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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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심마(心魔)
164# 심마(心魔)
철썩!
뺨에서 크게 불꽃이 튄다. 야무지게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이태양은 엉거주춤하게 뺨을 감싸며 몸을 수그렸다. 정수리 위로 내리꽂히는 야멸찬 시선이 무척이나 따갑다.
“이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지금 일부러 이러시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자라처럼 웅크린 이태양은 바닥에 널브러진 약품들을 주섬주섬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흥.”
그런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안세희는 쌀쌀맞게 코웃음을 쳤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만하게 팔짱을 낀 자세하며 작게 코끝을 찡긋거리는 게 데모나의 그것과 상당히 닮았다.
“정말 우둔한 사람이네요. 간단한 심부름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죄송합니다….”
흩어진 약품들을 수습한 이태양은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인상을 구긴 안세희는 그런 그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됐어요. 당신은 믿을 사람이 못 되니까. 어서 나가버려요. 꼴 보기 싫어요.”
정말 평소의 그 안세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랄한 말본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타박이 일상이나 다름없는 이태양에겐 익숙한 폭언이었다.
“예, 예….”
“이봐요, 이건 가져가지 않을 셈이에요?”
얼떨떨하게 시선을 내리니, 안세희가 발끝으로 작은 약병 하나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가 약병을 주워 담을 때 일부러 발 아래에 숨겨두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유치하다 못해 저열하게까지 느껴지는 심술. 선하디 선한 얼굴로 이토록 밉살스런 말들을 입에 담으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진다. 허나 이태양은 군말 없이 허리를 굽혀 약병을 주워들었다. 또 한 번, 늘어진 머리 위로 잔뜩 깔보는 시선이 스며든다.
“다시 가지고 올까요?”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요? 오늘은 됐어요. 퇴근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요.”
“…알겠습니다.”
“볼이 부었네요. 나가기 전에 치료하는 것, 잊지 말아요.”
이태양의 손에서 눈꽃송이처럼 하얀 빛이 발현되자, 약간 부어올랐던 뺨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이후 안세희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이태양은 재차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방을 나섰다.
달칵.
“우우으으으…….”
문이 작게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막혔던 기도가 터지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전까지 날카로운 도끼눈을 번뜩이던 안세희는 그대로 옆에 있는 의자에 스르르 허물어졌다.
“왜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후회가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 이태양을 표독스럽게 몰아치던 방금 전과는 영 딴판이다.
사실, 방금 전에도 이태양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요구한 약품들을 제대로 바구니에 담아 왔다. 경력 십년이 넘어가는 베테랑 사제가 재생 물약의 제조 레시피를 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즉, 방금 전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안세희의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 도리어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엉뚱하게 꼬투리를 잡힌 이태양이었다.
그걸 안세희도 알고, 이태양도 안다. 그러나 안세희의 전속 ‘사용인’인 이태양은 그녀의 억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아니, 사용인이라는 입장은 제쳐두고서라도, 이태양은 안세희에게 기어오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구 피에스타 소속으로, 서부연합군 결성 당시 안세희와 아이리스에 같잖은 수작을 부렸던 그가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누구 덕분이던가. 음모의 주동자였던 그레이스와 남일우 등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였다.
안세희에게서 받은 은혜는 그뿐만이 아니다. 계약서상으로는 안세희의 사용인이지만, 편제상 레그나토르 의료대에 소속된 이태양은 피에스타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만 바라보는 나머지 식구들을 거뜬히 부양하고 남을 정도로.
그러니 꿈에서라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괴롭히는 안세희와 괴롭힘을 당하는 이태양. 두 사람은 그런 입장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비틀린 관계는 벌써 5년이 넘게 이어지는 중이다.
“휴우우우….”
다시 한 번, 그녀의 가슴어림이 커다란 기복을 보인다. 커다란 숨을 뱉어낸 안세희의 얼굴엔 수심이 그득했다.
벌써 5년 째.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태양의 우울한 낯짝을 보면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마구 치솟아 오른다. 그때의 배신감과 상처가 활활 타오르는 증오가 되어 입 밖으로 퍼부어진다.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에게 폭언을 하고, 그 꼴 보기 싫은 얼굴을 세게 후려치면 속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다. 서부연합군에서 당했던 그 일 이후로, 그녀의 작은 가슴에 멍에처럼 남은 그 응어리가.
그러나 아무리 이태양을 때리고, 욕하고, 할퀴어도… 그녀의 가슴 한복판을 틀어막은 둑이 뻥 뚫리는 일은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하기도 하고, 평소처럼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지만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덩이는 그대로였다.
잔뜩 꼬여버린 정신머리는 이제 스스로도 풀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꼭 머리 어딘가를 죄고 있던 나사가 풀려버린 듯하다.
주인 잃은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안세희는 느릿느릿 일어났다. 얼른 뭔가 하지 않으면, 이 텅 비어버린 공허감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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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없이 방 밖으로 나온 안세희. 그녀는 얼마 걷지도 못하고 발을 멈추었다.
“언니? 어디가?”
“세희야.”
“아… 세영아. 진솔 오빠.”
안세희를 불러 세운 이는 그녀의 하나뿐인 동생, 안세영이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남편인 김진솔이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중충했던 안세희의 안색이 다소 밝아졌다. 이들 두 사람은 그녀가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구들이었으니까.
“딱히… 어딜 가고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잠시 머리나 식힐 겸 해서…. 두 사람은?”
“아, 나는 뭐… 그냥 한가해서 남편 따라다니고 있어. 오늘 아침부터 회의하고 있잖아? 감시할 사람도 없고 해서.”
가볍게 대꾸한 안세영은 슬그머니 김진솔의 팔짱을 끼며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그녀에게 팔을 붙들린 김진솔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진다.
“어어, 밖에서는 이러지 말랬잖아.”
“뭐 어때? 누가 본다고. 오빠는 내가 싫어?”
“그, 그건 아니지만.”
결혼하고, 애를 낳고서도 한창 연애할 때처럼 잡혀 사는 건 여전하다. 그나마 ‘김진솔’에서 ‘진솔 오빠’로 불리게 됐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안세희는 두 사람의 화목한 모습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벌써 살림을 차린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말괄량이 동생이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김진솔과 안세영의 나이가 각각 스물여덟, 스물다섯이니 별로 이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어색한 거다.
“진솔 오빠는요?”
“으응. 의장님께 결재받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늘 출근을 하지 않으셨더라고. 그래서 사택에 가는 길이야.”
김진솔은 팔에 끼고 있던 작은 서류철을 보여주었다.
“그래요… 의장님께서 오늘 나오지 않으셨구나….”
“응. 사모님들께 여쭤보려고 해도,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말이지. 세희 너는 혹시 들은 것 없어?”
오늘은 도미니온의 재상 유메르바인이 방문하는 날이다. 임유진과 소피아 등, 레그나토르의 주요 인사들은 현재 대부분 대회의장 쪽에서 회담을 진행 중이었다.
김진솔의 질문에, 얼마 전 지하에서 있었던 노구덕과 임유진의 마찰을 떠올린 안세희는 금세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아마 몸이 조금 편찮으신 걸 거예요.”
“엉? 형님… 아니, 의장님께서?”
“말도 안 돼. 정말이야? 감기 한 번 걸리신 적 없었잖아?”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치떠진다. 그도 그럴 것이, 노구덕이 어떤 인물이던가. 대륙 최고의 육체파라 할 수 있는 그가 몸이 편찮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떠들고 다녀서 좋을 일은 아니니까요. 이 일은 가급적 비밀로 해주세요. 세희, 너도.”
“응? 아, 응. 당연히 그래야지.”
“알았어, 언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준 안세희의 눈길이 김진솔이 끼고 있는 서류철에 머물렀다.
“진솔 오빠, 괜찮으시다면 그 결재, 제가 대신 받아도 될까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해서요.”
“진짜? 오빠, 그렇게 하자!”
“어? 하지만….”
“언니가 모처럼 도와주겠다잖아. 지금 괜히 일거리 들고 가봐야 의장님이 좋아하시겠어? 이참에 짧게 데이트나 하자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농땡이 피워?”
희희낙락한 안세영은 얼른 김진솔에게서 서류철을 빼앗아 안세희에게 건네주었다. 소피아 같은 상급자들이 전부 회의장에 있으니 그야말로 살판이 난 모습이다.
“세희야, 미안해. 내가 직접 가야되는데.”
“괜찮아요. 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언니, 고마워! 다음에 내가 한 턱 쏠게!”
손을 잡고 멀어지는 안세영과 김진솔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안세희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동생에게서 받은 서류철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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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의장님, 안세희입니다.”
몇 번이고 노크를 해 보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 계시나…?”
의아해진 안세희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대로 돌아갈지, 아니면 그냥 들어갈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를 돌렸다. 일을 자처해서 도맡은 이상, 노구덕이 볼 수 있도록 서류라도 두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소심한 마음에 살금살금 문을 열어젖힌 안세희는, 열린 문 틈 사이로 확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에 급히 코를 움켜잡았다.
“욱…!”
안세희의 낯빛이 능금처럼 무르익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섯, 남자를 아는 건 아니지만 성에 무지한 건 아니다.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이 농후한 냄새는… 사내의 정액 냄새였다. 그 외에도 짙은 땀 냄새와 여인의 체향 등이 뒤섞여,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풍겨나고 있었다.
‘청소도 안 한 것 같은데….’
숫제 묵은내가 되어버린 냄새도 냄새지만, 눈앞에 펼쳐진 방 안의 모습도 엉망이다. 가구와 집기가 온통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방 안은 한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듯했다.
임유진과 소피아는 일과 육아로 바쁘고, 최근 육아에 전념하다 갑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힌 데모나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소율은 단기 출장. 아내가 넷이라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
‘가만, 그때 소율이 언니가…….’
얼마 전까지 음부의 잦은 찰과상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던 신소율의 얼굴이 퍼뜩 생각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 도망치듯 긴트로 가버린 그녀. 과연 이게 우연일까?
그러고 보니 누런 자국이 군데군데 새겨진 침대 시트 위로, 점점이 새겨진 붉은 색의 핏자국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청소라도 해야겠어.’
안세희는 정화 주문을 사용했다. 그녀의 손에서 뻗어나간 선연한 빛무리가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찬 실내를 빈틈없이 뒤덮는다.
정화 주문으로 악취와 땟자국을 말끔히 씻어낸 안세희는 씩씩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중요한 서류를 전달하러 왔다가 졸지에 청소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노구덕과 임유진 등은 안세희, 안세영 자매에게 있어선 평생의 은인이다. 개인적으로도 부모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였으니, 이런 자질구레한 청소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기쁘네. 이럴 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크게 틀어진 침대 귀퉁이로 다가간 안세희는 낑낑거리며 침대를 제 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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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니.. 쓰다가 보니까 분량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전편에 말씀드렸던 호불호는 다음편이 될 것 같네요 ㅠ 괜히 말한 것 같아요.. 왠지 제 입으로 스포일러를 한 것 같은 기분..
12시 이후 새벽에 한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비가 오다 그치고 오다 그치고 하니까 오히려 날씨가 더 습한 것 같네요. 내리려면 좀 시원하게 퍼부을 것이지!
p.s / 플래그 회수합니다.