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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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물밑
노인과 대치한 윤희지는 혼잡스러운 머릿속을 뒤적여 그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독왕 나타.
중부 지구의 헌터라고 알려져 있을 뿐, 그 정확한 출신 성분은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인물이다. 특이하게도 독술(毒術)로서 십존의 경지에 이른 헌터이며, 대량살상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전문가였다고 한다. 녹색 독분을 뿌옇게 흩뿌리는 포이즌 클라우드는 그를 상징하는 간판 기술이라고.
본래부터 과묵하고 존재감이 없는 성격이었던 데다, 은퇴 이후에도 여타 십존들과 매한가지로 조용히 묻혀 지내는가 싶더니만, 에덴 공방전에서 위원회의 조커로 등장, 홀로 약 오백여 명의 반군들을 살해하며 본격적으로 급부상한 인물이었다.
‘폭풍왕 라키오라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그때 혼자서 천 명은 넘게 죽였을 인간이야. 한마디로, 풍계 주문이 약점… 이지만!’
구름처럼 뭉실거리던 녹색 안개가 한 데 뭉쳐 날아오자, 윤희지는 급히 바위장벽을 만들었다.
푸시식….
‘대단한 위력…!’
녹색 구름이 품고 있는 산성이 어찌나 지독한지, 언령의 힘이 깃든 바위장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정도다. 전설로만 회자되는 블랙드래곤의 애시드 브레스(Acid breath)가 떠오르는 위력이었다.
독왕은 아연해하는 윤희지를 바라보며 주름진 입꼬리를 실룩 말아 올렸다.
“잔꾀를 부리는 눈빛이군. 보통은 한번 부딪치면 지레 겁을 먹는데 말이야.”
“…확실히 강하긴 해요. 하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죠.”
“호오, 그게 뭐지?”
“흥!”
야멸차게 콧방귀를 뀐 윤희지의 주위에서 세 겹의 중첩 마법진이 떠올랐다. 각각 윤희지의 머리와 왼손, 오른손의 방위를 점한 마법진들은 중앙에 박힌 스태프의 뭉툭한 부분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척 봐도 범상한 주문이 아니다. 독왕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 만무했다. 두 눈을 가늘게 좁힌 독왕이 좌수를 휘젓자, 뱀 형상을 갖춘 독기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윤희지의 정면으로 쇄도했다.
허나, 윤희지도 멍청하게 약점을 노출한 것은 아니었다.
징그럽게 아가리를 벌린 뱀이 윤희지의 작은 몸뚱이를 한 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은 순간, 땅속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창이 뱀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머리를 잃어버린 채 관성을 따라 돌진하던 뱀은, 그 직후 지반을 뭉개며 등장한 거인의 육중한 동체에 가로막혀 허망하게 산화하고 말았다.
“허, 땅의 대정령?”
“고마워요, 트라눔(Tranum). 이제 충분해요.”
윤희지의 치뜬 눈동자에 싸늘한 냉기가 흐른다 싶은 찰나, 고속으로 회전하던 세 개의 마법진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더블 램페이지(Double rampage).”
“헛!”
윤희지의 스태프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던 마법진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자취를 감추었던 마법진은 독왕의 발아래에서 번쩍이는 빛을 토해냈다.
깜짝 놀란 독왕이 황급히 발을 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삽시간에 크기를 불린 마법진은 반구형의 막을 형성하며 독왕을 그 안에 가두었다. 우리 안에 갇힌 꼴이 된 독왕은 억지로 빠져나가려는 듯 두 마리의 독뱀을 소환하며 막의 내벽을 쾅쾅 두들겼다.
자연히 그 여파는 막을 유지하고 있는 윤희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녀로서는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사실, 본래 이 주문에 저런 보호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막은 스스로의 주문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우욱…! 몰아쳐랏!”
굵은 땀방울을 뻘뻘 흘리며 신음하던 윤희지의 붉은 입술에서 마침내 시동어가 떨어졌다.
반구형으로 둘러싸인 막 안에서, 기천을 헤아리는 암석 파편들이 생겨나며 사방에서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돌조각들이 십 미터 반경의 구체 내부를 빼곡하게 채운 탓에, 독왕의 작은 체구는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간간이 몰아치는 암석폭풍 사이로 엿보이는 녹색 기운만이 독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줄 따름이었다.
윤희지의 주문은 단지 암석폭풍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서운 와류를 형성한 암석폭풍 위에 끼얹어진 것은 혹한의 눈보라였다. 투명한 얼음 알갱이와 뾰족한 돌조각이 뒤섞인 바람은 무시무시한 기음을 내며 맹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마치 원통 안에 담긴 내용물을 사납게 갈아대는 초대형 믹서기를 연상시키는 광경이다. 저런 우박폭풍 속에서는 십존이 아니라 십존 할아버지라도 살아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악, 하악…!”
술자인 윤희지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무리하게 공격주문과 보호주문을 병행한 탓에, 그렇잖아도 하얀 그녀의 얼굴은 동상에 걸린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삼킨 윤희지는 살벌하게 소용돌이치는 우박폭풍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약점… 돌을 독으로 녹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거죠.”
한숨을 내쉰 윤희지는 사납게 날뛰고 있는 주문을 해제했다. 와류 사이로 새어나오는 녹빛 기운이 사라진 것은 둘째 치고, 보호막을 병행하는 것도 더는 무리였다. 상대해야 할 적이 아직도 산재해 있는 판국이니 여기서 힘을 더 소비할 순 없었다.
“주모님!”
“감찰 참모님!”
중앙 광장이 있는 방향에서 십여 명의 인물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익숙한 얼굴들… 모두 리베르타의 간부들이었다.
시기적절한 아군의 등장에 한 시름 놓은 윤희지는 힘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지만, 기진맥진한 얼굴로는 별 설득력이 없었다.
“마침… 후우! 잘 오셨어요. 지금 전황은 어떻죠?”
“수비대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그나마 피해를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윤희지는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떼어냈다. 피해를 완화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계속해서 들리는 이 비명소리는 뭐란 말인가?
사내를 꾸짖으려던 윤희지는 통한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니 말씀하세… 트라눔!”
교활한 살모사처럼 뒤를 덮치던 녹빛 광선이 또다시 암석 거인의 방패에 가로막혀 흩어졌다. 가까스로 일행을 위기에서 구해낸 윤희지는 바위정령의 듬직한 어깨 너머로 보이는 형체를 노려보았다.
전신이 피투성이에, 정면에서 산탄총 수백 발을 맞은 것처럼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그 형체는 분명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살아서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재생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걸 맞고도 죽지 않았다니…….”
“…크하! 제법 따끔한 수였어. 나도 늙긴 늙었나보군. 이 정도로 애를 먹다니…. 진언의 마도사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 아니면 마룡의 핵을 복용한 효과인가?”
“…당신, 재생능력도 있었던가요?”
윤희지는 크게 자책했다. 스캔에 걸리는 것이 없기에 사망했다고 단정지은 것인데, 알고 보니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래도 상황은 낙관적이었다. 아무리 독왕이라 할지라도 윤희지를 포함한 간부 다수를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을 테니까.
“흐허허! 누구나 비장의 수단은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나? 내 칭찬은 해 주지. 과연, 그만한 수로 밀어붙이니 전부 녹여낼 수가 없더군. 덕분에 몸이 아주 벌집이 되고 말았어.
“…이번엔 확실히 지옥으로 보내드리죠.”
“아니지, 아니야.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순 없지.”
너털웃음을 지은 독왕은 장난치듯 팔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가 걸어 나왔던 골목 안쪽에서 미약한 비명성이 새어나왔다.
“설마…….”
“아으으으…!”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독왕의 마력에 붙잡혀 끌려 나온 이들은 일가족으로 보이는 다섯 사람이었다. 늙은 노인과 중년의 남녀, 열 살 남짓한 남매.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들은 애처롭게 눈을 굴리며 살려 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윤희지와 그 일행을 앞에 둔 독왕은 예의 그 옆집 할아버지 같은 낯짝에 가증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이번엔 내 차례로군. 자네들의 약점은 지킬 게 너무 많다는 거지. 홈그라운드라고 해서 꼭 유리한 건 아니거든.”
“이, 이 비겁한! 독왕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가!”
“오, 오… 그렇게 마음대로 지껄여도 되겠나?”
“그륵, 끄르르르…….”
독왕이 가운데 손가락을 까딱이자, 허공에 매달려 있던 일가족 중 건장한 장년 남성의 눈이 까뒤집혔다. 잠시 후, 맥없이 벌어진 그의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구정물처럼 흘러나왔다. 볼 것도 없는 즉사였다.
“흐, 흐으으! 우으으으…!”
남자의 죽음을 목도한 나머지 식구들은 흐느낌이 뒤섞인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핏발이 서도록 충혈된 눈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지금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곧장 손을 쓰려고 했던 윤희지는 이를 갈아붙이며 영창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차하군요. 그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싶나요?”
“호오, 꽤나 세게 나오는군. 이번엔 어미를 죽여 볼까?”
“마음대로 하세요. 이쪽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들이 죽는다면, 당신은 더욱 고통스럽게 죽여드리죠. 단, 지금 그들을 풀어준다면 십 초 동안 도주할 시간을 주겠어요.”
마냥 인질에 휘둘리지만은 않겠다는 소리다. 도를 넘어선다면, 설령 인질이 죽더라도 그를 공격하겠다는 독기서린 의지. 독왕 정도의 인물이 그 밑에 깔린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흐음… 싫다고 한다면, 여기 인질들이 죽든 말든 공격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래요.”
“감찰 참모님!”
윤희지는 깜짝 놀라 부르짖는 간부들을 제지시켰다.
“책임은 제가 집니다. 지금은 전시예요. 부디 이 점을 주지하시길.”
“호오, 허우대만 멀쩡한 사내놈들보다 계집이 오히려 강단이 있군. 아주 가차 없는 여자야.”
“5초 남았어요. 선택하세요.”
윤희지의 경고성을 들은 독왕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분명히 인질을 잡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도리어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처자가 급하기도 하군. 정말 이들을 죽일 셈인가?”
“3초.”
“이보게….”
“2초.”
“…….”
“1초.”
마침내 카운트가 끝났다.
윤희지의 스태프 끝에서 은은한 청색 마력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 독왕은 인자하게 웃음짓던 얼굴을 싹 갈아치우고 정색을 했다.
“썩을 계집. 피를 보고 싶다면, 들어줄 수밖에.”
스산하게 중얼거린 그는 펼쳐져 있던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아직 살아있는 일가족 네 명의 목숨줄을 단호히 끊어내는 손짓이었다.
윤희지에게 애절한 시선을 보내던 네 식구의 얼굴빛이 시커먼 흑색으로 물든 순간.
피슝.
한 줄기, 팽팽하게 선 끈을 튕기는 듯한 파공성이 모두의 귓전을 때렸다.
가장 먼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건 독왕이었다. 아니, 이 경우엔 눈치 챈 것이 아니라 느꼈다고 해야 할까.
“이건 무슨…….”
독왕 나타는 얼빠진 눈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일가족 네 명을 붙잡아 두고 있던 그의 팔이 어깻죽지부터 흔적도 없이 날아가 있었다.
“스펠 스나이퍼…!”
독왕의 허탈한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윤희지의 스태프에서 방출된 뾰족한 얼음 기둥이 그의 상체를 강타하며 저 뒤로 멀리 날려버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은 다행히 12시 안에 두 편을 올릴 수 있었네요! 이제 반편 내로 리베르타쪽은 마무리짓고 구더기네로 턴이 넘어갈 듯합니다. 내일 올릴 때 지도와 아가레스트 저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장을 좀 더 자세히 묘사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주인공과는 별 상관없는 전장이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많이 있을 것 같으니까 자제하게 되네요.
질의응답은 내일 받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요즘 리리플 못달아 드려서 심히 죄송하네요.. 코멘은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즐거운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