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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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광기(狂氣)
162# 광기(狂氣)
쨍그랑.
손에서 흘러내린 머그잔이 그대로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어머…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던 소냐는 주섬주섬 깨진 조각들을 쓸어 모았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내가 치울 테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마력을 쓰면 됩니다.”
임유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각을 쓸어 담는 소냐. 그 묵묵한 손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갑작스럽게 엄습한 오한. 섬찟하게 등골을 타고 오르는 그 한기에 놀라 잔을 놓치고 말았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든 그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니?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 아닙니다.”
쪼그려 앉은 채 상념에 잠겨 있던 소냐는 임유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말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습.
“이건 내버려두고 방에 들어가서 쉬렴. 지금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괜찮…….”
“어서.”
나긋하던 임유진의 어조가 사뭇 엄해졌다. 이렇게 밀고 들어올 때의 그녀는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고집을 부려봤자 무소용이라는 것을 안 소냐의 양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나중에 확인할 테니까, 제대로 방으로 가야한다? 알았지?”
“…예.”
모기만한 소리로 답한 소냐는 처진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방을 나섰다. 그 뒤를 임유진의 염려 섞인 눈길이 쫓았다.
“휴우….”
억지로 소냐를 내보낸 임유진은 근심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노구덕 일행이 칼립스로 복귀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행이 전한 죽음은 임유진에게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패터슨과 마리안, 레이나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돌봤던 아이들이다. 패터슨과 마리안이 미래를 약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자기 일처럼 흐뭇하기도 했었다. 그 조그맣던 아이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꾸린다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 만큼…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노구덕에게 몇 번이고 사실을 확인했던 그녀였다.
슬픔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그녀는 어느 정도 처음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냐는 아니다. 그녀를 비롯해 원정에 동행했던 임가희, 한승우, 데미안은 아직도 죽은 이들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처음 경험한 친지의 죽음. 이른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발을 걸치고 살다 보면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통과의례였다. 지금 당장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테지만,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터다. 다만, 그 후유증이 언제까지 가느냐가 문제일 뿐.
“잘 극복해야 할 텐데……. 아이들도, 그이도….”
임유진의 걱정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구덕.
남편의 상태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예전에도 그런 낌새가 있긴 했었지만, 동부에서 다녀온 이후로는 더욱 심해진 느낌이다.
확실히 말해서, 성격 자체가 난폭해졌다.
특히 얼마 전 멜릭 부부에게 다녀온 뒤로는, 그녀조차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살벌한 기운을 풀풀 날려대고 있었다.
임유진은 엊그제, 노구덕과 함게 멜릭을 찾았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비보를 전한 노구덕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패터슨의 죽음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며, 바닥에 엎드려서 사죄했다.
그런 그를 앞에 둔 멜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느끼는 아내를 감싸 안은 채, 먹먹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일어나게. 자네를 탓하진 않아. 죄가 있다면, 동부로 가겠다는 그 녀석을 잡지 못한 내 잘못이겠지….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게 아쉽군…….’
울적하게 가라앉은 멜릭의 말이었다. 이후 마리안과 레이나 등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들은 그는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며 노구덕과 임유진을 돌려보냈다.
욕설을 들은 것도 아니고, 원망을 들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멜릭 부부에 대한 죄책감은 노구덕의 마음 한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 되었다. 적어도 임유진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실렌이 죽었을 때의 그 모습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때와는 또 뭔가가 달랐다. 콕 집어서 설명하진 못하겠지만, 노구덕이란 인간의 알맹이 자체가 점점 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요즘 그는 아이들에게도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나흘 전이었나? 굳어진 그의 얼굴을 마주대한 쌍둥이가 크게 울음을 터뜨린 직후였다.
“…얘기를 해야겠어.”
이대로는 안 된다. 확실히 지금의 노구덕은 이상했다. 가끔씩 드러나는 그의 폭력성은 단순히 세 사람의 죽음에서 기인했다고 보기엔 지나친 면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그가 자발적으로 털어놔주기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결정을 내린 임유진은 즉시 하던 일을 접어두고, 노구덕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이는… 아마 거기 있을 거야.’
임유진이 예상한 곳은 지하 연무장이었다. 최근에는 연무장 본연의 용도보다는 부분부분 창고로써 이용되고 있는 그곳.
최근 노구덕은 업무를 볼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연무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식사조차 지하에서 해결할 때가 많았다.
그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 최측근과 가족들을 제외하면 그 지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그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삼 인의 신분을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다.
서리여왕 하유라와 폭풍왕 라키오라, 스펠 브레이커 플랑기스.
동부로 훌쩍 떠났던 노구덕이 초주검이 되어 있는 그들 세 명의 신병을 비밀리에 인도했을 때에는 어찌나 놀랐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기분이었다.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 임유진은 그 뒤로 몇 군데의 복도를 지나, 금세 지하연무장으로 통하는 입구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뜻밖의 인물과 대면했다.
“승찬 씨?”
“오셨습니까.”
임유진에게 목례를 한 엘프 사내는 에테르 윙, 박승찬이었다. 그는 마치 굳게 닫힌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럼 서 있었다.
“승찬 씨가 여긴 어쩐 일로…….”
“보시는 대로 문 앞을 지키는 중입니다.”
“네? 문을 지키다니….”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임유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렇잖아도 최근 노구덕의 불안한 행보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그녀다. 그런 만큼 박승찬의 말을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중요한 의식입니다.”
“안에 누가 있죠?”
“의장님과 데모나 님, 세희가 들어가 있습니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데모나와 안세희, 노구덕. 세 명이 모여서 무얼 하고 있다는 것일까.
“저도… 들어갈 수 없나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의식은 제게도… 중요한 의식이라서. 오 년이 넘게 기다려온 일입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불안감이 더욱 가중된다. 무엇보다 안에 있다는 이들의 면면들이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는 명단이었다.
노구덕과 데모나는 말할 것도 없고, 안세희도 평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임유진은 안세희의 이중생활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하고 상냥한 ‘진홍의 성녀’지만, 실상 그녀는 한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안세희의 개인 노예나 다름없는 그 사내의 이름은 이태양. 오래 전, 서부연합군에서 안세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던 원흉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일종의 분풀이용 샌드백이라고 할까. 타인에게 항시 친절한 안세희였지만, 유독 이태양에게만큼은 독 오른 고양이처럼 쌀쌀맞게 굴었다. 그와 그녀 사이의 구원을 생각하더라도, 다소 지나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안세희가 가식을 떠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격이 극단적으로 갈라졌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상냥함도 진심이었고, 이태양을 향한 표독스런 증오도 진심이었다. 몇 차례 임유진이 나서서 교정을 시도해봤지만, 안세희의 기행은 그 정도로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을진대, 어떻게 안심을 할 수 있겠는가.
박승찬의 면전에서 서성거리던 임유진은 잠자코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박승찬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데 억지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입구를 막아선 박승찬의 태도가 변한 건 그로부터 약 삼십 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끝난 것 같군요.”
달칵.
박승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하연무장의 입구가 개방되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나타난 인영은, 임유진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데모나?”
“임유진?”
철문 뒤, 어두컴컴한 통로 속에서 나타난 이는 데모나였다. 그녀는 평상시와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임유진은 뒤늦게 나타난 데모나에게서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피 냄새?’
임유진은 그것이 사람의 피 냄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사람의 피 냄새라니. 그것도 대량의 출혈에서나 일어날 법한 농후한 냄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데모나와 박승찬, 두 사람은 의구심으로 가득한 임유진의 속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대화를 나누었다.
“의식은… 제대로 마무리 되었습니까?”
“그래. 원흉을 제거했으니, 더는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을 거야. 미련도 없을 테고.”
“저로서는 그분께서 이대로 성불하셨으면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요. 원한을 푼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흥. 이걸로 네가 내건 조건은 다 충족된 거야.”
“물론입니다.”
으스대듯이 말하는 데모나와 꾸벅 고개를 숙이는 박승찬. 그 대화만 들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진 임유진은 박승찬과 이야기하는 데모나의 소매를 붙들었다.
“데모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의식이라는 게 뭔데?”
“별 거 아냐. 그냥… 구원(舊怨)을 없앴을 뿐이지.”
“구원?”
“궁금하면 안에 들어가서 직접 보든지. 귀찮으니까 일일이 물어보지 마.”
그간 쌓인 피로가 상당했는지, 데모나의 얼굴엔 평소보다 더욱 짙은 다크서클이 끼어 있었다. 임유진의 물음에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그녀는 이내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의아해하는 임유진의 궁금중을 풀어준 건, 입구에서 비스듬히 물러난 박승찬이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클라리스 님의 원수를 갚은 것뿐입니다.”
“클라리스 님? 아, 데모나가 만든 그…….”
신궁 클라리스. 반군이 거병했을 때 죽임을 당해, 데모나의 손에서 언데드로 부활한 전대 십존의 이름이다. 데모나가 가진 비전의 수법을 동원해 ‘유령여왕’으로 부활한 그녀는 최근까지도 신궁이란 명성에 걸맞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생전의 기억의 혼재. 쉽게 말하면, 그녀는 아직까지도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 복수가 이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이것으로 클라리스 님께서도 안식에 드실 수 있겠지요.”
“복수라면… 설마.”
클라리스가 사망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임유진이 미약한 탄성을 내지르자, 박승찬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책무를 떨쳐낸 그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 방금, 폭풍왕 라키오라의 목숨을 취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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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 겨우 분량 채워서 올립니다…
눈이 마구마구 감기네요.. 업로드하고 누우면 바로 잠들 것 같습니다.. 다음화에는 하유라가 상당히 험하게 다뤄질 것 같네요. 내일도 연참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