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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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말로(末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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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제길! 제기랄!”
휙! 휙!
우거진 수림이 콧잔등을 때리며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바쁘게 내달리는 플랑기스의 행색은 진창에서 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었다. 나름대로 왕이랍시고 멋들어지게 차려입었던 갑주는 너덜너덜 누더기 꼴이 되어버렸고, 도망치면서 몇 번이나 넘어진 탓에 진흙과 풀떼기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몸뚱이는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두고 보자! 개 같은 연놈들! 으아아아아!”
쾅!
울화가 치민 플랑기스는 길을 가로막는 나무에 대고 주먹을 날렸다. 투기가 듬뿍 담긴 주먹은 두꺼운 고목을 부러뜨리고도 모자라, 그 뒤에 서 있는 나무들도 우수수 도미노처럼 날려버렸다.
애꿎은 나무에 화풀이를 한 플랑기스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이나 거칠게 씩씩거렸다.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썩은 악취가 풍기는 시궁창에 코를 박은 느낌이었다.
“검왕!”
플랑기스의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바라보던 검왕의 그 눈빛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길가의 돌멩이를 보듯 무심한 눈길.
천하의 플랑기스가, 투르의 왕 플랑기스가 병풍 취급을 당했다. 그건 플랑기스 스스로가 하잘 것 없는 삼류 헌터들을 무시했을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검왕은 전의를 잃은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저 한번 힐끔 시선을 주고 난 뒤, 곧바로 독왕과 라키오라 등 나머지 세 명에게로 향했다. 그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무언의 표명이었다.
무엇보다 열 받는 건, 그런 취급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자신이다. 항의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건져 다행이라고 안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은 검왕이 나머지 세 명을 요리하는 틈을 타 구차하게 도망치는 중이다.
심지어 스크롤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그런데 단순히 검왕의 눈빛 한 번에 전의를 잃어버리고 꼬리 만 개처럼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씨팔! 크으으으으으으!”
또 한 번 욕설이 튀어나온다. 아무리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당이라지만, 최소한의 자존심과 명예는 있었으니… 그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 염병할! 그런 괴물을 무슨 수로 이기냔 말이야!”
플랑기스는 신경질적으로 독백했다. 추악한 자기합리화를 해서라도 울렁거리는 속내를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빛살처럼 대기를 가로지른 우윳빛 검기가, 독왕의 육신을 두 쪽으로 절단하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망막에 맺혀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라키오라의 다리가 잘려나가고…….
그가 본 것은 여기까지였다. 검왕이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플랑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검왕이 조금 약해지지 않았나? 혹은, 힘을 잃지 않았으니 검왕과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김정인에게 지독하게 당한 플랑기스는 생존본능에 따라 주저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이후엔, 보다시피 이 꼴이다.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아버린 패배한 개. 사자를 거스르지 못하고 낑낑대는 하룻강아지.
“으으으… 끝장이다. 이젠 끝장이야.”
플랑기스는 사방으로 뻗친 곱슬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당장의 위험을 면피하고 나니, 후에 있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샘솟은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실패했으니, ‘그’가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스크롤 두 장도 잃어버렸고, 그중 한 장은 오히려 검왕의 목숨을 살리는 데 써버렸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자가 그런 사정을 헤아려 줄 리 없었다.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아니, 아냐… 투르로 복귀해서 저항한다면…? 큭! 될 리가 없잖아! 와아아악…!”
어느 쪽을 택해도 몰락은 기정사실이다. 차라리 살고자 한다면, 모든 걸 버리고 오지에 숨어드는 게 더 확률은 높았다. 아무리 주변에 많은 호위병을 배치한다 해도… 설령 투르의 전 병력을 끌어 모은다 해도 그 자에겐 별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그자라면 손쉽게 그 호위를 뚫고 들어와, 그의 목을 썩둑 베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투르에 대한 미련과 목숨.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던 플랑기스의 콧잔등이 찡긋거렸다.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했다.
“…북부로 가자. 그자도 북부까지는 손길이 닿지 않았을 테니……. 으헉!”
별안간 괴성을 내지른 플랑기스는 놀란 토끼처럼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금빛의 섬광이 내리꽂혔다.
간발의 차이로 기습을 피하긴 했으나, 위험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플랑기스의 사방은 어느새 밀려온 금빛 해일로 뒤덮여 있었다.
“뭐냐!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냐!”
사납게 으르렁거린 플랑기스는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누구 앞에선 꼬리말린 강아지 신세가 되었다지만 그래도 들개는 들개. 그 이빨은 아직 살아 있었다.
구름처럼 피어난 검기는 정체모를 금빛 해일을 금세 흐트러뜨렸다. 상대의 공격이 맥없이 흩어지는 광경을 본 플랑기스의 얼굴에 강한 자신감이 실렸다.
“흐, 마법이로군!”
의문의 습격자가 마법사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는 마법사를 상대로 불패의 전력을 자랑하는 전사가 아니던가.
“그쪽이냐!”
금빛 무리를 날려버린 플랑기스의 눈이 먹잇감을 쫓는 매처럼 번뜩였다. 뒤쪽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아름드리나무가 박살이 났다. 득의양양하게 부러진 밑동에 올라선 플랑기스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쓰러진 나무 근처에는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뭔가가 움직였……!’
갑자기 스산한 오한이 일면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플랑기스는 길게 잴 것 없이 앞쪽으로 뛰어나갔다. 어쩐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얼마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핑!
“크학!”
핏물이 흘러내리는 어깨를 감싸 쥔 플랑기스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뜬금없이 나타난 쐐기에 어깨를 관통당한 플랑기스는 굉장히 당혹스런 얼굴이었다. 주문을 쓰는 기색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웬 쐐기가 나타난단 말인가?
“…제길!”
플랑기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발을 놀렸다. 이번엔 우측. 그리고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광!
“크아악!”
안면이 숯검댕이가 된 플랑기스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잠시 주춤한 그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십 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약한 플랑기스는 다시금 의문의 폭발에 휘말린 채 아래로 추락했다.
전신이 벌겋게 익어버린 플랑기스는 코와 입으로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아주 심하게 다칠 정도의 폭발은 아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상대의 수를 예측하지 못한 플랑기스의 낯짝은 극심한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으, 으으으! 뭐, 뭐냐! 대체 뭐냐고!”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오공이 이러할까. 마법도 아니고, 주술도 아니다. 이건 말하자면 지뢰 찾기였다. 문제는, 그가 밟는 곳마다 지뢰가 펑펑 터져버린다는 것이다.
상대가 그가 어디로 향할지, 무슨 행동을 할지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도한 망상일까? 그러나 드러난 정황은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 귀신이 곡할 상황은 설명할 수가 없다.
“어떤 개새끼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같잖은 짓거리 하지 말란 말이다!”
격분한 플랑기스의 목소리가 숲 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반복된 메아리뿐이었다.
“좋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바득 이를 갈아붙인 플랑기스는 검을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이 일대를 모조리 초토화시킨다면,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적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터.
혹시 모를 검왕의 추적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리스크가 큰 행동이었지만, 그 외엔 달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기운을 검에 휘감은 플랑기스가 사방으로 검기를 난사하려는 찰나, 그와 마주보고 있는 정면의 공간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거대한 형상이 드높게 치솟았다.
“아, 아니…?”
검은 그림자로 뒤덮인 플랑기스의 낯짝은 바보처럼 얼이 빠져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 이 수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금의 광휘를 흩뿌리는 석조 첨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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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너무 길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인생에서 최악으로 남을 하루였다.
검왕을 처치하지 못했고, 벌레만도 못한 오크에게 다시없을 굴욕을 당했다. 발치의 개미만도 못한 존재에게 목숨을 구걸해서 도망치는 꼬락서니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하유라는 냉정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였지만, 자존심만 따지다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멍청이는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이고 영리한 여인이었다.
일단 살아날 기회를 잡은 하유라는 머뭇거리지 않고 도주했다. 노구덕은 그녀가 도망치기 바빠 아발란체를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조차도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노구덕이 아발란체에 신경을 쓰는 동안, 아주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단 몇 초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아발란체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일분일초를 아끼며 달려가던 하유라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
서리여왕 하유라는 자기도 모르게 왼쪽 눈을 매만졌다. 투명한 얼음으로 빚은 듯 아름다운 반대쪽과는 달리, 흉하게 짓무른 살갗이 우둘투둘한 질감을 자아낸다. 마녀 바이올렛이 남긴 저주의 흔적… 평소에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상처가 쑤시는 느낌이었다.
하유라는 이 증상을 알고 있다. 바로 대적(大敵)을 만났을 때다. 바이올렛과 싸울 때도, 김정인과 싸울 때도 그녀의 왼쪽 눈은 끊임없이 통증을 유발했었다.
“…플랑기스.”
비스듬한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형체. 전신이 피투성이로 물든 육신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그 아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얼핏 시체로 착각할 법한 꼬락서니였지만, 검게 피딱지가 진 콧속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피떡이 되어버린 사내. 하얗고 고른 이빨이 다 부러지고, 콧대가 움푹 함몰되어 안면 인상이 도저히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망가졌어도, 하유라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그 낯짝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도망친 스펠 브레이커 플랑기스… 그 인간이었다.
“반가운 얼굴이지요?”
“너는….”
하유라는 시선을 좀 더 위쪽으로 들었다. 플랑기스가 대롱대롱 매달린 가지 위에서, 한 여인이 사뿐히 아래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풍성한 금발을 허리어림까지 늘어뜨린 여인. 반쯤 감긴 눈을 한, 신비한 인상의 소유자. 그녀의 이름은…….
“…아가레스트? 용케… 살아남았어.”
“네. 어떻게 살아남았네요.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호호호.”
하얗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퐁당 빠져들 것처럼 매혹적이다. 그러나, 날름거리는 빨간 혀가 자아내는 목소리는 독을 잔뜩 품은 전갈처럼 강렬한 적의를 담고 있었다.
설마하니 안개여왕 아가레스트를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차갑게 굳어 있던 하유라의 표정이 별안간 허탈하게 풀어졌다.
“후, 후후후…….”
“왜 웃죠?”
“그냥, 웃음이 나오는군.”
벌레가 쉽사리 보내줄 때부터 무언가가 있다는 예감은 들었지만, 그 준비된 수가 너무 막강했다. 지금까지 발버둥치던 것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동시대 십존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만큼, 하유라는 아가레스트의 능력을 잘 알았다. 찰나의 미래를 내다보는 천리안과 주문의 위치를 순식간에 뒤바꾸는 텔레포트, 프레이야의 심장에서 샘솟는 무한의 마력으로 무장한 그녀는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다. 게다가 지금의 그녀는 예전보다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만전으로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인데, 하물며 아발란체도 잃어버린 지금으로선…….
“벌레의 졸개가 되다니. 왕가의 혈통이 창부가 다 됐군.”
“어머, 당신답지 않게 혓바닥이 기네요. 하유라. 애간장이 타는 건가요?”
“…흥. 네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거다.”
“바라던 바예요. 약간, 심하게 다룰 예정이거든요. 조금이나마 분풀이를 하고 싶어서.”
황금빛 광휘를 후광처럼 피워 올린 아가레스트는 예의 그 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어디, 마음껏 발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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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600화! 저도 몰랐는데 어느새 600화가 되었습니다!
코멘 보고 알았네요 ㅎㅎ;
서두 제외하면 601화가 진정한 600화지만요.
해서 600화 후기는 다음편에 올릴까해요. 이런 날이니만큼, 역시 연참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다음 화는 언제나처럼 12시 전후에.. 하지만 제가 바쁜 금요일이라 조금 늦춰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때 후기를 올리면서, 독자님들과 소소한 기쁨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