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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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광기(狂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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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이 지하의 일을 수습한 다음 날.
모처럼 칼립스의 네 안주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임유진을 필두로 좌우에 신소율과 소피아가 자리했고, 그 반대편에는 좀처럼 이런 자리에 얼굴을 디밀지 않는 데모나까지 앉아 있었다.
각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앞에 둔 여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심각했다.
평소에도 종종 이렇게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다지는 그녀들이었지만, 오늘의 티타임은 단순한 수다모임이 아니었다. 평소 티타임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데모나가 끼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뜨거운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켠 임유진의 눈썹이 작게 요동친다. 깊이 우려낸 찻물의 씁쓰레한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심중에 큰 고민을 안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소율아, 그이는?”
“아직 방에 있어요. 오늘은 나올 생각 없어 보이던데…. 으, 쓰라려…….”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하는 신소율의 자세가 어쩐지 이상하다. 단정치 못하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사슴처럼 늘씬한 두 다리를 방정맞게 쩍 벌린 채였다. 한 손으로 사타구니 근방을 꾹꾹 누르며 연신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이 꼭 똥 마려운 강아지 같다.
여느 때 같았으면 조신하지 못하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을 임유진이 조용한 것도 이상하다. 데모나야 그렇다 쳐도 소피아까지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곡절이 있기는 한 모양.
사실 여기엔 남에게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 네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이기도 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실은 여기 오기 전에 세희한테 잠깐 들르려고 했는데, 좀 남사스럽기도 해서….”
방금 전까지 노구덕을 상대했던 신소율은 욱신거리는 하복부를 어루만지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렇잖아도 할 때마다 힘든 편인데, 아주 작정하고 들어오니까 아래에서 피가 나더라고요. 거의 처녀 딱지 뗐을 때만큼 아팠던 것 같아요. 아우으…….”
“…강간이었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소피아의 말이었다. 신소율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간? 음… 하긴, 처음엔 강간 플레이인 줄 알았으니까. 표현이 좀 그렇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네. 저요, 아프다고 울며불며 애원을 했는데도 사정을 봐주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애들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붙잡혀 있었을 걸요. 그러고 보니, 소피아 언니가 전번 타자였지? 그런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좀 해주지. 나 완전 당황했잖아.”
“…으응. 미안해….”
눈처럼 하얀 피부가 파랗게 보일 정도로 그늘이 져 있다. 양 귀를 늘어뜨린 채 풀이 죽어 있는 소피아를 힐끔 쳐다본 신소율은 열없이 볼을 긁적였다.
“아니… 꼭 나무라는 건 아니고… 에이씨, 그 아저씨 대체 왜 그런대요?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갑자기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거야? 질풍노도의 시기?”
결국, 기승전 노구덕 탓을 하며 화두를 돌리는 신소율이다. 그러나 답답하게 가라앉은 좌중의 분위기는 그녀의 가벼운 농담을 받아줄 정도로 너그럽지 못했다.
임유진은 신소율에 이어 소피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트러블이 있었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에 이르기까지. 소피아와 신소율이 번갈아 희생양이 되었다.
그와 보다 수평적 관계인 신소율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실상 주종 관계에 가까운 소피아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뻔하다. 무섭고, 두려워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그의 행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터.
“…괜찮니?”
“…….”
소피아는 대답 대신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러자 살짝 열린 앞섶 안으로, 앙증맞은 쇄골 아래에 낙인처럼 찍혀 드러난 붉은 자국이 보인다. 어젯밤 거듭된 난행의 흔적이었다.
“너, 멍자국이….”
“…제 상태는 신경쓰지 마세요. 그보다는 주인님이 문제죠.”
힘겹게 말문을 연 소피아의 얼굴은 괴로운 빛이 가득했다.
“이젠 다들 아시겠지만, 주인님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에요.”
그녀는 노구덕의 반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영적 기운으로 묶여 있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녀는 노구덕의 사소한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기실, 그녀가 노구덕의 변화를 눈치 챈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징조를 보인 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에요…. 그동안은 애써 드러나지 않게 억제하고 있었을 뿐이죠.”
“…하! 드러나지 않게? 헛소리도 정도껏 해. 여태껏 모르는 게 바보 아냐? 이번 원정 때만 해도…….”
“읏…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어! 소피아 언니, 너무한 거 아냐? 그런 걸 왜 이제야…….”
“소율아, 잠깐만 기다려.”
손을 들어 막 화를 내는 신소율을 자리에 앉힌 임유진은, 면목 없이 목을 떨구고 있는 소피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홀로 그 사실을 숨기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그이가… 비밀로 해 달라 한 거구나?”
“…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피아. 그러자 잔뜩 성이 나 씩씩거리던 신소율과 찬바람을 쌩쌩 날리던 데모나도 더는 그녀를 타박하지 못했다. 그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면, 노구덕의 권속인 소피아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
바꿔 말하면 지금 그녀가 입을 연다는 건, 주인인 노구덕의 뜻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권속이 주인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다? 본래의 ‘피의 권속’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기적’이 끼어들며 변화한 노구덕과 소피아의 계약은 본래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일방적 예속 관계인 건 마찬가지이나, 권속에게 좀 더 큰 독립적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만약, 소피아가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을 했다면 이 같은 항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사실을 털어놓는 게 진정으로 주인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항명이라도 해도, 그 저변에 숨은 의도는 순수하다는 얘기.
그렇다고 아예 페널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힘들게 말하고 있는 소피아의 얼굴은 물론이고 가녀린 몸 전체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만 봐도 그 반작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임유진은 말은 꺼내자마자 쉬지 않고 잔경련을 일으키는 소피아의 팔을 힘주어 붙잡았다.
“소피아,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이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어.”
“아, 아뇨… 할 수 있어요. 해야만 하고요.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는 일이에요.”
단호히 머리를 흔든 소피아는 떨림을 진정시키려는 듯, 야무지게 주먹을 쥐어보였다.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몰라요.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였다고 보시면 돼요.”
소피아는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았다.
수년 전, 그녀는 노구덕으로부터 한 가지 이상한 지시를 받았다.
‘인간이 아닌, 타 종족을 선택한 헌터들을 조사해라.’
‘네에? 타 종족이라뇨? 드래프트에서 종족선택을 한 헌터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최근 십년을 기준으로 해서, 그들의 성격, 행동양상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포괄적으로 조사해다오.’
당시가 한창 레그나토르 내부의 잡음이 끊이지 않던 시기라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뜬금없는 요구였다. 그러나 소피아는 내심 품은 의구심과는 상관없이, 충실히 그의 명령을 이행했다.
그리고, 몇 달 간에 걸쳐 수많은 표본들을 모은 소피아는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5년 전의 그 사건을 기점으로, 표본들의 행동패턴이 분명한 변화를 보였어요. 그 정도가 미미한 헌터들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일부 헌터들은 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를 보였죠. 그런 변화를 보인 헌터들은 대개 오크나 하플링 같은 종족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유독 오크는… 폭력적인 성향이 두드러졌고요.”
“그 사건이라면…….”
“흡혈왕 발레기우스의 시스템 붕괴 선언이에요.”
여인들을 둘러싼 공기가 침중하게 내려앉는다. 노구덕에게 일어난 변화가 보통 일이 아님을 짐작한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제 사견이에요.”
잠시 말을 끊은 소피아는 보다 굳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인간인 헌터들이 ‘종족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초월적인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죠. 시스템의 힘이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요.”
‘종족’은 단지 외형에 따른 구분이 아니다. 물리적인 특징은 차치하고서라도, 각 종족엔 대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특징이 있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오크는 용맹하지만 야만적이며, 하플링은 눈치가 빠르지만 행동거지가 비열하고 얍삽하다. 엘프 역시 부족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과묵하고, 보수적인 종족이다.
“…지금까지 시스템은 그런 차이를 무시한 채, 인간의 정신에 이종족의 육체를 담아 왔어요. 신의 섭리에 반하는 일이었지만, 시스템의 체계가 빈틈없이 유지되던 지금까진 별 문제가 없었죠. 그러던 것이, 5년 전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빈틈이 생긴 거예요.”
“그이의 변화가 시스템의 붕괴로 인한 부작용이란 거니?”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찾기 어려워요.”
시스템 붕괴로 인한 세계의 혼란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변화는 대륙 곳곳에서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하프엘프(Half elf)가 태어난 사례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스퀘어 대륙에 카름 전쟁이 일어난 이후, 수백 년 만에 탄생한 최초의 종간 혼혈이었다.
“주인님은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단계죠…. 다른 오크 헌터들도 상당한 변화를 겪은 편이지만, 주인님만 한 사람은 아직 없어요.”
“…아마 육체에 섞인 카름의 세포가 촉진 작용을 일으키는 걸지도 모르지. 어떤 의미로 보면 카름이야말로 시스템의 존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카름 조직의 이식은 아직까지 그 부작용이 제대로 밝혀진 바도 없고.”
잠자코 설명을 듣고 있던 데모나의 부언이었다.
“…그럼 아저씨는 어떡해요? 그런 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잖아요…. 왜 우리한테는 아무 얘기도 없이….”
“뻔하잖아? 혼자 끙끙대는 게 주특기니까 그렇지.”
“…확실한 건, 그때처럼 몇 달 간 폐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거예요.”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노구덕은 카르믹스톤의 부작용을 해결한다는 핑계를 대고 폐관에 들었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는 현재와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 그 정도는 약했지만, 확실히 평소의 그와는 딴판이었다.
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유진은, 마침내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건 그이와 터놓고 얘기해야만 해.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잖니? 시간을 두고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가족이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게 옳다고 생각해. 소피아,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요… 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구더기의 증상이 야성과 흡사한 충동에서 비롯된 거라면, 내가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봤자 임시방편이겠지만….”
소피아를 달래던 임유진과 신소율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데모나, 정말이니?”
“언니! 진짜예요?”
“너무 기대하진 마. 이건… 솔직히 말해서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야. 제대로 된 임상실험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지. 상당히 위험해.”
데모나가 제시한 방법은 흉포한 카름을 길들일 때 쓰이는 진정제를 투약하자는 것이었다.
현재의 노구덕은 인간, 오크, 카름의 조직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 그중 오크의 영향으로 성향이 변했다면, 반대로 카름의 조직에 자극을 주어 성질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가설이었다.
자세한 얘기를 접한 여인들은 낯빛이 금세 시들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괴물에게 투약하는 약물을 남편에게 쓰는 건 차마 못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데모나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무턱대고 그 방안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최악을 대비한 수단일 뿐이야.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마.”
“응….”
최악이란 말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꾸물거리며 답하는 여인들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다.
그날의 모임은 거기서 끝났다. 각자의 속마음에 깊은 고민을 떠안은 여인들은, 잔뜩 먹구름이 낀 얼굴이 되어 각자의 일터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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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12시 전후로 한편 더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구더기 몸상태 피력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서부쪽 에피소드를 진행할까해요. 에피소드 진행하면서 굉장히 처우가 고민되는 인물이 한 사람 있기는 한데… 아직 결정을 내리진 못했네요.
연재하면서 천천히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