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96)
0596 / 0777 ———————————————-
156# 검왕 vs 십존
156# 검왕 vs 십존
노구덕이 야산 초입에 들어선 것은, 일행과 헤어진 뒤 약 십오 분이 지나서였다.
“정인이 놈, 왜 이렇게 먼 곳에 둥지를 튼 거지? 도라도 닦을 셈이었나?”
말이 달려서 십오 분이지, 노구덕의 달리기 속도를 감안하면 굉장히 멀리 떨어진 거리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라고 해도 다소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보급을 담당하는 하태경과 윤희지 등 몇몇이 전부. 물자를 보내는 일도 만만찮았을 터였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오지. 야산치고는 굉장히 험하고 커다란 산지였다. 게다가 가도가 정비된 것도 아니었으니. 참 용케도 이런 곳을 찾았다.
김정인의 선택에 잠시 의문이 일기는 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 노구덕은 잡념을 걷어내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벌써 거하게 한판 벌인 모양이군.”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격전의 흔적이 이름 모를 야산의 군데군데에서 엿보였다.
원래라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울창한 녹음을 자랑했을 터인 산등성이 중앙이 홀라당 벗겨져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반경 수백 미터가 넘는 광대한 면적의 잎사귀들을 모조리 날리고도 모자라, 오래된 고목들의 허리까지 꺾여버린 그 광경은 마치 초강력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폭풍이 저곳 한 지역에만 몰아쳤을 리는 없다. 저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분명 폭풍왕 라키오라의 손이 닿은 것일 터다.
민둥산이 되어버린 지역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그 바로 옆, 같은 능선을 타고 수십 미터 떨어진 곳 역시 나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불모의 대지가 되어 있었다. 앞서의 장소와 다른 점이라면, 그 땅은 나무들이 꺾이거나 부러진 것이 아니라 검은 진액으로 녹아버렸다는 것이 다를 뿐.
유황지대처럼 허연 수증기를 뿜어내는 불모지를 본 노구덕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저건 뭐지? 강산(强酸) 종류인 것 같은데… 독? 설마 독왕?”
이만한 수준의 전투에서 저 정도의 강산성 독을 사용하는 실력자라고 한다면, 윤희지가 언급했던 독왕 외에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격퇴했다고 들었는데… 전투불능은 아니었단 소린가?”
플랑기스, 하유라, 라키오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만한 실력자가 하나 더 늘었다. 이건 계산에 없던 변수였다.
“…저건 하유라로군.”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흘러내리는 독지 위, 산 정상 부근은 아이스크림처럼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일대를 빙하지대로 변모시킨 저 위력은 말할 것도 없이 서리여왕 하유라의 솜씨가 틀림없었다.
이름조차 없는 야산 주제에 높은 산지에서나 볼 수 있는 만년설을 끼고 있다니. 이걸 때 아닌 호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피해라고 해야 할지.
볼썽사나운 땜빵이 벌써 여러 군데 생긴 야산을 올려다보던 노구덕은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아무리 그간 많이 강해진 그라고 해도, 이런 싸움에 잘못 휘말리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독왕은 계산에 없었는데.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꽈앙!
중얼거리기 무섭게 들려오는 폭음. 산등성이 뒤편에서 난 소리였다.
“…그래, 쉽게 죽을 리가 없지. 그놈이 어떤 놈인데. 괴물 같은 놈.”
십존급 실력자 네 명을 상대로 아직까지 교전을 벌이고 있다니. 이 정도면 괴물이란 표현도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가야할 곳을 특정지은 노구덕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그 신형이 쭈욱 길게 늘어나는 듯하더니, 어느새 까만 점이 되어 우거진 녹림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
꽈앙!
“이 거머리 같은 새끼! 좀 떨어지란 말이다아아아–!”
거친 폭언과 함께 수많은 검광이 안개처럼 일어났다. 플랑기스가 피워 올린 흐릿한 검무리는 지척에 붙어 있는 김정인의 주변을 샅샅이 에워쌌다. 난폭한 입담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교한 검술이었다.
그러나 그 상대는 검왕 김정인이었다. 검에 한해서라면 대륙 최강이라 칭송받는 자. 그 앞에서 검으로 기교를 부린다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과 진배없다.
동시다발적으로 쇄도하는 검기의 무리를 흐트러뜨린 것은 단 일검(一劍)이었다. 김정인의 철검이 가로로 반듯하게 휘둘러지며 공간을 베어내자, 사납게 달려들던 검광이 그 선을 감히 범접치 못하고 힘이 다한 촛불처럼 아스러졌다.
플랑기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김정인의 눈빛이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그 시선을 느낀 플랑기스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제길, 제길! 다들 뭐하는 거냐! 이놈 좀 떨쳐내라고!”
“닥쳐!”
뾰족한 일갈이 불러일으킨 것은 매서운 얼음폭풍이었다. 윤희지의 그것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얼음폭풍은 순식간에 김정인이 딛고 선 대지를 새하얀 색채로 물들였다.
문제라면, 그 지근거리에 있는 플랑기스마저 권역에 들어갔다는 것.
“개 같은 년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플랑기스는 스펠실드(Spell shield)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서리여왕이 일으킨 눈보라라 할지라도 어쨌든 주문은 주문. 거의 모든 종류의 주문을 무위로 돌려버리는 그의 스펠실드를 통과할 순 없었다.
주문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김정인도 마찬가지였다. 집채만 한 바위를 으깨고, 두꺼운 고목조차 짓이긴 얼음알갱이들이건만, 김정인이 둘러친 검막(劍幕)에 닿은 순간 잘게 깨어지며 허무하게 바스라졌다.
수천, 수만 발의 얼음 총탄이 휩쓸고 지나간 대지는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그 가운데 멀쩡하게 서 있는 이는 오직 두 사람, 김정인과 플랑기스밖에는 없었다.
“검왕! 이 무슨 교활한 수법이오!”
휘이잉!
눈보라의 여파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다음 공격이 뒤를 이었다.
장포를 펄럭이며 솟아오른 라키오라가 손을 휘젓자, 김정인의 발밑에서 별안간 나선형의 바람이 치솟았다. 라키오라가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이자, 그의 수족과도 같은 용권풍(龍捲風)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두 개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김정인을 집어삼키며 하나로 합쳐졌다. 강대한 바람의 마력으로 형성된 허리케인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위로 날려버렸다. 그 강력한 자연의 힘 앞에선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가죽도, 깊게 뿌리내린 나무둥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플랑기스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김정인을 드디어 가두는데 성공한 라키오라는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독왕!”
“알고 있네!”
용권풍을 둘러싼 대기가 바다 위 녹조류처럼 초록색으로 일변했다. 그러자 꽁꽁 얼어있던 고목들이 염산을 부은 양 흐늘흐늘 뭉그러지며 녹아내렸다. 척 보기에도 지독한 독기를 품은 녹색 안개는 독왕이 떨쳐낸 독구름이었다.
회색빛의 회오리바람이 연한 초록빛으로 물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용권풍은 그 무서운 독기까지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강한 상승기류에 휘말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간 온갖 물체들이 검게 변해 부스러졌다. 그 위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근거리에서 스펠실드를 유지하던 플랑기스가 바득 이를 악물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주문이다. 아니, 주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이 발휘한 권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십존 두 사람의 기운이 합쳐진 결과물이니 오죽할까마는.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라키오라와 독왕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하유라와 플랑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검왕은 고작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크라이어제닉 쇼크!”
겨울을 몰고 오는 신기, 아발란체가 우아한 사선을 그렸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투명한 검날에서 뿜어진 짙푸른 한기가 투명한 얼음의 길을 만들었다.
크라이어제닉 쇼크.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권능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공기도, 땅 위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녹색의 독기도 고스란히 얼려버리는 장관을 선보이며 태풍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하유라는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용권풍 자체를 통째로 얼려버릴 속셈이었다.
믿을 수 없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은, 하유라의 권능이 용권풍을 집어삼키기 바로 직전이었다.
바람이 갈라졌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가로 반듯하게 그어진 선을 중심으로 공간이 어긋났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 것은 노을빛의 검기를 머금고 있는 철검이었다.
극에 이른 네더블레이드는 검은색의 빛깔이 자주색에 가까운 노을빛으로 변하고, 검 자체가 차원의 균열을 만들며 닿는 모든 것을 베어낸다. 아니, 이 경우엔 빨아들인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었다.
용권풍 속에서 탈출한 김정인은 비조처럼 몸을 날려 크라이어제닉 쇼크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길게 서술했지만, 이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눈 한번 깜짝할 새도 되지 않았다.
“잡앗!”
“독룡(毒龍)!”
그 번개 같은 움직임을 쫓아 회색의 칼바람이 일어나고, 녹색의 용이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포효했다.
그러나 김정인은 바람보다도, 독룡보다도 재빨랐다. 섬전처럼 내달리는 그의 목표는 저만치서 쩍 입을 벌리고 있는 플랑기스였다.
“또, 또 나냐!”
진저리를 친 플랑기스는 사력을 다해 도주를 감행했다. 허나, 애초에 김정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그가 검왕의 손을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삽시간에 뒤를 잡힌 플랑기스의 낯빛이 노래졌다. 공간을 무자비하게 허물어뜨리며 다가오는 저 검세(劍勢)는 그가 받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꽈아아앙!
다시 한 번 귀청이 떨어지는 폭음이 울렸다.
“크윽! 크으으!”
충격의 여파에 멀리 튕겨나간 플랑기스는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어찌 됐든, 검왕의 네더블레이드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공포스럽기까지 한 노을빛 검기를 막아낸 것은 하유라의 빙벽이었다. 목표를 잃은 크라이어제닉 쇼크를 되돌려, 김정인과 플랑기스 사이의 대기를 급속냉동, 절대적인 얼음의 방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크라이어제닉 쇼크의 방어버전, 크라이어제닉 실드(Cryogenic Shield)였다. 네더블레이드에 조각이 난 시점에서 ‘절대적인 방벽’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되긴 했지마는.
하지만, 산산이 부서진 얼음벽의 잔해 속에 서 있는 김정인의 낯빛도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용권풍을 탈출하느라 상당한 힘을 소비한 듯, 그의 호흡은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검왕도 많이 지친 것 같구려.”
“허허… 우리도 아슬아슬하다는 게 문제지.”
“이래선 끝이 없어. 지구전으로 가면 이쪽도 위험하다.”
하유라가 단정지어 말했다. 다른 두 사람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들이 힘겹게 끄덕여졌다.
그도 그럴 게, 벌써 몇 번째 이와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김정인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플랑기스를 노렸다. 바람과 독, 얼음을 다루는 나머지 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플랑기스가 훨씬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도 그 판단은 정확했다. 마법사들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플랑기스는 그 장기가 통용되지 않는 김정인 앞에선 한없이 무력했다.
김정인이 플랑기스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탓에, 자연히 나머지 세 사람의 공격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하면, 김정인을 잡으러 온 플랑기스가 도리어 인질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는 앞서 나타난 상황의 반복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의 공격을 쳐낸 김정인이 플랑기스를 물고 늘어지고, 그가 위험에 처하면 다른 세 사람이 나서서 도와준다. 어떻게든 강한 공격을 집중시키고 싶어도 가까이 붙어 있는 플랑기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머지 세 사람으로선 차라리 플랑기스가 없는 게 낫다고 느껴질 정도.
“…이대론 안 돼.”
“허어, 설마…….”
“흐흐흐.”
표독하게 날이 선 어조에서 느껴지는 짙은 살의를 읽은 것일까. 독왕의 입에서 묘한 탄식이 흐르고, 라키오라의 입매가 진득하게 비틀어졌다.
“미끼다. 도움 안 되는 쓰레기에게 걸맞은 역할이지.”
차갑게 중얼거린 하유라는 투명한 광채를 뿌리는 아발란체를 꼿꼿하게 치켜들었다.
“여기서 끝장을 본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일도.. 연참합니다!
즐거운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