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95)
0595 / 0777 ———————————————-
155# 맹위(猛威)
++++++++++++++++++++++++++++++
노구덕의 조언을 받아들인 윤희지는 팔콘에서 복귀한 병력들을 이끌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대부분이 부상에 신음하는 패잔병들이라지만, 그 수가 오륙백을 헤아린다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가 아니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쓰기에 따라선 이 불리한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버릴 수 있었다.
하물며 투르의 한쪽 날개를 맡고 있었던 미치광이 부르군트가 전사한 이후라면야.
심한 부상자를 제외하는 등, 짧은 시간 내에 재정비를 마친 리베르타 군은 게이트 체임버를 나서는 동시에 투르 군대가 구축한 포위망 한쪽을 일시에 기습했다. 그 전위를 맡은 선봉대장은 리베르타 최속(最速)의 트릭스터 조용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부대의 등장, 그리고 적의 깃대에 꽂혀 있는 부르군트의 수급을 본 투르의 병력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의표를 찔린 투르병들은 조용진이 주축이 된 리베르타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쓸려나갔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힌 건, 상공을 장악한 윤희지의 우박세례였다.
“램페이지(Rampage)!”
윤희지는 뭉쳐있는 투르의 병력을 한 데 가둔 뒤, 예의 그 살인 우박을 불러와 수십에 이르는 적병들을 처참하게 갈아버렸다. 그렇다. 그건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는 표현 외에 달리 형언할 길이 없었다.
뭉쳐 있는 사람들을 우박으로 무참하게 짓이겨 놓았으니, 그 참상은 실로 끔찍할 정도.
오죽하면 뒤늦게 게이트 체임버를 나섰던 노구덕이 그 광경을 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을까.
“독하기는 여전하군. 하여간, 대단한 여자야.”
향후 평판을 생각하면 저토록 잔혹한 행동을 벌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단시간 내에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서슴없이 악수(惡手)를 두었다. 악수라는 것은 윤희지 스스로의 평판을 깎아먹기 때문에 악수인 것이고, 아군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는 장군이었다.
지독하리만치 과감한 결단과 행동력. 김정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서슴지 않는 맹신. 저런 면모가 있었기에 그녀가 지금의 위치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괜히 ‘사갈(蛇蝎)’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으, 으으… 우우욱…!”
“흐엑! 뭐, 뭐야… 징그러…! 윽…!”
쯔쯔 혀를 차는 노구덕의 뒤에서 연신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썩은 사과처럼 누렇게 뜬 얼굴로 메스꺼운 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은 이쪽 장르(?)에 아직 면역이 덜 된 햇병아리들이었다.
하기야, 방금 전에도 부르군트의 수급을 보고 표정이 좋지 않았던 아이들이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감당하기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았다. 본래는 노구덕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현장에 투입시킬 예정이었다. 그게 정석 코스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건 병아리들이 이번 일에 나서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무턱대고 월반을 시도한 이상, 그에 따른 대가와 책임을 짊어져야만 했다.
“이 정도에 못난 꼴을 보일 거면 지금 당장 돌아가라. 그런 담량으로 뭘 하겠단 거냐?”
“……!”
노구덕의 준엄한 질책에, 허리를 굽혀 토악질을 하던 병아리들은 억지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죽을상을 한 얼굴로 입을 악다문 모습이 퍽 우습기도 했지만, 나름 야무지게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들을 무심하게 훑은 노구덕은 다른 멤버들에게 눈짓을 하며 지시를 내렸다.
“이대로 라스바덴을 빠져나간다. 될 수 있으면 싸움에는 관여하지 마라. 앞에 걸리적거리는 놈들만 치운다. 알고 있겠지만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라.”
말을 마친 노구덕은 데모나와 안세희를 각기 오른팔과 왼팔로 끌어안았다. 당연하다는 듯 안기는 데모나와는 달리, 엷은 홍조가 오른 안세희는 살짝 주저하는 기색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소냐와 데미안이 각각 임가희와 한승우의 등에 업히는 것까지 본 노구덕은 턱을 까딱이며 방향을 가리켰다. 남문 방향이었다.
“이두식, 박지현. 길을 뚫어라.”
“예!”
쏘아진 화살처럼 튀어나간 두 사람은 난전으로 치닫고 있는 전장을 무인지경으로 돌파했다.
성공적인 첫 기습에 이어, 부르군트의 죽음이 알려진 데에서 기인한 혼란과 윤희지의 잔인한 연출로 인한 공포. 삼중고가 더해진 투르병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력하게 나가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팔콘에서의 대패가 본진의 구원줄이 되었다.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던 리베르타로서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라스바덴에 침입한 투르병들은 지금 패퇴하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르군트의 명령을 따르는 우군(右軍). 아직 하얀 악마 김인성이 이끄는 좌군(左軍) 병력과, 플랑기스의 지휘를 받던 중군은 고스란히 남아 도시 내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광장 동쪽의 대로에서 일단의 병력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선두엔 눈처럼 새하얀 로브를 걸친 젊은이가 얇은 입매를 비죽하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하얀 악마 김인성이 이끄는 좌군의 출현이었다.
“하얀 악마다!”
“저, 저건 구, 군무부장 님이잖아…!”
“억! 헤드헌터가…!”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김인성의 좌군. 그 선두의 기수가 들고 있는 깃대엔 이쪽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잘려나간 수급이 꿰여 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두 개의 머리는 리베르타의 주요 간부인 군무부장과 헤드헌터의 것이었다.
한껏 고무되었던 리베르타군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 투르군에게 행했던 수법을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군무부의 총책인 군무부장의 목이 저기에 꽂혀있다는 것….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투르의 좌군과 교전을 벌이던 군무부가 궤멸했다는 것 외에 달리 뭐가 있을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는데요! 차앗!”
“신경 쓰지 마라. 저기까지 봐 줄 의리는 없어. 시간도 없고. 우린 우리 일을 한다.”
뒤집혔던 전황이 다시 팽팽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노구덕 일행에게는 그저 남 일에 불과했다.
난전을 틈 타 전장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일행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남문으로 향했다. 투르군이 처음 비집고 들어온 북문에서 정반대편에 있는 남문은 때 아닌 난리에 아우성치는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으나, 어차피 성문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던 일행에겐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성벽을 훌쩍 뛰어넘어, 라스바덴에서 멀찍이 떨어진 어느 야지에 다다른 일행은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희지가 말한 대로라면, 정인이 녀석이 폐관하는 산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정말 갈 생각이야? 이 짐덩이들을 데리고?”
“지, 짐덩이라니. 너무해….”
데모나는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까는 윤희지가 있었기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실전 견학’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부터 향할 곳은 자그마치 십존 넷이 얽혀있는 전장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곳.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일지도 몰랐다.
다시 말해, 병아리들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순 없다는 뜻.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짐덩이니 뭐니 비꼬기는 했지만, 데모나가 반대를 피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병아리들을 걱정해서였다.
“내키지 않아 보이는군.”
“그걸 말이라고 해? 난 그 인간이 싫어. 그래, 네 말대로 백번 양보해서 도와준다고 치자. 사감과 정치적 문제는 별개니까. 하지만 그 자리에 저 애송이들을 데리고 간다고? 시체만 봐도 꺅꺅거리는 풋내기들을?”
“누… 누가 시체 보고 꺅꺅거렸다고 그래요….”
임가희의 소심한 항의는 보기 좋게 묵살 당했다. 반대를 표명하는 데모나와 눈을 맞춘 노구덕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오해를 했군. 그 산으로는 가지 않아.”
“…무슨 소리야?”
“산에는 나만 간다.”
“뭐?”
혼자 가겠다니. 데모나를 포함한 일행은 얼빠진 얼굴로 노구덕을 바라보았다.
“그 계집애를 속일 생각이야?”
“속이는 건 아니지. 애초에 그 녀석에게 말할 때도 내가 간다고 했으니까.”
“…말은 잘하네.”
확실히 노구덕은 ‘내가 간다.’라고만 했지, 일행 전부가 간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수준낮은 말장난이긴 하지만, 때로는 이런 말장난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형님, 혼자서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맞아요, 대장. 안 그래도 소수인원인데 여기서 더 나눈다는 건 좀…….”
“그래야만 해.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노구덕은 이두식과 박지현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안 데모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흥, 언제나 이런 식이지.”
“미안하다.”
“됐어. 그런다고 마음을 바꿀 것도 아니잖아? 단, 너도 알다시피 여기서 살타까지는 시간이 꽤 걸려. 차라리 라스바덴의 워프게이트를 이용했다면 형편이 나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라스바덴의 워프게이트를 쓸 수는 없었다. 윤희지 등, 보는 눈들이 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살타 쪽 게이트를 타는 게 더 문제였을 거다. 도시 안쪽까지 포로들을 데려왔을 리 없을 테니……. 정황상, 패터슨은 놈들의 주둔지에 억류되어 있을 거다. 차라리 외곽에서 찾는 편이 좋아.”
“외곽이라면, 단발성 워프를 이용하자는 말이야?”
“그래. 라스바덴과 살타 정도의 거리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불가능해. 단순히 거리로 따지자면야 그렇지. 하지만 반대편에 게이트가 설치된 것도 아니잖아?”
데모나의 말은 정론이었다. 즉석 워프를 쓰려면 반대쪽에 따로 준비를 해 놓아야 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지 않으면 주문 자체가 불안정해져, 순간이동과 동시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몸이 끔찍하게 분해되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목표 지점의 좌표와 변수를 모두 고려해 수식(數式)을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계산 능력을 지닌 인간이 어디 흔하던가? 그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나 가능한 영역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불가능하지. 하지만… 있잖아? 그게 가능한 사람이.”
“…….”
“얘야, 가능하겠지? 그만한 능력도 없이 따라나서진 않았을 테니.”
“네.”
다른 말은 없었다. 노구덕의 눈길을 받은 소냐는 주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맡겨만 달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뜻하지 않게 소냐가 선취점을 올리자, 그 주변에 둘러서 있던 병아리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들을 힐끔 바라본 노구덕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리한다. 나는 이대로 산으로 가겠다. 너희들은 살타로 가서 반군의 주둔지를 뒤져라. 외곽 주둔지는 비어있을 테니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다. 분을 넘어선 전쟁 개입은 엄금한다. 오로지 붙잡힌 패터슨 일행을 구출하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여라.”
노구덕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만약, 패터슨이 그와 연관이 있다는 걸 하유라가 알았다면, 그들을 찾았다고 해도 문제였다. 아마도… 좋은 모습은 아닐 터.
“…항상 최악을 가정해라. 절대 좋은 꼴은 아니겠지. 내가 너희들을 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그 의미를 항상 새겨두고 행동해라.”
“…예.”
“알겠습니다.”
병아리들에게 대답을 받아낸 노구덕은 여전히 염려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나머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혼자는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혼자가 아니다.”
“예?”
노구덕은 가늘게 뜬 눈을 빛내며 말했다.
“…생각해둔 게 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녁에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