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18)
0618 / 0777 ———————————————-
163# 준동(蠢動)
대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살가운 분위기였는데, 겨우 이십 분도 되지 않아서 회의를 주관하는 귀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기실 유메르바인이 나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 오래 지속될 회의는 아니었지만, 귀빈을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는 건 분명 굉장한 무례였다.
나가버린 유메르바인을 쫓아가, 회장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임유진은 찜찜하게 가라앉은 좌중의 분위기에 옅은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일라이자,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 건가요?”
사태 촉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일라이자는 면목 없이 목을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임유진은 그런 일라이자를 보며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 그녀의 발언은 평소의 나긋한 행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것이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구 크로스게이트의 파벌을 휘어잡으며 두각을 보인 일라이자가 아니던가?
“크로스게이트는 도미니온에 속한 클럽들과 별다른 원한 관계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면 도미니온에 개인적인 사감이라도 있나요?”
“개인적으로 도미니온을 좋게 보지 않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방금 전 발언에 대해서는… 너무 생각 없이 말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파멸의 현자껜 따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네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요. 이 건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죠. 유메에겐 제가 따로 기별을 넣겠어요. 일라이자도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세요.”
현명한 임유진은 조속히 불거진 문제를 진화하고 회의를 재개했다. 기실, 유메르바인이 던져 놓고 간 폭탄에 비하면 방금 전 일은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유메가 있는 자리에선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얼마 전 서부연맹에서 은밀히 접촉을 해왔다는 건 알고 계실 거예요.”
임유진의 말을 전 그믐달 오너, 루가니가 받았다.
“흠. 그랬었지요. 아다만티움 광산의 지분 문제였던가요? 도미니온의 제안과 비슷한 말을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은…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설마 서부연맹에서도?”
무거운 낯을 한 임유진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방금 전 유메의 말처럼 구체적인 제안은 아니었어요. 다만… 도미니온의 행보를 경계하라고 하더군요. 도미니온 측이 아다만티움 광산 문제를 공론화해서, 그걸 빌미로 서부를 통일하려 한다고요.”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겠군요. 전쟁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이중 누구보다도 연륜이 풍부한 루가니는 단숨에 임유진의 말 속에 담긴 속뜻을 간파했다. 그러나, 엔드리스의 1군 리더 출신으로 다소 국제정세에 어두운 샤카는 아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미니온 쪽에 붙자고 하시는 겁니까?”
“허허. 어느 쪽에 붙을 지는 알 수 없지. 다만 현 상황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단 말이었네.”
“……?”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샤카다. 그의 앞에 앉은 루가니는 후덕한 턱 주변을 매만지며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네. 아다만티움 광산은 실재하고, 그 위치는 신이 농간을 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묘하지. 그리고 우리 레그나토르를 포함한 서부 3국은 그 광산을 상대국에 넘길 생각이 없어. 아다만티움 자체로도 그렇지만, 세간에 알려지길 해당 광산의 매장량은 한 국가의 정예병을 모두 무장시키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더군. 그런 전략물자를 두 눈 멀쩡히 뜨고 타국에 넘길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요.”
“자네도 알다시피, 그간 우리 레그나토르는 이 다툼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네. 왜 그랬겠나?”
“그야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이러쿵저러쿵 다퉈봤자, 결론은 정해져 있잖습니까.”
“그렇지. 보물을 한 사람이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누면 될 일이야. 누가 승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전쟁보다는 그게 훨씬 합리적이지. 그래서 우리 레그나토르는 처음부터 광산의 지분을 삼등분할 생각이었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백팔십도 달라졌어.”
“음… 알 것 같습니다.”
루가니의 말대로, 세 세력의 공존(共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광산의 지분을 삼등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공존을 바라지 않는다면? 세 세력 중 어느 누군가가, 이 지루한 삼각 균형을 깨길 원한다면?
“본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광산 문제에 대해 강경히 나서지 않은 레그나토르는 덕분에 뜻밖의 수혜를 입었네.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의 속내를 알 수 있게 된 거지. 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더 이상의 평화를 바라지 않아. 레그나토르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네.”
도미니온의 유메르바인은 대놓고 선언했다. 서부연맹의 멸망을 바라노라고. 그리고 서부연맹 또한, 도미니온의 행보를 예의주시하며 군비를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레그나토르에겐 그나마 우회적으로 말했을지언정, 그들 또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의원님 말씀이 옳아요.”
그 다음, 소피아가 루가니의 의견을 두둔하고 나섰다.
“솔직히 아다만티움 광산은 구실일 뿐이죠. 도미니온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벌이기에 이보다 더 적기는 없어요.”
서부의 판도가 도미니온의 1강, 레그나토르, 서부연맹의 2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도미니온은 무척이나 호전적인 성향의 국가로서, 주변 세력을 병합하는데 있어 무력 사용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도미니온이 이제까지 잠잠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천연장벽인 벨룸 산맥의 존재, 안정기에 접어든 삼국정립 등.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대륙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이레시온의 견제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변했죠. 이레시온의 신경은 온통 동부에 쏠려 있어요. 위아래에서 치근덕거리는 북부동맹과 솔라리스를 감시하느라 도미니온 쪽을 주시할 여력이 없어진 거죠.”
“…타 세력들이 시시각각 영역을 넓히는 것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북부동맹이 투르의 북부지역을 점령했고, 이레시온 역시 투르 남부와 팔콘 일부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남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솔라리스는 한술 더 떠서 아예 팔콘을 속국으로 둔 양 행동하고 있다.
각 지구에서 한가락 한다는 세력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세를 불리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서부의 맹주를 자처하는 도미니온도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터.
일라이자의 말이 끝나자,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든 황석문이 손을 들었다.
“비록 표현이 거칠긴 했어도, 저는 일라이자 님의 의견에 일부 동의합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아예 서부연맹과 손을 잡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도미니온의 세가 마냥 커지는 걸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허, 정론이군요. 1강을 상대하려면 마땅히 2중이 힘을 합쳐야지요.”
“벨룸 산맥을 끼고 수비에 치중하면 도미니온도 함부로 공격해 오지는 못할 겁니다.”
황석문, 루가니, 샤카…. 어느새 모임의 중론은 도미니온과 적대시하는 걸 당연시여기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임유진 또한 중론에 수긍했다. 유메르바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섣불리 동맹을 맺기엔 도미니온의 대외적 신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더욱이 그 수장인 체스터는 밀월 관계가 끝난 이후에도, 종종 노구덕을 은연중 아래로 깔아두는 듯한 언행을 보이지 않았던가.
도미니온은 믿을 수 없다. 설령 동맹이 성공적으로 성립되어 서부연맹을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도미니온의 급격한 팽창은 레그나토르에게 있어 득이 될 게 없었다.
“…확실히 손을 잡으려면 서부연맹 쪽이 낫겠네요. 도미니온 쪽은 오직 승리만을 원하겠지만, 이쪽은 벨룸 산맥을 중심으로 전선을 유지하기만 해도 충분하니까요.”
요컨대 벨룸산맥 이서(以西)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길 원하는 도미니온과, 땅덩이에 상관없이 침공을 막아내기만 되는 두 세력의 입장 차이다.
그러나 소피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글쎄요…. 이왕 전쟁을 벌일 거라면, 맞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지 않을까요?”
“소피아, 그건 무슨 뜻이니?”
“말 그대로예요. 마음 먹기 여하에 따라… 도미니온의 정곡을 찌르지 못할 것도 없다는 거죠. 침략을 이겨낸 약소국이 강대국을 잡아먹는 것, 흔한 일이잖아요?”
‘그게 흔한 일이라고?’
이 순간, 어이가 없어진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굉장히 패기 넘치는 언사다. 실상 레그나토르와 도미니온의 전력차가 약소국과 강대국에 빗댈 정도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국력 차이가 확연한 것은 사실.
그런데 단지 막기에 그치지 않고, 적의 허를 찔러 동벌(東伐)을 행한다? 그것도 파멸의 현자를 비롯해, 과거 서부연합군의 주축을 이루었던 유수의 클럽들이 즐비한 도미니온을 상대로?
“으음….”
“허….”
살짝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묘하게 반전했다.
역발상이야 누구나 가능하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걸 입 밖에 내기란 쉽지 않다.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면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허나 소피아는 다르다. 근 십년을 통틀어, 서부 최고의 모사로 꼽히는 그녀는 절대 공적인 자리에서 허언을 내뱉을 여인이 아니었다.
“총사. 도미니온에게 오히려 역공을 가하잔 말입니까? 그게 실제로 가능한지요?”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저,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어요. 실제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제 예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그렇습니까.”
짐짓 차분히 말을 받는 샤카의 음성에서, 은근한 열기와 기대감이 느껴진다. 언더독의 승리야말로 모든 투사들의 로망 아니겠는가. 소피아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틀림없이 승산이 있다는 뜻이리라.
만약 이번 기회를 살려 도미니온을 도리어 거꾸러뜨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면 레그나토르는 벨룸 산맥을 넘어, 대륙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그건 곧, 이 구석진 서부를 벗어나 당당한 난세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자리를 채운 레그나토르의 간부들. 이들 대부분은 평생을 싸우며 살아온 전사들이다. 지속된 평화에 지루해하는 것은 도미니온의 전쟁광들만이 아니란 얘기. 레그나토르에도 승리의 영광에 목말라 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나.
고양된 건 샤카뿐만이 아니었다. 조용히 전의를 다지고 있던 다른 수뇌부들의 낯빛도 젊은이들의 홍안(紅顔)처럼 상기되었다. 정작 상황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조금 전까지 침략을 걱정하던 소극적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소피아의 세 치 혀가 불러온 변화였다.
오가는 의견에 귀를 기울이던 임유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
친우인 유메르바인과 적대한다는 게 영 꺼림칙하게 다가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전쟁이니까.
“…결정 났군요. 그럼 서부연맹과 바로 통신을 연결하도록 하죠. 날을 잡아 연맹 수뇌부와 자세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려도 괜찮겠습니까? 의장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간부 모두를 대표한 루가니의 질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레그나토르는 의장인 노구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다. 물론 대부분의 정책들은 여기 모인 간부진, 즉 ‘의원’들이 모인 의회가 처리하지만, 최종 인가를 내리는 것은 노구덕이었다.
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그가 어떤 기별도 없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간부들로서는 불안해질 수밖에.
“아니요.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뿐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임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밖엔 없었다. 모두의 앞에서 그의 상태를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후우….’
느는 건 한숨 뿐. 방에 혼자 있을 그를 생각하니 더욱 걱정이 앞선다. 흐릿한 속내를 뒤로 한 임유진은 이내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회의를 재개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은 한 편입니다.. ㅠㅠ
내일은 연참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음화는 독자님들 호불호가 좀… 갈릴 만한 화입니다. 좋아하실 분들은 좋아하실 것이고, 싫어하실 분들은 싫어하시겠지요.
제 작품 보시는 분들의 취향을 넌지시 알아볼 기회가 될 수 있겠네요.
일단 올리고, 바로 리리플 달도록 하겠습니다.
오타 수정을 바로 하려고 했는데 어제 조아라 새벽 점검 때문에.. 점검 끝나고도 한동아 들어가지지가 않더라고요. 저만 그랬나요..?
즐거운 밤 보내세요!
휴먼테일 / 언제나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라이자는 예전에 소개된 레그나토르 중진 중 한 명입니다.
NineBreaker / 구더기가 부인 복 하나는…
Velos / 퀸젤은 어디서 무엇을…?
라포르테 / 조만간.. 이겠죠?
다크체리 / 퀸젤도 나름대로 영업(?) 돌고 있는 중입니다!
은신설야 / 감사합니다아아으아아아아!
북치네 / 늦게 수정해서 죄송합니다 ㅠㅠ
유수월향 / 회수해야 할 복선이 많군요..
맛있는씬라면 / 서운하지 않게 굴려드리겠습니다.
무꾸914 / 구더기 곧 나와요!
Ghozt / 그 한 번의 외침이… 별명으로 굳어진..
하늘ㅇㅇ / 나름 장수(?) 캐릭터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디바인워즈 / 이제는 장난감으로 전락했네요.
호야[虎夜] / 사실 유메르바인 정도면 눈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경지..
능력Skyey / 오타 수정했습니다! 제보 감사합니다.. ><
진치 / ㅠㅠ 수정했드래요! 감사합니다!
왜이리들다재밌지 / 앞으로 구를 날이 많습니다.
허니앙쥬 / 여러가지로 고통받을 예정..
letzgo02 / 지금은 서로 칼을 겨눈 상황이네요..
모그퐁 / 감사합니다! 연참으로 보답할게요!
때구니™ / 했든 안했든 구더기가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게.. ㅠㅠ
xusaku / 그러고보니 소피아도 흑역사 거하게 찍었었죠.
elas / 독한년!
14C2A58H2 / 오.. 들장미소녀 캔디.. 거기 일라이자가 나오나요? 간만에 추억에 잠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