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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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검왕 vs 십존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일어났다. 사방에 뿌연 독무(毒霧)를 퍼뜨리는 독룡이 사나운 어금니를 드러내고, 푸른 권역을 중심으로 혹한의 추위가 몰려왔다.
어느덧 호흡을 원래대로 되돌린 김정인도 철검에서 노을빛 검기를 뽑아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플랑기스 또한 부릅뜬 눈에서 활활 투지를 불태웠다. 거듭된 일전으로 자존심이 짓밟힐 대로 짓밟혔으니, 악에 받칠 만도 했다.
이윽고, 경천동지의 싸움이 재개되었다.
김정인은 전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플랑기스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양, 영락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세 사람은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플랑기스에게 주문을 전개했다.
“플랑기스! 화력을 집중하겠네! 전력을 다하게나!”
“뭐, 뭐라고?”
“자네의 장기로 견뎌내란 말이야!”
쩌저저정—!
허공에서 돋아난 빙벽이 순식간에 플랑기스와 김정인을 둘러쌌다.
김정인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독왕과 플랑기스의 대화에서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 챈 것이다.
얼음 테두리에 갇힌 김정인은 곧장 몸을 날려 위로 뛰어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얼음 감옥 위는 사나운 태풍이 살을 저밀 듯한 칼바람을 뿌려대고 있는 중이었다.
쾅!
태풍 사이에 숨어 있던 독룡의 포이즌 브레스(Posion breath)에 직격당한 김정인의 신형이 아래로 뚝 추락했다.
“젠장할!”
꼼짝없이 괴물과 함께 갇혀버린 플랑기스는 욕설을 지껄이며 방어막을 둘러쳤다.
‘개 같은 연놈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화력을 집중하겠으니 전력을 다하라는 독왕의 말이 무슨 뜻이겠나. 그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목적을 위해 잠시 하나로 뭉쳤을 뿐인 그들 네 명에게 서로의 안위를 돌봐야 할 의리는 없었다.
무척이나 가혹한 처사였지만, 플랑기스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말을 안 하고 있었다 뿐이지, 그도 자신 때문에 싸움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검왕이 그만 노린다는 것 자체가 이중 가장 약체가 그라는 것을 대놓고 지목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그는 발언권이 없었다. 그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이미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죽일 놈들! 두고 보자!’
“크으으으윽…!”
찢어질 듯 치뜬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빙벽 안으로 스며든 세 가지 거대한 힘이, 그의 스펠실드를 사정없이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살갗을 파고들어 뼛골까지 스며드는 지독한 한기.
역겨운 냄새만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하는 독기.
닿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분쇄하는 살인 폭풍.
끼기기기긱—!
모든 종류의 주문을 비롯해, 마력에서 비롯된 힘에 대해선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스펠실드가 금방이라도 깨어질듯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조금 전 하유라의 눈보라를 받아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었다.
한파와 독기, 바람에 삼켜진 김정인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인다 해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전신에 핏대가 징그럽게 불거진 플랑기스는 벌겋게 된 낯짝을 씩씩거리며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했다.
그나마 엄청난 항마력을 지닌 그였기에 이 정도까지 버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한 줌 먼지가 되어 소멸했을 터다.
‘씨팔… 장난이 아니잖아! 까딱 잘못하다간… 끄으으으으!’
죽는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 개 같은… 날 정말 죽일 셈인가!’
까득, 까드드드드드—!
스펠실드가 요란하게 울부짖을수록, 플랑기스의 초조함도 더해졌다.
그의 스펠실드는 상대의 마력을 빨아들여, 힘을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삼는다. 플랑기스가 십존이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과거에 마도왕 티렐의 모든 공격을 스펠실드로 받아낸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전의 에덴 공방전에서 라키오라의 용권풍을 무위로 돌리는 실력을 보인적도 있었고.
하지만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십존급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그런 괴물들이 자그마치 셋. 스펠실드가 수용할 수 있는 힘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사실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으득! 더는 안 되겠다. 그걸… 그걸 써야 돼!’
과부하가 걸린 스펠실드는 이미 반쯤 녹은 살얼음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진 플랑기스는 품속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스크롤을 쥔 그의 몸짓은 무척 귀중한 것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라는 얘기. 실제로, 그 스크롤의 가치는 만금의 값어치로도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스크롤을 쥔 플랑기스의 눈에 극심한 갈등의 빛이 어렸다.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 스크롤 하나로 도왕 장명진이 이끄는 이레시온 군을 전멸시킨 플랑기스다. 이미 그 달콤한 맛을 보아서인지, 선뜻 사용하기가 망설여졌다. 하물며 ‘그’에게서 받은 스크롤은 달랑 이것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제기랄… 여기서 쓰려고 했던 물건은 아니었는데…….’
본래 그의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예정대로라면 이 스크롤은 검왕을 쓰러뜨린 후, 기진맥진한 나머지 세 명에게 써먹어야 할 물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귀찮게 깐족거리는 라키오라와 독왕 늙은이를 처치한 후, 도도하기 짝이 없는 하유라를 맛있게 먹어치울 생각이었는데……. 모든 것이 틀어졌다.
까득!
떨쳐낼 수 없는 아쉬움에 망설이던 플랑기스는 퍼뜩 정신을 수습했다. 스펠실드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새겨지는 것이 보였다.
이젠 물불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젠장! 이쯤이면 그놈도 죽었겠지!’
항마력에 특화된 자신도 버겁다 못해 진이 빠질 지경인데, 검왕이 살아남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가능성은 단 일말이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마지막 남은 그의 자존심이었다.
결정을 내린 플랑기스는 질끈 눈을 감고 손에 힘을 주었다.
찌이익!
애지중지 간직하던 스크롤이 두 쪽으로 찢어지면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천신의 분노인 양 휘몰아치던 북풍한설이 사라졌다. 바닥을 메스껍게 태우던 독기가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사그라들고, 대지를 찢어발기던 성난 광풍도 한 줄기 잔잔한 미풍으로 변했다.
서리여왕의 얼음, 폭풍왕의 바람, 독왕의 극독….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하나 같이 대륙 최강을 다투는 권능들이 정체불명의 빛을 쐬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기적이란 말인가?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땅이 갈리고, 하늘이 찢기는 굉음으로 가득했던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지니, 어쩐지 괴기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다.
“…이, 이게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적막을 깬 것은 역시나 이들 중 가장 수다스러운 라키오라였다. 라키오라는 방금 겪은 일이 쉬이 믿겨지지 않는 듯,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허어…. 이건 대체…….”
“…….”
독왕의 반응 또한 허탈해하는 라키오라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리여왕 하유라만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표독스럽게 눈을 치뜬 모습이었다.
털썩.
어디선가 누가 힘없이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스크롤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플랑기스였다. 힘없이 무너진 그의 시선은 어느 한 방향에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뒤로 설설 기는 그 표정엔 질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으으으으…! 이… 괴, 괴물 같은 새끼!”
투르의 국왕이자, 그 오만무도한 성정의 플랑기스가 두려움에 벌벌 몸서리를 치고 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엉망으로 박살난 대지 한복판에 서 있는 단 한 명의 사내였다.
검왕 김정인. 그가 아직 살아있었다.
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고 선 그의 행색은 처참했다. 옷가지는 갈가리 찢겨져나가 누더기나 다름없었고, 군데군데 드러난 살갗은 모두 베이거나 타들어가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 본다면, 당장 쓰러져 숨이 끊어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게다가, 그 눈빛.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갈고 닦은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기가 꺾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 무시무시한 공세를 꼼짝없이 맞받아 내고서도, 그는 아직도 여력이 남아 있었다.
푸후… 힘겹게 숨을 토해낸 김정인은 앞에 주저앉아 있는 플랑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헙!”
그와 눈을 마주친 플랑기스의 목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플랑기스는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대륙을 질타하는 절대자가 꼬리 만 개새끼처럼 겁에 질려버린 것이다.
1초? 2초? 대체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어느 순간, 대나무처럼 서 있던 김정인이 점멸하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검왕이 사라지자,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에 순간 넋을 놓았던 이들은 다급한 경악성을 발했다.
“으헛! 독룡!”
상처 입은 야수의 첫 표적이 된 것은 독왕 나타였다. 우측에서 찌를듯한 살기를 감지한 나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서걱!
깡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이 높이 치솟았다. 한순간에 오른팔을 잃어버린 독왕은 연신 피를 내뿜는 팔꿈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저기서 가공할 독기가 뿜어졌어야 할 터인데,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째서…? 컥!”
독왕의 사지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내,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빨간 선이 그어진 그의 몸뚱이가 썩은 고목처럼 뒤로 넘어갔다. 지면에 부딪친 늙은 몸뚱어리는 끔찍하게도 두 쪽으로 나뉘며 내장과 창자 더미들을 쏟아냈다.
“아니, 아니! 바람이…! 마력이 사라지다니! 우아아악!”
힘을 잃어버린 것은 폭풍왕 라키오라도 마찬가지였다. 패닉 상태가 된 라키오라는 독왕이 뒤로 넘어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재빠른 상황 판단이었다. 십존의 체면이고 뭐고, 일단 살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도망이 가능할 때에나 성립하는 얘기.
독왕을 처치한 김정인은 무심히 검을 휘둘러 검기를 쏘아 보냈다. 분명 그 또한 정체불명의 빛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검에는 유백색의 선명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와아아악!”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던 라키오라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앞으로 나뒹구는 그의 다리는 정강이 아랫부분부터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물론, 김정인이 쏘아 보낸 검기에 의한 것이었다.
일단 라키오라를 전투불능으로 만든 김정인은 다음 목표인 하유라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힘을 잃었다면 그녀 또한 멀리가지는 못했을 터.
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방금 전까지 라키오라 근처에 있었던 하유라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
시종일관 무심하던 김정인의 표정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때.
퍽!
어디선가 날아온 새하얀 섬광이 김정인의 육신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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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가게가 바빠진 관계로 부득불 오늘 예정되었던 연참을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일하다 여유가 생기면 새벽에 올릴 수도 있겠지만, 너무 피곤하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ㅠㅠ
p.s 김정인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 당연히 천재니까.. 가 아니라!
쉽게 말해서 김가놈이 소냐와 티렐의 최종 목표를 이미 반쯤 달성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