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03)
0603 / 0777 ———————————————-
158# 끝나지 않은 것
++++++++++++++++++++++++++++++
칸다무어 밤세계를 주름잡는 월광(月光)의 안가는 동부 지구 곳곳에 개미굴처럼 퍼져 있다. 어지간한 중도시 이상에는 반드시 월광의 비밀지부가 있으며, 그건 리베르타의 심장인 라스바덴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두 시간의 유예를 가진 노구덕이 향한 곳은 라스바덴의 월광지부.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시가지를 벗어나, 으슥한 뒷골목으로 숨어든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도시 외곽의 어느 허름한 건물 앞이었다.
건물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주변에 늘어선 여러 채의 민가는 모두 빈집이었다. 아마도 전쟁의 여파를 피해 일가족이 모두 피난을 떠난 것 같았다.
낡은 나무 문 옆에는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어스레한 저녁 빛을 담요 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편해질 정도로 한가해 보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노구덕이 저벅, 한 걸음을 내딛자, 노곤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슬며시 말려 올라간다. 이내, 느릿하게 깜박이던 짓무른 눈가가 번쩍 위아래로 치떠졌다.
벌떡 일어선 노인은 그를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총수를 뵙습니다! 안으로 안내를….”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내 직접 가지. 별 일은 없겠지?”
“예? 아, 예!”
“계속 수고하게.”
격려삼아 노인의 깡마른 어깨를 두드려준 노구덕은 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래봬도 저 노인, 한때는 빅리그에서 활약하던 마법사다. 그는 라스바덴의 중요성을 인지한 패터슨이 배치해 둔 고급인력이었다.
‘그놈, 무사해야 할 텐데…….’
패터슨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입맛이 쌉싸름해졌다. 아직도 낭보가 없는 걸 보면, 데모나 일행도 패터슨의 행방을 쫓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쪽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소리다.
회칠을 한 것처럼 낯빛을 굳힌 노구덕은 비밀 안가의 심처로 접어들었다. 와인 창고로 보이는 지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척 보기에도 두꺼워 보이는 쇠문이 나타났다.
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두꺼운 쇠문을 열어젖히자 철컹거리며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그렇게 두세 번 더 같은 쇠문을 통과하고 나니, 어스름한 등잔불에 의지하고 있는 작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리 넓지 않은 공동의 중앙에는 빛을 일렁이고 있는 작은 램프와 간이 테이블,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
“아가레스트.”
“어서 오세요.”
의자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아가레스트는 가벼운 몸짓으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산뜻한 금발과 어울리는 청초한 미소가 인상적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 미소에 별다른 정감은 어려 있지 않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별로…. 지독한 독종들이더군요.”
아가레스트는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아쉽다거나 초조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가학적인 만족감을 띠고 있는 그 얼굴엔 작은 즐거움마저 엿보였다.
하긴, 그들에게 묵은 빚이 있는 그녀로선 그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을 터다.
“쯧.”
노구덕의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말은 저렇게 해도, 오라클의 총수였던 그녀가 허투루 일을 처리했을 리 없다. 그녀는 고문과 심문의 명수. 할 수 있는 선에서 온갖 고문이란 고문은 다 해봤으리라.
그런데도 입을 열지 못했다는 것은, 상대의 뚝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십존은 십존이란 건가.”
무심한 빛을 띤 눈길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철창을 훑었다.
원형 돔의 둘레엔 짐승우리 같은 철창이 열 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세 개의 철창엔, 형편없는 몰골을 한 남녀가 따로따로 갇혀 있었다.
상거지 꼴을 한 그들은 노구덕과 아가레스트가 사로잡은 십존들…. 플랑기스와 라키오라, 그리고 하유라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지낼만한가?
“…….”
넝마가 되어버린 라키오라와 플랑기스는 대답할 힘도 없는 듯, 완전히 퍼져 미동조차 없었다. 특히 두 다리가 잘려버린 라키오라는 썩어빠진 동태인 양 두 눈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힘없이 널브러진 것은 아니었다.
“이 쓰레기…!”
철커덩! 몸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요란한 신음을 토해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하유라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철창 바닥이 흘러내린 핏물로 늪을 이루고 있는데도, 하유라의 부릅뜬 두 눈은 여전한 독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톱과 발톱이 다 빠져 시뻘건 맨살을 드러낸 데다, 우윳빛의 허벅지엔 생선 아가미 같은 자상이 여러 개 새겨졌다. 심지어 그 볼에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창녀’라는 글귀가 써져 있었다.
볼 것도 없는 아가레스트의 장난질이다. 하유라의 상태는 그 외에도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누가 그녀의 이런 꼴을 보고 그 위풍당당한 서리여왕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빨까지 싹 뽑아놓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발음이 뭉개질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호호호.”
아가레스트의 킥킥거리는 비웃음을 들은 하유라는 사납게 치뜬 외눈에서 서슬 퍼런 광망을 내뿜었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살기. 마력이 봉쇄된 상태에서도 이 정도라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노구덕은 짐승처럼 갇혀 있는 하유라 앞에 쪼그려 앉았다. 철창 사이로 부들부들 입매를 떨고 있는 설녀의 얼굴이 보인다. 예전의 오만방자함은 온데간데없고, 온갖 굴욕과 오욕으로 어그러진 낯짝이다.
문득 처음 퀸즈가든에서 그녀를 봤을 때가 떠오르면서, 새삼 감회가 새로워졌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비열한 벌레 놈…. 생긴 대로 천박하게 노는구나.”
“왕도는 너희 왕들이나 지키는 거다. 네 말대로, 난 벌레거든. 이게 내 방식이지. 잡소리는 이쯤 해두고…….”
인신공격을 하는 하유라를 한껏 비웃어준 노구덕은 스산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들은 어디 있지? 말해라.”
“퉷!”
대답대신 날아온 건, 검붉은 피가 뒤섞인 침이었다. 걸쭉한 핏물이 얼굴을 덮기 전에 옆으로 쳐낸 노구덕은 슬며시 미간을 모았다.
끼이이익!
촘촘하게 세워져 있던 쇠창살이 좌우로 벌려지며 죽는 소리를 냈다. 그 틈을 비집고 팔을 뻗은 노구덕은 주저앉아 있는 하유라의 목줄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컥!”
“개 같은 년. 같잖은 자존심 부리다간 나락에 처박힌다는 걸 명심해라. 이곳이 끝이라고 생각하나? 원한다면 지옥보다 더한 막장에 처박아줄 수도 있다. 암퇘지만도 못한 꼴로 만들어줄까? 왕년의 서리여왕이 평생 부랑자들의 좆집이 되어 살아간다면, 참 볼만하겠군. 아주 가관이겠어.”
“끄윽!”
살모사처럼 번들거리던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노구덕은 창백한 푸른빛으로 변한 하유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브리트라를 동원한 정신지배나, 약물을 혼용하는 방법을 써 볼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네년 말고도 답할 사람은 많아. 저기 라키오라도 있고… 살타에서 붙잡은 포로들도 있지. 그러니까…….”
“하, 하핫….”
노구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목을 붙잡힌 하유라가 뜬금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숨통이 바짝 조여진 탓에 답답한 비음이 섞였지만, 노구덕의 눈에 비친 그녀는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웃어?”
“듣고 싶어?”
“뭐?”
“그 쓰레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렇게 알고 싶냐는 말이다.”
노구덕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풀었다. 호흡이 자유로워진 하유라는 깔깔 비웃으며 말했다.
“거울의 숲에서 내 진영을 염탐하던 쥐새끼들. 인원은 열 명 남짓. 대장은 젊은 사내놈이었고, 그나마 전력으로 치부할 만한 건 네크로맨서와 레인저 계집 둘. 네가 알고 싶은 건, 놈들의 행방이겠지?”
인원 구성 및 특징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역시 하유라는 패터슨 일행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계속 말해봐라.”
하유라의 외눈이 더욱더 악독하게 일그러졌다.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놈들은 모두 죽였다. 사지를 갈가리 찢어 개밥으로 던져주었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 세 연놈들은 따로따로 토굴에 가두었다.”
토굴. 거울의 숲에서 보았던 바로 그 토굴이다.
“그리고 사내놈을 고문했다. 벌레 주제에, 제법 뼈대가 있는 놈이었어. 이런저런 질문을 했지만,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았지. 그러면, 내가 어떻게 그놈의 입을 열었을까?”
“…….”
노구덕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것을 본 하유라는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따로 가두었던 계집을 불러왔다. 네크로맨서 계집이었지. 알고 보니 처제와 형부 사이더군? 그래서 일이 쉬웠어.”
“…일이라.”
“그놈의 눈앞에서 그 계집을 돌렸다. 굶주린 사내놈들을 딱 백 명… 줄지어 세워 놓고 맘껏 즐기도록 했어. 구멍이란 구멍에 남근을 쑤셔 박았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 목구멍도 틀어막았지. 병사들을 동원해서, 하루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그 계집을 윤간했다.”
“…….”
노구덕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무섭게 굳어진 그 눈빛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하유라는 멈추지 않고 뱀 같은 혀를 놀려댔다.
“그놈은 그래도 입을 열지 않았어. 독종이었거든. 뭐, 상관은 없었다. 다음 여흥거리가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 다음은 레인저 계집이었다. 아마, 그놈의 약혼자였지? 아주 볼만했어. 처음엔 어떻게든 신음을 꾹꾹 눌러 참다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돌려대니 나중엔 정신이 나가서 멋대로 허리를 놀려대더군. 그래서…… 커흑! 커그극…!”
한순간에 낯빛이 울긋불긋하게 변한 하유라는, 무지막지하게 목을 조여오는 굵은 팔뚝을 다 빠진 손톱으로 긁어대며 몸서리쳤다.
노구덕은 그런 그녀의 목을 통째로 붙잡은 채 들어올려, 우리 뒤쪽의 창살에 강하게 내동댕이쳐버렸다.
쾅!
“칵! 허으으… 쿨럭! 쿨룩…!”
단단한 쇠창살이 휘어질 정도의 충격. 그 아래로 나가떨어진 하유라는 심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렸다. 꼴을 봐선 갈빗대 한두 개가 나간 것 같았다.
두 눈이 불그스름하게 변한 노구덕은 창살 안쪽으로 들어가, 맨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하유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머, 그러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저야 별 상관은 없지만.”
“…….”
용암 같은 분노를 표출하던 눈빛에 희미하게나마 초점이 돌아왔다. 만약 어깨 너머로 들려온 아가레스트의 말이 아니었다면, 노구덕은 정말로 이 자리에서 그녀를 죽였을지도 몰랐다.
“…하유라.”
고통이 심한 것일까? 하유라는 노구덕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고, 계속 피를 토하며 기침을 해댔다. 부러진 갈빗대가 폐라도 찌른 모양이었다.
“네년의 처리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만약, 정말로…….”
노구덕은 잠시 말을 끊었다. 들불처럼 치솟은 내면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함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유라의 저 작은 머리통을 산산이 으깨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뇌수조차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서, 다시는 저 밉살맞은 혓바닥을 놀리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찰나의 충동으로 죽여버리기엔, 하유라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 저 독기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차차 시간을 두고 의지를 꺾어버리면 된다.
‘죽일 년…….’
내심 그렇게 위안을 하며 살심을 억제했지만, 좀처럼 분노가 가라앉질 않았다. 패터슨과 레이나, 마리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스쳐지나갔다.
“…그 아이들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면, 말했던 대로 지옥의 저변까지 떨어뜨려주마.”
살벌한 어조로 말한 노구덕은 그대로 몸을 돌려 철창 밖으로 나왔다. 의자에 앉은 아가레스트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계속 심문해라. 뭔가 알아내는 게 있거든 바로 연락 주고.”
“그러죠. 서리여왕은 저대로 둘까요?”
“한동안은. 목숨만 붙여놔.”
“분부대로 하지요.”
노구덕은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하유라의 몸뚱이를 한 차례 노려본 뒤, 살기등등한 기세 그대로 안가를 빠져나갔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원래 오늘 쉬려고 했는데.. 그래도 어쩌다보니 글에 손이 가서 한 편 끄적거리게 됐네요. 앞으로 두세편 뒤면 이번 파트도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내일은 가급적이면 연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