건물이었다. 칼립스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인 이곳은 본래의 용도를 살려, 현재 레그나토르의 대소사가 이루어지는 심장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노구덕 의장께서 입장하십니다!”
엄숙한 회의장에 걸맞게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사용인이 목청껏 그의 입장을 알리자, 거대한 돔형 회의장 내부에 널찍하게 둘러 앉아 있던 이들이 분연히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앞다투어 허리를 굽히는 이들은 사오십 대의 중후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젊은 패기를 발산하는 삼십대의 인물도 보인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약 서른 명의 사람들… 이들이 바로 철의 동맹 레그나토르를 이끄는 중진들이었다.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풍채를 지닌 이들. 요 몇 년 간의 치열한 내부다툼과 숙청에서 살아남아, 레그나토르의 중심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린 맹자들이다. 말하자면 무수히 넘치는 돌멩이들을 솎아내고 솎아낸 끝에 겨우 자리 잡은 진짜배기들이었다.
허나 아무리 멋진 진주들만 모아놨다고 한들, 그 속에서도 유달리 빛을 발하는 보석은 반드시 있게 마련. 그건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이 아무렇게나 둘러앉은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맨 앞자리의 네 명을 중심점으로 하여 부채꼴을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네명이야말로 노구덕을 제외하면 이 회의실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네 명 중 가장 우측에 자리한 인물은 인품이 드러나는 넉넉한 뱃살과,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대머리를 가진 중년 사내다. 그의 이름은 루가니. 과거 클럽 그믐달의 오너였던 인물로, 노구덕과는 서부연합군에서 처음 연을 맺은 사이다.
그 다음은 매혹적인 눈웃음으로 뭇 남성들의 심장을 철렁이게 만드는 삼십대의 미녀였다. 그 이름은 이올렛. 바람이 불면 훨훨 날아갈 듯 마른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는 구 크로스게이트의 단장 출신으로, 이전까지는 별다른 이력이 없었지만 크로스게이트 오너의 숙청이후 발군의 능력을 발휘, 급격히 두각을 나타내며 이 자리까지 온 인물이었다.
깡마른 이올렛의 왼쪽엔 마찬가지로 삼십대로 보이는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쏘일 것처럼 형형한 안광을 빛내는 그는 구 클럽 엔드리스의 1군 리더였던 샤카였다. 과거, 엔드리스의 오너가 피에스타 오너 바간과 엮이는 불미스런 일로 클럽의 명성이 곤두박질치자, 그 일에 실망한 이들을 이끌고 엔드리스를 탈퇴, 레그나토르에 가담한 헌터였다.
그간 많은 변화를 겪은 레그나토르지만, 그렇다고 현 레그나토르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마지막, 맨 좌측에 자리잡은 인물은 현재 대도시 긴트의 총독인 황석문이었다.
그 외에도 블랙 랩터의 메이슨, 모고르의 자하드 등 오래도록 노구덕 밑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얼굴들도 있었다.
좌중의 인사를 받으며 입장한 노구덕은 담담하게 상석에 앉았다. 그가 착석하자 기립했던 인물들도 줄지어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노구덕이라는 절대적 지배자를 중심으로 한 대의회. 이것이 서부를 삼등분하고 있는 레그나토르의 현재였다.
좌중을 일별한 노구덕은 곧장 서류철을 펼쳤다. 앞서 집무실에서 가져왔던 그 서류철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 안건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오늘 아침, 투르의 선봉대가 팔콘의 국경을 넘었다. 알 거라 생각하지만, 이건 지금까지의 단순한 국지 도발이 아니다. 투르의 국왕 플랑기스가 군을 이끌고 직접 나선 데다, 그 규모도 보통이 아냐. 이건 팔콘을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속셈이라고 보는 게 옳겠지.”
“…….”
투르의 대대적 침공. 아가레스트의 예측이 고스란히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보통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적대국이라 하더라도, 상대 국가가 국상(國喪) 중일 때에는 교전을 중단하고 조의를 표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플랑기스는 그런 관례를 싹 무시한 채, 어떤 선전포고도 없이 국경을 넘었다. 라만의 왕족들을 깡그리 몰살한 학살자답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보면 정말 그다운 방식이었다.
“투르가 나라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막장 국가라 하더라도, 십존의 일인인 플랑기스의 무력은 진짜배기다. 동부의 최약체인 팔콘엔 놈의 진격을 막아낼 인물도, 수단도 없다. 그래도 아주 바보들만 있는 건 아니었는지, 이레시온이 군을 파견할 조짐을 보인다고 하더군.”
중부의 이레시온은 대륙 각지에 흩어진 세력들 중 단연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곳이다. 전 세대의 십존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은연중 현세대의 최강자라 인정받는 폭군 무릴로가 몸담고 있는 곳이었으니. 하긴, 그 전신이 위원회라는 점을 상기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커다란 덩치를 가진 만큼, 그 엉덩이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대륙 중부에 자리잡은 이레시온은 어지간한 일로 움직이는 국가가 아니었다. 어설프게 손을 잘못 뻗치기라도 했다간, 위협을 느낀 사방의 세력들이 반(反) 이레시온 연대를 할 수 있었으니까.
“이레시온이 움직인다니……. 명분은 좋군.”
“차라리 고만고만한 투르가 낫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겠지. 자칫 팔콘이 이레시온의 손에 넘어간다면, 동부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생기는 셈이니….”
짝! 가볍게 손뼉을 쳐 좌중의 소란을 가라앉힌 노구덕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와는 정반대편의 일이고, 개입하기도 힘든 문제다. 일단은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면서 이후의 전략을 세우는 게 맞겠지. 어쨌든 투르가 군대를 일으킨 이상 동부의 세력 판도가 변하는 건 필연일 테니….”
“…의장님, 잠시….”
갑자기 안색이 변한 임유진이 노구덕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었다. 환하게 빛나고 있는 영상수정을 쥐고 있는 걸 보면 도중에 어떤 급보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수정을 받아든 노구덕의 눈두덩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건 사태가 예상 밖으로 심각해질지도 모르겠군.”
“예…?”
“중부의 이레시온에서 병력을 파견했다고 한다.”
“음…!”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이 흘렀다. 허나 소식을 들은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레시온의 파병이야 방금 전까지 논하고 있을 정도로 예측된 수순이 아니던가? 노구덕이 말하는 ‘심각한 일’에 부합한다고 보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것을 말해주듯, 잠시 뜸을 들인 노구덕은 거센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리베르타와 솔라리스에서도 구원군을 파견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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