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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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끝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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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광풍이 불어닥친 듯 쑥대밭이 되어 있는 땅. 본래는 반군의 주둔지로 이용되었을 이곳 평야는 사방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멀쩡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쓰러져 무너진 군막들과 사방으로 흩어진 보급 물품은 반란군의 철퇴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하기야 당시 전황을 떠올려보면 그럴 만도 했다. 옛 행적 때문에 반군이란 간판을 달고 있을 뿐이지, 실상 그들은 서리여왕 하유라와 폭풍왕 라키오라의 열정적인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서리여왕과 라키오라, 두 수장의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애초에 그 수많은 역경을 거듭하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확고한 충성심을 말해주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을 이끌었던 두 수장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각 진영의 2인자, 3인자들이 열심히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쟁을 주도했으나, 그들로서는 두 십존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진영을 떠난 서리여왕과 폭풍왕은 전쟁이 종반에 이르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정타는 이레시온에서 온 원군의 등장이었다. 전대 십존, 비스트마스터(Beast master)가 이끄는 원군의 출현은 살타에서 농성중인 리베르타 군의 사기를 크게 올림과 동시에, 밖에서 맹공을 퍼붓던 반군의 전의를 단번에 꺾어놓았다.
자리를 비운 수뇌, 불리해져만 가는 전황.
그리고… 리베르타에서 날아든 비보.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은 반군 지휘관들은 고심 끝에 철퇴를 결심했다. 어떻게든 주인들이 복귀할 때까지 버텨보려고 했으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져 있었다.
그러나 후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군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기 무섭게, 안에서 수성에 치중하던 연합군이 도시 밖을 빠져 나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것이다.
전위가 시간을 끄는 동안, 후방에서 주둔지 막사를 철거하며 철군 준비를 하던 반군지휘부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도처럼 밀려오는 연합군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반군은 주둔지 철거는커녕, 대부분의 보급물자조차 챙기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반나절에 걸친 살타 전투가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데모나 일행이 폐허가 되어버린 살타 평야에 발을 디딘 건, 열띤 전투가 끝난 바로 직후였다.
사실 살타에 도착한 건 한참 전이었지만, 주둔지를 수색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공성전에 집중하는 동안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던 반군 주둔지에 예상외로 병력이 한가득이었던 탓이다. 그들은 철군 준비를 하는 병력들이었다.
이것은 일행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어찌 보면 이건, 노구덕이 어부지리를 취한 일의 여파가 가져온 연쇄작용이기도 했다. 예정대로 김정인을 처리한 하유라와 라키오라가 살타 공방전에 합류했다면 반군이 이르게 철수 준비를 할 까닭도 없었을 테니까.
반대로, 노구덕이 어부지리를 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데모나 일행의 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되었으리란 법은 없다. 최악의 경우 부대로 복귀한 하유라와 라키오라가 본군 주둔지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으니.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 평야가 내다보이는 언덕에 숨어든 데모나 일행은 조용히 전투가 끝나길 기다렸다.
혼란에 빠진 반군이 허겁지겁 후퇴를 하고, 그 꼬리를 문 연합군이 주둔지를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야 간신히 기회를 잡은 것이다.
기회라고 해봐야, 수색이 의미가 있을까 싶은 폐허가 전부였지만.
“…제 쪽은 허탕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시체들 밖에는.”
“서쪽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 특히 임가희의 얼굴색이 좋지 않다. 아마도 사방에 참혹한 꼴로 널브러진 시체들 때문이리라. 한소리를 들을까봐 필사적으로 메스꺼운 속을 억누르는 게 얼굴에 선히 보일 정도였다.
시무룩하게 머리를 떨군 임가희와 힘없는 한승우의 보고를 접한 데모나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수님, 냄새가 너무 많이 뒤섞여서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체취로 찾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줄곧 패터슨의 체취를 쫓던 이두식의 말이다. 그 뒤로 창대를 맥없이 빙빙 돌리는 박지현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너무 늦었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여기서 단서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해.”
“그래도… 잘 찾아보면 무슨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축 처진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애써 긍정적인 말을 입에 담는 안세희의 표정에도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정말로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잔인한 말이지만, 패터슨 일행이 무사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상식적으로 보급물자까지 다 내버리고 후퇴하는 마당에 거치적거리는 포로들을 챙겼을 리 만무하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거나, 버려두고 떠나는 게 보통이다. 그마저도 이 주둔지에 그들이 있었다고 가정했을 때의 얘기지만.
“…반군이 포로들을 직접 처리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반군지휘부가 직접 그들을 데려갔을 수도 있습니다.”
데모나는 물끄러미 소냐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포로들을 아직까지 살려뒀다면, 그건 서리여왕이나 폭풍왕이 직접 지시를 내렸기 때문일 테니까요. 반군에게 있어 두 사람의 명령은 절대적. 설사 모든 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포로들을 살렸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에 한해서야. 명령에도 우선순위가 있어. 지금은 긴급상황이잖아? 본대가 전멸위기에 빠졌는데 그깟 포로를 챙길 정신이 남아있을까?”
“그건…….”
그때였다.
“으, 으으…….”
데모나와 소냐,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지켜보던 일행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약한 신음성에 쫑긋 귀를 곤두세웠다.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가느다란 신음은 저편의 시체더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부근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데미안은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기는 시체더미 속을 살피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생존자… 여기 사람이 살아있어요!”
흩어져 있던 일행은 서둘러 데미안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생존자는 옆으로 쓰러진 막사 기둥에 깔려 있었다. 머리를 포함한 상체 일부분만 간신히 빠져나와 있는 생존자는 한눈에도 생명이 위태로워 보였다. 무거운 막사 기둥에 깔린 것도 그렇지만, 폐 부근을 관통한 부상이 치명적이었다.
허름하고 해진 복장을 봐서는 반군 소속인 것 같았다. 최초로 그를 발견한 데미안이 서둘러 치유 주문을 외웠지만, 사내의 숨결은 점점 미약해져만 갔다. 그의 부상은 단순한 치유 주문으로 호전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안세희!”
“네!”
생존자와 데미안 사이에 끼어든 안세희의 손에서 뚜렷한 선홍색 빛줄기가 뿜어졌다. 손끝을 세게 깨물어 피를 낸 안세희는 긴 주문을 읊조리며 구멍이 뚫린 생존자의 흉부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가망이 없어 보이던 사내의 낯빛이 점차 편안해졌다. 불규칙하던 호흡이 점차 일정한 주기를 되찾고, 꾹 채운 자물쇠처럼 감겨 있던 눈꺼풀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그 놀라운 변화를 목도한 데미안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생(Revive) 주문….”
최고 수준의 치유 주문은 거의 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 레벨의 치유 주문은 단순히 회복 차원을 넘어 기적에 가까운 효과를 보이기 때문에, 따로 ‘소생 주문’이란 명목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동류(同流)이기에 실감할 수 있는 격차다. 얼핏 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안세희가 방금 보인 수준은 데미안이 따라가기에 아직 아득히 먼 레벨이었다.
“거기까지. 그만하면 됐어.”
“네? 하지만… 조, 조금만 더 하면….”
“나와.”
사제로서의 본분을 다하던 안세희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안세희를 강압적으로 밀어내고, 그녀가 겨우 숨을 돌려놓은 사내의 앞에 선 데모나는 신음하는 사내의 볼을 툭툭 건드려서 정신을 일깨웠다.
“일어나.”
“으, 으…. 누, 누구지…?”
“네 숨을 붙여준 사람.”
사실 숨을 붙여주려다 만 사람이었지만,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겨우 되돌아온 사내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데모나는 사내가 힘겹게 눈을 뜨자마자 사정없이 채근했다.
“넌 반군 소속이겠지? 하유라냐, 라키오라냐?”
“가, 감히 그분들의 존함을 함부로…….”
“다 죽어가는 주제에 말은 잘하네.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뭐….”
“조금 있으면 추격에 나선 연합군이 복귀할 거야. 자연히 다시 이곳을 지나면서 확인사살을 하겠지.”
“…….”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잠자코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아니면, 그대로 창대에 목이 꿰이던가.”
사내는 침묵했다. 말 몇 마디로 사내의 기선을 제압한 데모나는 곧바로 심문을 개시했다.
“다시 묻겠어. 넌 어디 소속이지?”
“…서리여왕님을 모시고 있다.”
“서리여왕? 좋아. 너희들, 최근에 거울의 숲에서 다수의 포로들을 잡았을 거야. 열 명 남짓 정도. 그렇지?”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던 사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주둔지를 염탐하던 자들… 서리여왕께서 직접 놈들을 잡아두셨지. 중요한 포로니 직접 심문하겠다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놈들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토굴을 파야했어. 그중 우두머리 사내놈은 가장 큰 토굴에 가두었던 것 같다.”
뒤쪽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실마리를 잡은 데모나는 여세를 몰아 질문을 계속했다.
“그 포로들의 행방을 알고 있어? 이곳까지 데려왔냐는 말이야.”
“그래. 중요한 포로니…. 부대가 달라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끌려왔을 거다. 내가 알기로, 숲의 주둔지엔 아무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 중요한 포로를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곳에 남겨뒀을 리 없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데모나 일행이 갔을 때에도 거울의 숲 주둔지는 말끔히 비워져 있었으니까. 요컨대, 이들은 이번 살타 전투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끝내 그 도박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사내의 느릿느릿한 말투가 거슬린 것인지, 데모나는 작게 인상을 쓰며 그를 다그쳤다.
“쓸데없는 소린 됐어. 내가 궁금한 건 그들의 행방이야.”
“그건…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들이 이곳 진영에 있었다는 것뿐…….”
“…그들의 상태는 어땠지?”
“말했잖나. 나는 모른다고. 부대가 달라서…….”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패터슨 일행이 이곳까지 끌려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더 이상 그에게 알아낼 게 없다는 걸 확인한 데모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겠네. 지금 반군을 쫓을 수도 없으니… 추격대가 귀환하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운이 좋으면 추격대가 그 녀석들을 구출했을지도 모르고.”
현재로서 기댈 건 그것뿐이었다. 윤희지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이니, 어쩌면 데모나의 말대로 리베르타의 추격대가 잡혀 있는 패터슨 일행을 구출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행은 모두 데모나의 방침에 동의했다.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한다는 건 상당히 찝찝했지만, 달리 수가 없었다.
“…저기,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치유가 도중에 중단된 사내는 다시 급박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데모나는 안세희의 조심스런 질문에 뭐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눈총을 주었다.
“할 도리는 다 했어. 뭘 더 하고 싶어?”
“네, 네?”
“원한다면 네가 책임지든지. 기둥서방으로 삼아도 말리지는 않을게.”
“…….”
말문이 막혀버린 안세희는 주변 이들을 돌아보며 도움의 눈길을 청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겸연쩍은 외면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데모나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럴 시간 없어. 조금 있으면 출정나간 군대가 복귀할 거야. 그 전에 도시 수뇌부에 언질을 주는 편이 좋아.”
“…네.”
반론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단호한 결정. 어깨를 늘어뜨린 안세희를 포함한 일행 전부는 군말 없이 데모나의 뜻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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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전후로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