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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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말로(末路)
157# 말로(末路)
그 말이 기폭제였다.
“벌레가!”
격노한 하유라는 빠득 잇소리를 내며 마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빨을 드러낸 수십 개의 고드름이 노구덕에게 빗발쳤다.
쾅! 쾅! 쾅! 산개한 고드름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갔다. 시원하게 낫질을 하듯, 호선을 그리며 한꺼번에 고드름을 쳐낸 노구덕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하유라에게 달려들었다. 경악한 하유라는 급히 얼음기둥을 세우며 그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허나 마검에 의지한 허접한 빙벽으로는 노구덕을 막을 수 없었다. 노구덕의 주먹질은 김정인의 철검을 튕겨낸 얼음기둥을 순두부처럼 으깨버렸다.
꽈아앙!
“컥!”
귀가 먹먹한 굉음이 가시기도 전, 얼음기둥을 뚫고 튀어나온 노구덕의 주먹은 하유라의 가녀린 목을 잡아챘다.
대경실색한 하유라는 발악하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한독(寒毒)이 어린 그녀의 검은 노구덕의 피부에 아주 얕은 자상을 내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끅! 끄극!”
목줄을 잡힌 하유라는 미친년처럼 검을 휘둘렀다. 검술도 뭣도 아닌, 분풀이를 위한 마구잡이식 베기. 흉하게 불거진 그녀의 눈엔, 노구덕을 난자한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살심만이 그득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기력이 다 빠져나간 그녀의 힘으론 노구덕을 난자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칼집을 내기도 벅찼다.
“맛이 갔군.”
마검에 잠식당한 하유라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본 노구덕은 지그시 손에 힘을 주었다.
우득!
그녀의 목뼈 부근에서 무엇인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면서, 살광으로 번들거리던 하유라의 눈이 허옇게 돌아갔다. 노구덕은 눈을 까뒤집고 늘어진 하유라의 몸뚱이를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퍽! 육신과 바닥이 충돌하며 섬뜩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 대(大) 자로 널브러진 하유라가 마구 경련을 일으키며 끅끅거리는 걸 보니, 속이 진탕 뒤집힌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죽진 않지. 그래선 십존이라는 이름이 아깝잖아.”
만전(萬全)의 노구덕과 만신창이의 하유라. 그 힘의 차이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다.
“흐으, 흐으으으…!”
거품을 문 하유라는 몸을 벌벌 떨었다. 마검을 억지로 놓쳐버린 탓에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그녀에겐 더 큰 불행이었다.
창자와 장기가 가닥가닥 끊어져 제멋대로 놀아나는 것 같았다. 바닥에 패대기칠 때의 충격으로 왼팔이 부러졌고, 정강이뼈도 금이 간 데다, 골반도 미약하게 뒤틀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성한 곳이 하나 없다. 김정인에 비할 바는 못 돼도, 이미 그녀는 전투불능이었다. 애초에 근접전으로 가리발디를 때려잡은 노구덕에게 쉽게 지근거리를 허용한 것 자체가 안이한 대처였다. 당연히, 그녀가 정상이었다면 절대 이런 상황은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금 하유라의 머릿속에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위에서 깔아보고 있는 노구덕의 무심한 눈초리였다.
‘벌레가… 이 쓰레기가……!’
“끄… 으으으읏…!”
하유라는 악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쭈그리고 앉은 노구덕이 지그시 몸을 누르고 있는 탓에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이런 몸으로 자력으로 설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허이구, 이마에 핏대가 섰군. 얼굴이 아주 홍시가 다 됐어. 그렇게 분한가? 열 받아 죽을 것 같아? 응?”
빈정대는 그의 말투가 드넓은 자존심에 뻥뻥 구멍을 낸다. 하유라의 꾹 다문 잇새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치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나도 네년이 처음부터 싫었어. 아주 싹퉁머리가 없었지.”
“…….”
하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구덕을 죽일 듯 노려보기만 했다. 반질반질한 살기로 점철된 그 눈빛은 마주 대하기가 거북스러울 정도. 그러나 노구덕은 태연히 그녀의 눈빛을 받아냈다.
“어디 보자… 눈깔이 하나 남았군. 나머지 하나도 뽑아줄까?”
“…교활한, 늙은 쥐새끼가, 고작 어부지리를 취했다고, 같잖게 으스대기는…… 끕!”
우드득! 꽈직!
하유라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이며, 까만 눈동자가 휙, 위로 말려 올라갔다. 무심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던 노구덕이 갑자기 그녀의 왼팔을 발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압력에 짓눌린 그녀의 왼팔은 뼈째 뭉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게지긴 했으나, 그가 기대했던 비명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노구덕은 툭툭 핏대가 선 얼굴로 끄륵거리는 하유라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슬슬 힘이 돌아올 때가 됐군. 한번 당해봤으니 잘 알겠지. 그걸 기다리고 있나?”
코로 거친 숨을 내쉬는 하유라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소용없어. 똑똑하니까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봤자 지금 네년의 상태론 날 이기지 못해.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노구덕은 김정인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네년의 그 잘난 능력을 발휘해라. 완전 회복까진 바라지도 않아. 대강의 응급처치만 하면 된다.”
“…….”
여전히 말이 없는 하유라. 그러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엄동설한 같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노구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기 싫겠지. 네년의 대가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안 봐도 뻔해. 하지만 말이야, 그 같잖은 자존심을 내세우려다 훅 가버리는 수가 있어. 그걸 알아야지.”
“…너 따위가….”
철썩!
하유라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터진 입술에서 작게 핏물이 튀었다. 그녀의 뺨따귀를 후려갈긴 노구덕은 그녀의 봉긋한 가슴팍을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짖어대지 마라. 이게 지금 네 위치다.”
더할 나위 없는 굴욕. 하유라는 비틀어진 머리를 다시 되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굉장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 자신이 언제 이토록 가혹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부르르. 발작하듯 떨리는 몸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물론, 하유라가 패닉에 빠지든 말든, 그건 노구덕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정인이 녀석을 고쳐준다면, 나도 널 이대로 놔주겠다.”
좋다 못해 파격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천천히 머리를 돌린 하유라의 얼굴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달콤해도 지나치게 달콤하다. 그런 제안,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개소리를 잘도 하는군.”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선택권이 없을 텐데? 만약, 네가 거절한다면…….”
그녀와 눈을 맞춘 노구덕의 표정이 명부의 사자처럼 스산하게 변했다.
“네 그 짜증나는 눈깔을 뽑아버리고, 혀를 제거한 뒤에 팔다리를 대충 토막 쳐서 매음굴로 보내버릴 거다. 전직 노예시장의 대모였으니, 잘 알고 있겠지. 대륙 최고의 미녀가 창부로 전락한다면 아주 인기 폭발이겠는걸. 화대는 돼지만도 못할 테지만.”
일개 세력의 수장이 입에 담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품위 없고, 저열하고, 살벌한 협박이다. 그러나 노구덕이란 인간이 어떤 배경 속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알고 있는 하유라에게 있어, 이보다 더 와 닿는 협박은 없었다.
짧은 침묵. 이윽고, 꾹 다물린 입술이 약하게 달싹였다.
“…알았다.”
“잘 생각했다.”
“웃!”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던 하유라는 힘없이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아직 스크롤에 당한 여파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치워라!”
노구덕이 내민 손을 뿌리친 하유라는 기어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 정강이뼈가 부러져 제대로 걷기 힘들 지경인데도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하유라란 인간이 살아온 생애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하여간 지독한 자존심 덩어리군.”
어째 윤희지도 그렇고, 하유라도 그렇고. 동부의 여자들은 하나 같이 기가 센 여장부들이었다.
일 분 정도가 지나자,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절룩거리던 하유라의 걸음걸이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은 것 같군. 그렇다고 허튼짓할 생각은 마라.”
“…흥.”
하유라도 바보는 아니다. 노구덕이 보여준 무력을 똑똑히 목도한 이상, 그의 감시망을 벗어나 뭔가를 따로 도모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을 터.
그녀가 새우처럼 웅크린 김정인의 코앞에 다다르자, 노구덕은 바짝 날을 세운 수도를 그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여기서 살짝만 경추를 건드리면 곧바로 기절이다. 제대로 응급처치를 한다면 내 손이 움직일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쓸데없는 낌새를 보인다면…….”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닥쳐라.”
노구덕의 입을 다물게 한 하유라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희미하고 따스한 기운이 새어 나와, 김정인의 엉망이 된 육신에 진눈깨비처럼 스며들었다.
신성력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끊어질 듯 가느다랗던 숨결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변했고, 여기저기 피었던 검붉은 피멍울이 옅은 선홍색으로 변했다. 재능으로 따지자면 Lv5의 신성력. 과연 만능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다.
10초 정도가 지나자, 하유라는 김정인의 몸에 대고 있던 손길을 거두었다.
“흠,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난 네놈을 믿을 수 없어. 이건 최소한의 보험이다.”
하유라의 치료는 김정인의 상태를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호전시켜놓았다. 말인즉, 생명이 위중하다는 것은 아직도 현재진형이란 소리다. 하유라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앞으로 한두 시간 정도였다.
“쓰레기,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은 네놈 차례다.”
“호오, 그러니까 내가 이 녀석을 돌보는 사이에 너는 도망치겠다, 이 말이로군?”
제법 머리를 굴렸다. 아슬아슬한 정도로만 살려놨으니 노구덕은 이제 김정인을 데리고 바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하유라로서는 도망칠 시간을 번 셈이다.
“억지로 더 치료하라고 해도 순순히 해줄 것 같지는 않고… 좋다. 약속은 지켜야지. 신뢰는 중요한 거니까. 난 여기 있을 테니, 가 봐라.”
“…….”
“뭐해? 어서 가지 않고. 내 마음이 바뀌길 기다리는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손쉽게 자유를 얻은 하유라는 도리어 찝찝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고양이처럼 뒷걸음질하던 하유라는 이내 입술을 꾸욱 깨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평소라면 두고 보자는 말 한마디나 싸늘한 욕설 정도는 내뱉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는 걸 보면 그저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하유라의 속내가 엿보였다.
“크크.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는.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어깨를 들썩이는 노구덕의 눈길이 조금 떨어진 지면에 머물렀다. 그곳엔 서리여왕의 애검, 아발란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애검까지 가져갈 생각을 못했던 걸 보면, 정말 마음이 급했던 모양.
터벅터벅 걸어간 노구덕은 떨어진 아발란체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검신이 웅웅거리는 울음을 토해내며 마구 붉은 빛을 뿌려댔다.
“워워. 가만히 있어라. 사납게 굴면 허리를 똑 분질러줄 테니까.”
-웅웅!
“이 자식이 그래도!”
깡!
철퇴 같은 주먹으로 강하게 한 대 후려치자, 마검은 금세 울음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하여튼 고장 난 물건은 때려야 말을 듣는 다니까. 이놈도 모진 주인년을 닮아서 성미 한 번 더럽군.”
한 대 얻어맞고 급격히 온순해진 아발란체를 아공간 주머니에 던져 넣은 노구덕은 돌연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열심히 도망쳐 보라지. 그나저나 조금 걱정이군. 그년을 너무 심하게 패버리면 애들 행방을 물어보기가 힘든데…. 그쪽도 기가 장난 아닌 여편네라.”
묘한 말을 남긴 노구덕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늘어진 김정인을 들쳐 메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스크롤의 상세 능력에 대해선 자세한 코멘트를 해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서서히 밝혀지는게 스토리 진행상 자연스럽거든요.
김정인의 한 팔이 날아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뭐, 독자님들도 짐작하셨다시피 가장 만만한 부위이기도 하고요. 이로 인해 김정인이 더 강해질지.. 약해질지는..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부연설명해 드리자면, 필요한 복선이었습니다.
플랑기스는 도망쳤습니다. 도망쳤을까요? 과연?
김정인이 완성한 필살기는 다수를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십존 네 명을 상대로 무리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김정인의 자기류는 강화형에 가까운지라, 일격필살의 형태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보면, 스크롤에 당한 상태에서도 실력을 발휘한게 필살기 자체라 볼 수 있겠네요.
이번에도 김정인의 행운이 작용했습니다. 김정인은 플랑기스가 트롤링(?)을 한덕에 치명상을 입지 않고 살아남았죠. 물론, 김정인이 플랑기스가 그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순전히 운이 좋았던 거죠.
여기서 불운이라고 한다면, 하유라가 그 스크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는 건데.. 그 스크롤을 사용한 사람이 다름아닌 노구덕이니. 행운과 행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여튼, 작가의 해설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코멘으로 물어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